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서치 딜리버리 vol.6
매체-신체로 살아가기
 2023. 10. 27. 

저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몸'을 떠올립니다. 


지난 3월, 당신 몸의 안부를 묻는 문장으로 시작한 *c-lab 7.0 리서치 딜리버리가 막을 내립니다. 공식적인 프로그램과 프로젝트가 끝난 *c-lab 7.0은 약 2달 동안 프로젝트 참여 아티스트와 연구 동반자 랩메이트를 만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후니다 킴, 전보경, 권태현 및 프로젝트에 참여한 협업자와 함께 프로젝트의 실현 과정을 다시 짚어보았고, 8명의 랩메이트와는 프로젝트 참여 후기를 나누고 최종 연구 결과물을 위한 주제 공유회와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리서치 딜리버리 마지막 호에서는 랩메이트가 최종 연구 결과물을 작성하며 다방면으로 펼친 리서치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랩메이트의 최종 연구 결과물과 프로젝트의 후기를 담은 애프터 토크가 궁금하시다면 11월에 발행될 *c-lab 7.0 자료집을 기대해 주세요!


*c-lab 7.0은 변화하는 기술 환경과 결합하며 유기적인 몸의 경계를 여는 매체-신체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의 끝에서 주체-신체가 아닌 '매체-신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의 몸으로는 감지되지 않는 불안을 견디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으로 그 가능성을 증명해 여전히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때처럼 눈을 깜빡 감았다가 뜨면서 당신의 안녕을 바랍니다. 그럼 *c-lab은 또 다른 시작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c-lab은 리서치 딜리버리를 구독해 주시는 독자의 의견을 소중히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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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댄스 필름이라 여겨지는 마야 데렌Maya Deren의 <카메라를 위한 안무연구>(1945) 이후 '코레오시네마'라는 명칭이 생겼습니다. 뉴욕타임스 무용 평론가 존 마틴John Martin은 코레오시네마를 "무용과 카메라가 하나의 예술 작업을 창조하기 위해 협력하는 예술"로 정의합니다. 팬데믹으로 공연장을 떠난 무용가에게 영상 미디어는 무용을 선보이는 매개이자 새로운 표현의 방법으로 떠올랐습니다. 오늘날, 예술 현장에서 댄스 필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스토리텔링과 창의적 표현의 안무, 그리고 혁신적인 미디어 아티스트의 영화적 작품, 주요 댄스 필름 플랫폼에서 선보이는 영화들을 형식에 따라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다큐멘터리

극적인 요소를 배제하며 실제 상황을 사실 그대로 찍는 장르. 대부분 거장 안무가의 예술관을 비롯해 그들의 일상까지 가깝게 들여다보며 관객들에게 예술적 자극과 공감 등을 끌어내는 동시에 거장의 예술관을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 제작됩니다.

② 스크린 댄스

오늘날 주요 댄스 필름 플랫폼에서 가장 많이 상영되는 장르로 주로 안무적, 영화적 실험을 기반으로 하는 비교적 짧은 영상입니다. 안무가와 연출자의 동등하고 밀접한 협력이 전제되며 '카메라를 위한 안무', '안무적 연출'의 조화를 통한 에너지로 만들어집니다.

③ 극영화

극적 전개가 중심이 되고 일정한 줄거리가 전개되는 장르인 만큼 이야기와 무용의 연결 지점 그리고 촬영과 편집, 영상미 등 모든 영화적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이 외에도 춤과 카메라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스타일의 작업 역시 댄스 필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댄스 필름의 중요한 목적은 무용수의 몸이 영상 미디어를 매개로 다른 시공간의 관객을 만나는 것입니다.


* 본고는 임수진, "댄스 필름, 춤과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또 다른 예술", 2020 (링크)을 요약, 발췌한 글임을 밝힙니다.

데이빗 로든David Roden은 『포스트휴먼의 생』(2014)에서 '사변적 포스트 휴머니즘'을 제시한다. 여기서 그는 트랜스 휴머니즘의 인식을 수용하여 인간의 많은 측면이 기술적 수단을 통해 최적화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능력의 한계가 극복되어야만 한다'는 트랜스 휴머니즘의 가치 판단적인 측면과는 거리를 둔 사변적 논의에 머물고자 한다. 한편 로든은 기술적으로 변형된 비인간 타자의 가능성을 고려하면서도, (일부 비판적) 포스트 휴머니즘의 입장과는 달리 그 존재가 인간 몸과 정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지각과 능력을 갖췄을 것이라 설명한다. 다시 말해 비인간 타자를 인간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을 버리고 그 차이점을 인정하자는 입장인 것이다.


조금 더 실천적인 영역에서, 트랜스휴머니스트 슈테판 로렌츠 조르크너Stefan Lorenz Sorgner와 예술가 하이메 델 발Jaime del Val은 공동으로 2010년 「메타휴머니즘 선언」을 발표한 바 있다. 이들은 이념적으로는 로든의 입장과 유사하나, 더욱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방식을 추구한다는 면이 특징이다. 2022년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갱신되어 온 메타 휴머니즘의 강령은 크게 돌연변이, 정렬 해제disalign, 저항이라는 세 가지의 키워드로 요약된다. 가령 "지구의 유행병이 되지 않기" 위해 인간 종의 번식을 중단하고 성별의 모든 구분을 넘어선 '메타섹슈얼metasexual'의 상태를 추구하며, 적극적인 채식을 받아들인다. 또한 "몸의 잠재력을 펼치"고 "움직임을 재창조"하고자 돌연변이적 움직임과 정치적 움직임을 옹호하며, 그 과정에서 타자와 "관계형 복합체"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 참고 자료: 야니나 로,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 2021, 부산대학교 출판문화원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탈인지』(2016)


비인간 사물이 세계에 창조적 힘을 행사하는 행위소이며, 그들 역시 느끼고, 감각하고,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많은 동시대 사상가들이 끊임없이 인간중심주의와 상관주의를 극복하고 세계를 새로이 인식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 언표들이 직접적으로 가슴에 와닿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앞에 놓인 장벽을 더 높이, 더 견고하게 쌓아 올리는 것 같기도 하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스티븐 샤비로는 이러한 난제 앞에서 SF로 시선을 옮긴다. 그에 의하면 SF는 어떠한 '사실'도 증명해 내지 못하지만, 인간 이외의 존재들에 대한 기상천외한 가정을 제시하는 '사고 실험'처럼 기능한다. 『탈인지』에서 그는 비인간 존재자들이 감각하고 생각하는 방식을 SF가 제안하는 허구적 서사를 통해 탐구하고 있다. SF가 등장인물과 서사를 통해 구축해 가는 부정적일 수도 긍정적일 수도 있는 가상의 세계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도, 또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던지는 수많은 질문은 우리에게 감상을 넘어 적극적인 고민을 요구한다. 사고 실험으로써 SF는 우리가 미래에 실제로 마주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한 효과적인 대비책을 마련해 줄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 『G.H.에 따른 수난』(1964)


G.H.가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단지 방 안의 앉아 있는 자리에서 진행되는 기나긴 독백은, G.H.로 대표되는 하나의 살덩어리라는 물질이, 곤충이, 나아가 광물이 되는 경험을 통과한다. 인간은 지적인 존재임을 자처하고, 사물에 당연한 듯 이름 붙이지만, 그럼으로써 사물과 멀어진다. 인간이 타자와 결합할 수 있는 이유는 몸을 가진 덕분이다. 몸을 매체로 하여, G.H.는 자신과 극단적으로 반대편에 있(다고 믿)는 존재와 합일하고, '중립'이라는 연결의 근본적 요소를 발견한다. 이러한 G.H.의 '되기'는 몸은 몸 자체로 본질적이지 않으며 맞닿고 통과하고 찢어지고 기워지면서 늘 변화하고 있다는 것, 몸은 결과물이자 과정의 도구로 쓰이며, 과정 자체가 매번 새로워지는 결과이고, 그것에 정해진 룰이나 경계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경계를 설정하고 재설정하는 운동이 중요하다. 그 과정을 G.H.는 그의 여성인 신체로 수행하면서, 이 운동, 즉 수난을 통해 스스로가 은총이라고 부르는 순간에 이른다. 그는 공허하고 축축한 중립의 지대에 이르러 그가 미리 곁에 있어 달라고 요청했던 '너'가 이제는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손을 내미는 데까지 나아간다.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를 기다린다고 말하며.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나와 너ich und du』(1923)


관계는 대화의 기반이 된다. 따라서 둘은 분리될 수 없다. 그렇기에 대화의 본질을 논의하기 전, 관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는 관계의 본질에 대한 주요 논의를 제시한다. 부버는 '나-너(I-Thou)'와 '나-그것(I-It)'으로 관계를 구분하며, 이 두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하는지 논의한다. '나-너'는 대화를 통해 두 인간이 서로를 단순한 특성으로만 보지 않고, 전체적인 존재로서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는 상대방의 궁극적인 존재를 내재화하고 더 나아가 진정한 대화와 연결을 가능케 한다. 반면 '나-그것'은 상대방을 분리된 객체로 여기고 자신의 세계 일부로만 간주한다. 부버는 '나-그것'의 관계에서는 진정한 대화가 불가능함을 지적하며, 이는 현대 사회에서 고립과 비인간화, 인간 소외와 같은 문제를 견인한다고 언급한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관계가 항상 등가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음성 어시스턴트와 대화하며 그들이 우리의 명령을 이해하고 대답할 때,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을 단순한 '그것'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과 상호작용하고 대화를 나누며 때로는 그들에게 무언가를 묻거나 부탁한다. 그 결과, 우리 눈에 이들은 '너'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나-너' 관계에서의 '나'는 '너'로부터 코멘트를 듣고 응답을 받는 수동적인 존재로서 머물게 되는데 이로써 결국에는 '너'에게 완전히 닿지 못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기술과 상호작용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이러한 상황은 ‘나-너’ 관계와 '나-그것' 관계 사이의 경계가 점차 모호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칼 안드레Carl Andre(1935~)의 조각과 시


칼 안드레는 미국의 미니멀리즘 조각가이자 시인이다. 그는 조각의 정의가 '3차원의 입방체'였던 것을 확장하여 작품을 바닥에 평평하게 눕혀 조각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 육면체의 타일을 그리드 형식으로 배치한 그의 작품은 신체를 수직적으로 앉았다 일어서며 관람하게 하는 변화를 일으켰다. 실제로 안드레는 다작의 시인이기도 하다. 많은 비평가는 그의 조각적 구성과 시의 형식이 일치한 것에 주목했다. 그의 시 역시 패턴화된 텍스트로 구성되어 언뜻 보기에 조각과 유사한 모습을 띤다. 전시장 바닥에 벽돌이나 금속 조각을 배열한 것처럼 종이라는 2차원 공간에 언어를 조각화하여 나열하였다. 그에게 글자는 종이 공간 내에서 움직일 수 있는 실체를 의미한다. 그는 단어와 단어 사이 공백을 거부하고, 페이지를 회화적으로 인식하며 자화상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안드레는 시를 습작하며 큰 기쁨과 만족감을 느꼈고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는 전시 목적으로 나무와 유리 케이스를 디자인하여 그 안에 직접 쓴 시를 배치하였다. 그에게 시는 책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예술품으로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그의 시가 오늘날 거의 남아있지 않고, 잘 알려지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언어와 시가 작품 세계의 근간이 되었고, 아방가르드 시의 발전에서 줄곧 인용되었다는 점으로 보아 칼 안드레의 시적 실험은 예술적 감수성을 충분히 고취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 참고 자료: Rob Weiner, 「On Carl Andre's Poems」, Chinati, On Carl Andre's Poems – The Chinati Foundation.

*c-lab 7.0에 참여하며 처음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언어' 주변을 맴돌았다. 신체에 관한, 신체를 통한 경험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기 위해 언어화 단계를 거쳐야 했는데, 그 단계에서 어떤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부정확하고 불분명한 형태로 표현되고 마는 언어에 관해 생각하다 차학경Theresa Hak kyung Cha의 책 『딕테』 읽기에 관한 권오경R.O.Kwon의 칼럼이 생각났다. 구체적으로는 『딕테』의 이 구절을 떠올렸다. 


"깨어진다는 것. 완벽하지 못하게 구술한다는 것. 완벽하지 못하게 말한다는 것. 완벽하지 못하게 이야기하라. 완벽하지 않게 말하라. 완벽하지 못한 말. 피진어. 깨어진 언약 말하기 전. 말해지는 대로. 구술된 대로, 말해지려던, 말하기 위해, 그 후에 말하라".

권오경은 『딕테』를 처음 읽었을 때, 부서진 언어를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던 경험을 꺼내놓았다. 반복해서 『딕테』를 읽으며 그 혼란에 매혹되어 갔고, 부서진 언어가 말하기의 어려움에서 비롯되었음을 이해하면서 『딕테』가 복잡한 언어로 독자와 거리를 두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독자가 '해석하기 위해 더 서성대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차학경의 영상 작업 중 하나인 <Mouth to Mouth>(1975)는 작품의 제목인 mouth to mouth, 곧이어 몇 개의 한글 모음이 화면을 흐르며 시작되고 이내 사람의 입이 나오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잡음 속에서 사람의 입이 움직이고 곧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입이 나타난다. 새소리가 난다. 물소리가 난다. 입이 나타나고 사라지길 반복한다. 말이 잠시 있었다 사라지는 모습. 입술을 벌렸다 다무는 동시에 사라지는 말을 생각했다.

"르브리스는 아기란다. 그래, 뒤집기도 못 하는 갓난아이지.

이곳에 있는 연구원 모두의 자식이란다. 지금 너희 엄마가 이것저것 가르쳐 주는 중이야." 


이 인용구는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2022-2023) 프롤로그에서 연구 책임자인 카르도 교수가 건담을 묘사하는 대사이다. 시리즈의 주역 건담인 르브리스는 인공지능이 내재되어 기체와 파일럿의 신체를 연결하는 '건드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가동시킬 수 있다는 설정인데, 여기서 건드 시스템은 파일럿과 건담뿐 아니라 <수성의 마녀> 세계관 전반에서 인간 신체와 기계 매체를 결합시키는 최첨단 특수 기술로 등장한다. 이 건드 시스템은 신체 결함을 기계 장치로 보완하도록 하지만, 신경계를 건드려 특히나 모빌슈트처럼 대규모 데이터를 지닌 기체와 인간 신체가 연결될 때 병리적 문제가 야기된다는 한계가 있다. 


이렇게 <수성의 마녀>가 시청자들에게 상기시키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c-lab 7.0의 주제인 '매체-신체'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강독과 퍼포먼스, 강연의 형식을 통해 *c-lab에서 우리는 몸이 쓰는 도구, 인공지능의 관찰과 학습 체계, 게임 장비와 접촉했을 때, 사고가 전환되거나 질문이 발생하는 지점을 탐구한다. 건담 기체가 파일럿과 연구원 모두의 자식이라면, *c-lab 연구소가 도출해 낼 유무형의 이야기들 역시 참여자 모두 함께 일구어 가는 것들이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 👀 

스티븐 샤비로, 『탈인지』, 안호성 옮김, 갈무리, 2022, 알라딘 홈페이지 (링크)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G.H.에 따른 수난』, 배수아 옮김, 봄날의 책, 2020, 알라딘 홈페이지 (링크)

마르틴 부버, 『나와 너』, 표재명 옮김, 문예출판사, 2001, 알라딘 홈페이지 (링크)

Carl Andre: Poems, 1958-1974, Museum of Modern Art (링크)

차학경, <Mouth to Mouth>(1975) 스틸컷, ©Theresa Hak Kyung Cha/Electronic Arts Intermix (링크)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2022-2023) 프롤로그 스틸컷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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