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국가]라는 책에서 우리가 도시공동체를 형성한 이유는 모든 동료시민들 각자가 자기 자신의 본래성에 따라 영혼의 생기 있는 삶으로서 ‘본래적인 자기 몫’의 삶을 자유롭게 살아가는 데에 어려움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하였다.

  ‘자기 몫’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볼런티어 활동이 ‘본래적인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온-빙하는 삶을 잘 살아가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 자기물음을 한바 있다. 본래적인 자기 몫의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볼런티어 활동가들은 내가 얻고 있는 보람, 기쁨, 행복,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과 칭찬들이 자기 몫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한 몫들 역시 자기 몫임에는 분명하지만, 셈할 수 있는 ‘사회적 몫’에 한정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회적 몫은 어떤 활동 속에서는 많이 얻을 수도 있고, 또 궁핍하게 얻을 수도 있으며, 또 어떤 활동 속에서는 전혀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단지 사회적 몫만으로 본래적인 자신으로 존재하는 온-빙하는 삶을 이야기하기에는 뭔가 부족해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본래적인 온-빙하는 삶을 위한 자기 몫으로서 사회적 몫과 구별되는 셈할 수 없는 ‘존재의 몫’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존재의 몫은 본래적인 자기 자신으로 온-빙하는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몫으로서 다른 누구에 의해서도 박탈되거나 파괴되지 않는 몫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사회적 관계속에서 자신의 삶에 가해지는 어떤 고통에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사회적 몫이 다 박탈된 상황에서도 내가 지금 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삶을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존재의 몫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몫을 얻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감정적인 기쁨이나 보람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때로는 ‘내가 왜 이렇게 힘들게 굳이 볼런티어 활동을 지속해야 하는가?’ 하는 깊은 자기성찰적 물음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순간속에서도 내가 볼런티어 활동을 회피하지 않고 지속하고 있고, 또 지속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볼런티어 활동이 본래적인 자기 자신으로 온-빙하게 할 수 있는 ‘삶의 힘’으로서 ‘존재의 몫’을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는 날마다 되풀이 되는 볼런티어 활동 속에서 본래적인 자기 자신으로 온-빙하는 삶에 지속가능한 힘을 주는 ‘존재의 몫’을 경험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