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총레터에서 이야기하는 전시에 어떤 명확한 기준 같은 게 있지는 않지만, 직감적으로 이 전시는 다루지 말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취미가에서 열린 전시를 다룬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총총레터 4호), 소민경 작가의 작업도 언급한 적이 있고(총총레터 6호), 유지원 기획자의 전시를 다룬 적도 있고(총총레터 2호), 무엇보다도 YPC 멤버가 기획한 전시를 너무 칭찬해버리면 제가 팔불출 같을 것 같아서 그냥 혼자 재미있게 보고 말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포.도.주.》는 그러고 넘어가기에는 아까운, 정말 재미있는 전시였습니다. 

소민경은 대중적으로 유통되는 이미지를 선별하고 편집하여 회화로 그립니다. 그 회화를 사진으로 찍어 프린트하는 방식으로 복제한 뒤, 그 복제한 이미지로 다시 회화를 덮으면서 일종의 포장지처럼 사용합니다. 이에 따라 회화의 화폭은 뒤로 숨어버리고 그 껍데기라고 할 수 있는 것만 전면에 남아버립니다. 기획자는 그것을 '주석'에 유비하여 동시대 회화와 시각문화에 대한 코멘터리로서 덧붙는 것이지만 어쩌면 핵심을 담고 있는 것으로 풀어냅니다. 

작가가 그려낸 이미지 또한 그 자체로 대상을 숨기거나 가리고 있습니다. 전체가 아니라 부분이 크롭된 것 같은 이미지,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용기, 부분만 드러난 신체 같은 것들은 중심을 숨기고 주변부를 내세우는 작가의 태도를 한층 강화합니다. 그중에서도 전시의 중심에 놓이는 '눈을 가리는' 이미지는 매우 상징적입니다. 서구 사상사에서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가장 먼저, 가장 오래 눈을 봅니다. 눈만 모자이크하면 신분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드러나듯이, 눈은 곧 한 사람을 대표하는 부분입니다. 그러한 눈이 가려진 이미지가 포장지가 되어 회화를 가림으로써,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탁월함이 돋보입니다. 작품과 기획이 절묘하게 서로를 받쳐줘서 더욱 좋은 전시였습니다.

어릴 적 미술시간에 동양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조선 초기까지는 실제 우리 강산을 그리는 대신 중국 화풍을 따라서 중국 산을 그리거나 관념적인 산을 그리는 게 일반적이었다는 것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당시에는, 실제 산을 보지도 않고 책에서 보고 배운 대로 그렸다는 그림들이 (아마도 그때 조선 고유의 진경산수화의 훌륭함을 너무 강조한 교육과정의 영향인 것 같은데) 시시하고 보잘 것 없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실제 존재하는 이미지로 만들어낸다는 것에는 그림에 대한 화가의 신뢰와 애정이 담긴,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다르지만 유사하게, 최가영은 세르비아 출신의 동료 M에게 세르비아의 풍경을 듣고, 사진으로 보고, 한번도 가보지 않은 채 그 풍경을 그립니다. 작가는 "사진 속 산에서 거닐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이 상상하"면서 작업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공간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손으로는 그것을 하나하나 구현해나가는 회화적 태도에서 일종의 '회화적 마음'이라 부를 만한 것이 느껴지는 전시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그려내는 것, 결국 그것을 존재하게 만들고자 하는 화가의 마음이 붓자국 하나하나에서 드러나는 것 같았습니다. 회화 속 하얀 부분은 깎여나간 대리석이기도 하고, 상상으로 채워지지 않는 인식의 빈 공간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러한 불완전함을 안고서 하나의 풍경을 그려내는 것, 그리고 마치 크기가 다른 캔버스 조각을 이어붙이듯이 상상의 조각을 맞추며 풍경을 완성해내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전시였습니다.

글: 천선란(소설), 권정현(비평) 

디자인: 하형원 

발행: YPC PRESS 

발행일: 2020. 5. 15. 

형태: 128쪽, 100*176 

ISBN: 979-11-970327-0-7(02600) 

목차  

검지도 어둡지도 않은 ··· 조주현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 ··· 천선란 

A*񧫣E

이것은 SF가 아니다 ··· 권정현  

책 소개 

『검고 어두운』은 조주현 개인전 《검지도 어둡지도 않은》(위켄드, 2020.5.15.-6.7.) 연계 출판물로 발행되었다. 조주현은 ‘흑공'이라는 가상공간에서 작업을 출발한다. ‘흑공’은 일종의 싱크홀처럼 어느 날 갑자기 땅에 생긴 구멍이지만, 싱크홀과 달리 주변의 땅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곳에 들어가서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 그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러한 SF적 설정은 그대로 소설가 천선란에게 전해진다. 바톤을 이어받은 소설가는 ‘흑공’이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SF소설을 창작한다. 소설의 주인공 은지는 아르바이트와 학교 생활을 병행하며 늘 돈에 허덕이는 대학생이다. 그러던 어느 날, 철원 비무장지대에서 운동장만 한 크기의 ‘구멍’이 발생하고, 아무 상관 없던 은지의 삶도 바뀌게 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