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SF 소설 팬들을 뒤집어지게 하는 소식이 있었으니, 바로 정보라 작가님이 『저주토끼』로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른 일입니다. 지금은 같은 책으로 23년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로 선정되셨다지요. 그 후 4년 만에 나온 신작 장편소설 『고통에 관하여』은 고통을 획기적으로 줄여주며 부작용도 없는 신약 NSTRA-14가 개발된 이후를 그립니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마땅히 견뎌내야 할 '고통'이란 감각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세상이라니, 아마 사람들은 그곳이 유토피아가 될 것이라고 짐작했을 겁니다. 하지만 '존재'로서 감내해야 할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영혼을 자각하지 못하는 삶'과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나죠. 신체적 고통에 따르는 두려움, 절망감, 모멸감, 자괴감, 분노 등이 영혼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결론에 다다른 이들은 세상에서 고통을 사라지게 만든 악의 근원, 제약회사를 상대로 테러를 가합니다.

정보라 작가님은 미국에서 열린 SF 행사에서 처음 이 이야기의 물꼬를 발견했다고 해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겪은 이들이 호소하는 고통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이 마약성 진통제였고, 정부가 이를 통제하자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답은 고통과 죽음뿐이었던 거죠. 이렇게 선택지를 극단적으로 좁히고 반복되는 고통과 보상을 주어 멀쩡한 사람을 길들이는 것은 사이비종교에서 흔히 쓰는 세뇌 방식입니다. 마치 소설 속 '교단'처럼 말이죠.

정보라 월드의 특징으로 꼽히는 점이 바로 한 글자로만 지어진 등장인물의 이름인데요. 기묘하고 낯선 배경이었던 이전 작품들에서는 충분히 어울렸던 그 이름들이, 현대 배경의 장편소설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처럼 등장인물들의 낯선 이름은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과 같아요. 교단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한('개'를 뜻하는 한자), 제약회사에 폭탄을 날린 태('창'을 뜻하는 한자)의 이름은 아주 직관적으로 설계되어 있죠. 거기다 소설의 진짜 주인공인 경과 현의 한자는 같은 뜻을 품고 있답니다. 소설이 끝난 뒤에 등장인물의 이름에 담긴 뜻을 되짚어 보며 이야기를 곱씹는 것도 이 책의 큰 매력 중 하나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을 뜻하는 한자어 풀이는 책의 도입부에 나와 있습니다.)

🧠 특별 영감 리스트 대공개! 정보라 월드는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책이 출간되기 전에 진행했던 가제본 서평단 분들에게 특별한 리스트를 함께 보내드렸는데요, 바로 정보라 작가님이 집필할 때 함께했던 음악과 영상물 모음입니다. 책을 읽기 전에 보아도 좋고, 읽고 나서 맛보아도 좋겠죠? (작가님의 코멘트를 함께 곁들입니다.)

🎬 <마약 스캔들의 재구성 How to Fix a Drug Scandal>, 넷플릭스, 2020

약물을 분석하는 연구원도 결국 인간일 뿐이고 마약의 후폭풍은 길고도 끔찍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어처구니없는 다큐멘터리입니다.

🔬 허구(fiction)라고요? 다가올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이 책을 과학 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 건, 책 속에 스며들어 있는 갖가지 과학적 설정들 덕분입니다. 여전히 부작용 없는 진통제를 만드는 연구는 계속되고 있고요, 사람의 냄새 분자를 분석해 신분을 확인하는 기계는 이미 도입되어 실전에서 쓰이고 있다고 합니다.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는 동성 부부 경과 현이 아이를 갖는 장면에서 많은 독자 분들이 감동과 놀라움을 호소하셨는데요. 실제로 이스라엘의 와이즈만 연구소에서 정자와 난자, 자궁 없이 줄기세포만으로 합성 인간 배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역시 미래를 예견하는 SF 소설답죠. 다가오는 22세기를 충실히 준비하려면 우리 모두 SF 소설을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