일요일 아침 7시에 도착하는 Achim 영감 🍊
허무

지난 한 주 동안은 ‘허무’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 있었던 크고 작은 이슈들, 봤던 영화, 읽은 책 등. 모든 것을 아울러 공통으로 느꼈던 감정 속에 ‘허무’가 있더라고요. 쉽게 흘려보낼 꺼리는 아니었어요. 좀더 붙잡고 싶었습니다. 허무(虛無)의 사전적 정의는 이러합니다. 1. 아무것도 없고 텅 빈 것 2. 세상의 진리나 가치, 또는 인간 존재 자체가 공허하고 무의미한 상태. [Oxford Languages님은 언제 이런 감정을 느끼나요?


“이 시간은 나에게 무슨 의미지?”, “무엇을 위한 것이지?” 같은 듯 조금씩 다른 질문을 스스로에게 자주 하는 편입니다. 보통은 나름의 이유와 목적이 있어요. 저는 제 존재와 시간이 유효하게 쓰일 때 행복감을 느껴요. 그 반대로 흐리멍덩한 시간을 보내면 허무함을 느껴요. 조금 더 삶의 목적과 일치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죠. 당장은 직접적이지 않고, 조금 돌아가는 길이라도, 과정 중에 꼭 지나가야만 하는 어려움 속에 있어도 충분한 의미가 있죠.


20살. 베이커리에서 인생 첫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학기 중에도 짬 내서 할 수 있는 주말 아르바이트였어요. 친구와 유럽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부모님께 받는 용돈으로는 부족했죠. 여행이 선물해줄 새로운 차원의 경험을 상상하며 꽤 긴 시간 동안 일요일 오후를 반납했습니다. 쉬고 싶은 유혹을 이기고 출근하는 시간이 고되기도 했지만, 언젠가 끝이 있고, 노동의 목적이 분명했기에 재밌게 일할 수 있었어요.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올 때 몸에 밴 빵 냄새, 오랫동안 서있어 뻐근해진 허리와 다리 등. 당장의 어려움은 갈 때마다 원하는 빵과 우유를 하나씩 골라 먹을 수 있다는 단기적인 보상으로 승화시키며 이겨냈어요. 결국 마지막 날이 왔고, 필요한 만큼의 돈을 모아 21살 여름 방학 때 이탈리아와 파리에서 한 달 동안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소중한 추억을 쌓았습니다.


무의미와 허무의 세계에 발 담그지 않고자 적극적으로 ‘어려움 → 재미 → 의미’의 루프로 걸어 들어가 살고 있어요. 고되지만 이로운 흐름이라고 생각해요. 갑자기 지구의 자원과 에너지가 어떻게 흐르는지 궁금해 생명과학 강의를 찾아봤어요. 그리고 이제야 물질은 순환하지만 에너지는 소비된다는 원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물질은 순환한다. 그러니까 내가 가진 물질과 소유는 그저 순환 경제의 일부이며, 언제든 내 것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쓰임을 다한 에너지는 지구 밖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새롭게 채워지지 않으면 지구 시스템이 멈추듯 삶의 동력이 되는 에너지 또한 충전되지 않으면 멈추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로 받아들여지더라고요.


  • 여기서 잠깐..! 지구 시스템의 가장 큰 에너지가 ‘태양 에너지’인데요. 물이 태양 에너지를 흡수하면 비나 눈이 내리고, 기압 차이에 의해 바람이 불고, 바람은 해류를 만들고 풍화와 침식이 일어나 지표의 모습이 변화됩니다. 뿐만 아니라 태양 에너지는 광합성을 통해 생물에 흡수되어 생명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가 되고, 석유와 석탄의 근원도 태양 에너지입니다. (기억하고 싶어서 오랜만에 필기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분명 배웠는데 왜 이렇게 낯설까요.)


그렇다면 삶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원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허무가 아닐까요? 허무함,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감정을 느끼면 벗어나고 싶어 져요. 조금씩 방향을 틀고 앞으로 나아갈 이유가 생겨요. 다수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에 무게를 둘 필요 없이, 때로는 모든 것을 가볍게 만들고 동시에 이 땅에 단단히 발 붙이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고요. 허무한 인생과 더불어 사는 삶. 그 고민은 이어서 소개할 책을 통해 조금 더 힌트를 얻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잠시 쉬었다 가요. 님께 소개하고 싶은 노래가 있거든요.

Morning Song

FKJ - Just Piano

French Kiwi Juice 또는 약어 FKJ로 알려진 빈센트 펜톤(Vincent Fenton)은 프랑스 멀티 악기 연주자, 가수 및 음악가입니다.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고 즉석에서 루핑 하는 라이브로 유명해요. 리듬에 리듬을 더해 즉석에서 한 곡을 완성하죠. 톰 미시(Tome Misch)와 함께한 라이브 세션을 인상 깊게 봤는데, 최근 새로운 앨범을 내면서, Colors를 통해 오랜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고, 조금 더 무르익은 연주를 선보이더라고요. ‘US’라는 곡을 연주하는데 너무 훌륭합니다. 얼마나 그 순간을 즐기고 있는지 느껴져요. 컬러 라이브에 올라오는 연주를 보면 아티스트와 잘 어울리는 컬러를 찰떡같이 찾아내 라이브 연주에만 몰두하게 만들어요. 차분한 키위색의 FKJ라이브도 좋았습니다. (물론 저의 최애 컬러스 라이브는 0.1초의 고민도 없이 Parcels 버전이고요.)


아무튼 이런 계기로 FKJ의 최근의 작업을 찾아보다 평소와 다르게 딱 한 가지 악기만을 다루는 라이브를 발견했습니다. 피아노가 전부예요. 여러 악기를 동시에 연주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의 시작인 피아노로 돌아와 겸손히 어깨를 웅크리고 연주를 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20분 정도 되는 연주를 가만히 집중해서 봤어요. 아침과 잘 어울리는 곡이에요. FKJ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거실 공간과 집을 둘러싼 자연도 너무 아름답습니다.

Morning Reading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 김영민

냉소적인 낙관주의자. 김영민 교수님의 책을 좋아합니다 광야 생활 같은 인생의 노고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무조건 비관하지 않고 유머를 섞어 인간의 결점과 모순을 지적하는 화법이 매력적이에요. 며칠 전, 신간 소식을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일단 제목이 너무 맘에들었어요.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내용이 너무 궁금해 바로 주문했어요. 요즘은 정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자꾸만 높아지는 책 탑을 보며 충동구매 방지를 차원에서 꼭 필요한 책인지 두 번 세 번 네 번씩 질문하고 있는데요. 이 책은 모든 과정을 스킵할 수밖에 없었어요. 김영민 교수님의 허무론이라니. 얼마나 재밌을까…


아직 반 정도밖에 못 읽었지만, 한 챕터 한 챕터마다 피식피식 웃는 지점이 계속 나오고 있어요. 그래서 일영모를 통해 님께도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겠습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요즘. 때로는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하지만 이 감정에 지지 않고, 나의 벗 삼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종종 찾아오는 허무함에 매몰되지 않고, 깊은 곳으로 내려가 내가 딛고 일어설 바닥을 감각하고 우아하게 반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침서 같은 책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들추고 찌르는 가시를 포근하게 감싸안고 싶습니다. 저는 이 글이 너무 좋고, 아직 읽을 페이지가 남아 너무 행복합니다.


P.10 / 인간에게는 희망이 넘친다고, 자신의 선의는 확고하다고, 인생이 허무하지 않다고 해맑게 웃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인생은 허무하다. 허무는 인간 영혼의 피 냄새 같은 것이어서, 영혼이 있는 한 허무는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은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인간의 선의 없이도, 희망 없이도, 의미 없이도,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는 상태를 꿈꾼다.


P. 20 / 인간에게는 약자를 보고 측은해하는 마음(측은지심), 잘못한 것을 두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수오지심), 욕심내지 않고 양보하는 마음(사양지심),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판별하는 마음(시비지심)이 있다고 믿는다. 그 마음을 버려두고 세상의 허영을 좇는 것은 영원한 것을 버려두고 사라질 것을 좇는 일과 다름없다. 떠나는 봄이 아쉬운가. 자신의 선한 마음을 "돌이 켜본다면, 간직할 수 없는 봄이 애당초 내게 없었던 적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P. 90 / 나도 패터슨처럼 일정한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 잠자리에 들기 전 산책을 하고, 샤워를 한 뒤, 페이스북에 그날 밤에 들을 음악을 올리고, 그날 갈무리한 책과 영상을 보다 잠든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달걀을 삶는다. 타원형의 껍질 안에 액체가 곱게 담겨 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오랫동안 해온 일이기에, 나는 내가 원하는 정도로 달걀을 잘 익힐 수 있다. 오래도록 이 일상을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 목표를 달성할 수 없어 도는 초조함도, 목표를 달성했기에 오는 허탈감도 없이,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 사라질 내 삶의 시를 쓸 수 있기를 바란다.

Morning Cookie

Atelier Pond

“인생의 허무란 제거할 대상이 아니라 관리할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보다 맛있는 케이크를 찾아 오늘도 새로 문을 연 제과점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이다.”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최근 긴 시간 동안 달려온 브랜드 론칭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클라이언트로부터 맛있는 쿠키 한 박스를 선물 받았습니다. 이 쿠키를 언제 먹으면 좋을까 하고 적당한 때를 기다리다. 일영모를 쓰면서 박스를 열었어요. 우선 뜨거운 홍차 한 잔을 준비했습니다. 접시에 쿠키를 종류별로 옮겨 담고 향긋한 홍차와의 페어링에 감탄하며 티타임을 갖는 중에, 제 무의식 속에서 잠자고 있던 문장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아. 그 맛있는 거 먹으면서 살라고 했던 문장 뭐였지!’ 이런 의식의 흐름을 따라 출처를 떠올리다, 휘발되는 생각을 잡아두는 용도로 쓰고 있는 트위터에 남겨둔 게 생각나 찾아보니, 엥? 또다시 김영민 교수님의 책이더라고요..? 3년 전 이맘때 나온 논어 에세이예요. 참 오랫동안 허무에 대해 말해오셨더라고요. 역시나 냉소적이지만 낙관적인 태도로요.


공감합니다. 허무 관리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아름답고 맛있는 것을 취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정성껏 만든 쿠키라면 더없이 좋겠죠. 맛있고 귀엽고 예쁘기까지 하니까요. 아틀리에 폰드의 쿠키를 상자를 여는 순간 제가 있는 곳은 바로 행복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허무가 뭐야. 내 앞에 따뜻한 차와 쿠키가 있는데. 아틀리에 폰드는 신비롭습니다. 홈페이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쿠키도 하루에 50박스만 판매해요. ‘평범함 가운데 숨겨진 보물’ 같은 디저트를 만듭니다.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오랜만에 깊게 감동한 브랜드 경험이었습니다. 쿠키가 담긴 나무 상자부터, 브랜드 소개 페이퍼의 촉감, 영어 폰트와 묘사에 쓰인 아름다운 단어들, 다임(thyme)부터 통카(Tonka)까지 쿠키로는 처음 만나보는 재료들, 무엇보다 쿠키 맛까지. 여행의 기분과 닮아 있는 브랜드 경험이었어요.


제게는 더 없이 유효했던 선물이었습니다. 고마운 사람에게 마음을 전할 때, 고민 없이 아틀리에 폰드의 쿠키 박스를 떠올리게 될 것 같아요. 아, 쿠키만 만드는 건 아닙니다. ‘파티세리 폰드’라는 이름으로 별도 라인을 운영하며 휘낭시에, 마들렌, 그래놀라 등을 판매하고 있어요. 듣기만해도 설랩니다. 전에 휘낭시에를 맛본 적이 있는데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자동으로 눈을 감았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그래놀라인데요. 운명처럼 폰드 매장이 사무실과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다음 주 중 꼭 한번 가보려 해요. 설레네요. 꼭 맛보셨으면 해요. 몰랐던 향과 맛을 감각하는 순간, 인생은 살아내야 할 이유로 가득해질 거예요.


🍪 IG - atelier.pond

🫖 IG - patisserie.p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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