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막아? 한아임은 지금 흡족하다. 네가 보낸 편지에 담겨 있는 그것이 바로 오막 너에게서 기대한 정서였다.
 
003_닻을 내려서 흩어지지 말아보자.
한아임 to 오막
2022년 8월
 
오막아?

한아임은 지금 흡족하다. 네가 보낸 편지에 담겨 있는 그것이 바로 오막 너에게서 기대한 정서였다.

내가 느끼기에는 노스탤지아이다. 과거를 그리워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가 능동적으로 슬픈 것은 아니며, 기억하고자 하는 과거 역시 후회나 아픔의 순간이라기보다는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행복했던 때, 그것도 최고로 격하게 벅찼던 때라기보다는 비눗방울이 한 겹 드리워져서 뽀얗게, 흐리게 보호된 순간인 것 같다. 그런 분위기가 네 음악에도 있고, 사진에도 있다.

전에 말했던 것처럼, ‘방학’ 같다.

방학이란 건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거다.
방학이 있는 시절에도 방학은 한번 시작했으면 반드시 끝난다. 
그것은 짧으면서도 길고 길면서도 짧아서 다른 시간들과는 다른, 자기만의 속도로 흐르는 것 같았다.
얼마 전 우리의 동창인 H가 내게 지옥문을 열어줬다. 무려 싸이월드 사진첩 말이다.
(나는 계정을 지운 모양이었다. 한국 휴대폰 번호 없이는 내가 직접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H가 자신의 일촌 목록에서 나의 부재를 확인해 주었다. 일촌 목록에 있긴 한데 계정을 복구하지 않은 사람들의 미니미들이 마치 망인들처럼 잿빛이 되어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계정을 지운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H는 내게 사진을 두 장 보내줬다.
하나는 캔에서 자라는 식물의 사진이었는데, 좌측 윗부분에는 무려 HADURI가 적혀 있었다. 그 단어는 왠지 지금쯤이면 모두가 잊었을 것 같았는데, 아직도 그것이 나한테 뜻이란 게 있는 단어라니, 충격이었다.
또 하나는 무려 내 사진이었다. 우리의 보안을 위해 정확히 몇 년도 사진인지는 밝히지 않겠으나, 하여간에 세기 초 감성이란 게 이런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도 들었다. 노스탤지아가 유행인가.

약간은 그런 것 같다. 나는 과거보다는 미래를 보는 스타일인데, 요즘 노스탤지아라는 개념이 계속 마음속에 밟히는 것은 비단 내가 나이가 들어가는 증거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라고 내가 믿고 싶은 건가…!)
온 세상이 노스탤지아에 심취해 있는 것 같다. 사람의 수명은 늘어가기만 하는데, 어린 시절은 더 길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더 조숙해지고, 성장이 더 빨라졌으면 빨라졌지, ‘유년’은 늘어난 수명에 알맞은 비율로 길어지지 않는다. 방정환 님이 ‘인생의 3분의 1은 어린이다’라고 했다는 소문이 있고, 그래서 ‘그렇다면 30살까지는 어린이겠군 하하하’ 하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하긴 하지만, 30살이 된 사람은 그 2배의 나이인 60살에 더 가깝게 느낄까, 그 2분의 1인 15세에 더 가깝게 느낄까?
나는 아무래도 전자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역시 그저 내가 나이가 든 것일 수도 있겠다.

15세 때에는 ‘가는 데 순서가 없다’는 말을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지금은 그게 진짜임을 안다. 60세나 30세나. 누가 먼저 갈지 아무도 모른다. 사후 세계가 있다면, 먼저 죽은 30세가 나중에 죽은 60세더러 ‘왜 선배님이라고 안 부르냐’고 따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단명’이라는 개념이 있으니, ‘기대 수명’이란 것도 있는 것이다. 이 ‘기대 수명’이란 점점 길어지기에, 지나간 시절을 돌아볼 시간이 많은 사람도 점점 많아진다.

그래서 노스탤지아가 유행하는 것 같다.
또한, COVID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이제는 인플레이션이 심해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기술이 너무 발전해서 더는 숨을 곳이 없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아무도 아이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황. 연락이 닿지 않고, 그래서 좋은 부모라면 걱정도 하는 상황. 이러나저러나 아이는 세상 모른 채, 어딘가 자연과 문명이 적당히 어우러진 곳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흘려보내는 상황.
그것은 이제 일부러 추구하지 않으면야 구성할 수 없다.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1970-2020) Every Year of High School Medley”라는 영상을 봤다.  
“(1970-2020) Every Year of High School Medley”
50년이라는 엄청나게 긴 세월간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유행하던 대표적 대중 음악곡들을 메들리 형태로 편집한 영상이다. 나는 이 시절 중 일부만 미국에서 보냈기에 (그리고 사람이 고등학교를 50년 다닐 순 없으니까!) 이 정서를 다 이해하진 못한다. 하지만 댓글창에 모인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에게는 전부 공통점이 있었고, 그 정서는 이해했다.

노스탤지아. 살아본 적 있는 시대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고, 살아본 적도 없는 시대에 닿고 싶은 꿈이기도 하다. 20대, 10대인 사람들조차 기대감의 노스탤지아에 젖어 있었다. 앞으로 진정한 (=그리워하는 그것이 아주 객관적으로 과거에 놓인 ‘진짜’) 노스탤지아에 젖을 사람이 될 기대감을 갖고는.
이해가 가? 실재하는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아를 느끼는 게 아니라, 앞으로 존재할, 노스탤지아를 느끼는 나를 이미, 미리, 그리워하는 어린 사람들.

그러니 노스탤지아는 블루 오션이다. 말했듯이, 노스탤지아를 느낄 수밖에 없는 인구는 점점 더 많아질 텐데, 오막 너의 음악과 사진에서 자연스레 발현되는 정서가 노스탤지아라니, 오막은 크게 될 상인가…?
그린데이의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는 나도 많이 듣던 노래다. 이 노래, 그리고 오아시스의 노래에는 당시에도 노스탤지아가 있었던 것 같다. 아마 그때도 그 시절이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랬을 거다.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은 것과 상관없이, 찰나의 순간은 붙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자체로 아쉬운 측면이 있으니까.

위 노래 제목의 반쪽을 공유하는 Avicii의 Wake Me Up도 나는 무척 좋아한다. (유튜브의 아비치 공식 채널에 올라온 아래 영상 조회수가 2.1 billion이라니, 미친 것 같다.) 컨트리 음악과 전자음이 섞인 음악이 가사랑 너무 잘 어울리고, 아비치가 죽었다는 사실까지 합쳐서 아련하다. 신나면서 아련한 경우는 찾기 어려운데 말이지. 
그러고 보면 나는 여름에 대해 아련함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내 스포티파이 계정의 겨울 테마 플레이리스트는 그냥 크리스마스 플레이리스트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겨울이라는 계절에 대한 게 아닌 것이다. 또한 가을 플레이리스트는 아예 없으며, 봄것은 있긴 하지만 잘 듣지 않는다. (‘봄것’이라는 단어가 아예 표준국어대사전에 있네…)
그런데 여름것은 존재하는 데다가 자주 듣는다. 제목이 Taste of Summer다.

Lana Del Rey가 노스탤지아이면서 후덥한 여름 느낌의 정석 같다. 그래서 그분 노래가 꽤 여럿 있다. 대표적으로 이것:
원곡은 Sublime 것이라 한다.
라나는 그냥 목소리가 더운 여름 ‘어느 날’ 같다. 꼭, 반드시, 특정한 날이 아니라 ‘어느 날’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플레이리스트에는 더위를 식히기 위해 호스로 물을 사방에 뿌려대듯이 DNCE가 가끔 등장해서 습도를 청량하게 낮춰준다.
여름은 길다. 햇볕이 뜨거워서 나는 대개는 실내에 있다. 여기는 고층빌딩도 없어서, 밖에 있으면 햇살의 강타에 살이 그냥 타들어 간다. 그런데도 창을 닫고 에어컨을 트는 일은 거의 없다. 창은 바깥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게 아마 노스탤지아를 깨우는 것 같다. 겨울에는 온갖 문과 창문을 꽁꽁 닫고, 커튼까지 치고, 구석에 앉아 책을 읽으면 그만인데, 여름에는 뭔가… 저 밖에 뭔가 있을 것 같잖아? 밖에서 뭘 특별히 할 것도 아니면서.
한 시공간에 있으면서 다른 시공간을 생각하는 건 내 습관이다. 소설을 쓸 때는 당연히 그러고, 현실에서는 대개 미래를 그린다. 하지만 현재에서 미래까지 선을 이을 수 있다는 건 현재에서 과거까지 선을 이을 수 있다는 것도 된다.
그리고 소설이든 현실이든,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는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면, 일단 선택하고 나면,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처음에는 신나서 내 마음대로 모든 인물과 배경을 설정하다가, 이야기의 10% 지점만 넘어가도 더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때부터 이야기는 내 것이 아니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계속해서 의식적으로 생각하진 않아도 가지 않은 길들에 대한 자각이 남아 있다. 미련은 아니다. 후회해서가 아니라, 그 길들이 있었던 걸 아는데, 모르는 것으로 할 수가 없어서 자각할 뿐이다.

얼마 전에 아임 드리밍 팟캐스트에서도 했던 말인데, 스티븐 킹의 책 ‘미저리’ 중에 아프리카에서 잡혀 온 새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아프리카의 새가 잡혀서 미국의 동물원에 있는 거다. 그 새에 대해서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 새를 불쌍해하지 말아라.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새는 자신이 살던 아프리카의 시청촉후미를 잊게 된다.’
여기서 시청촉후미란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을 말한다. 내가 나를 스스로 세뇌시키려고 줄여 부르는 말이다. 시청촉후미! 시청촉후미! 소설에 시청촉후미를 넣으라고 시청촉후미!!!

아무튼. 시청촉후미를 잊은 아프리카의 새에 대한 문장 다음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After awhile it didn’t want to go back anymore, and if someone took it back and set it free it would only crouch in one place, afraid and hurting and homesick in two unknown and terribly ineluctable directions, until something came along and killed it.”

나는 이 부분을 너무나 좋아한다. 이게 딱 내 정서이고, 그래서 나는 노스탤지아에 빠지면 위험하다. 번역은 대강 이렇다.
‘시간이 얼마 지나자 새는 더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가 새를 억지로 데리고 돌아가 풀어준다면, 새는 그저 한 장소에 쭈그려 있었을 것이다. 겁에 질리고, 아픔에 빠지고, 두 개의 알 수 없고 끔찍하게 피할 수 없는 방향으로 향수병을 앓으며. 뭔가가 와서는 새를 죽일 때까지.’

내가 어디에 살아도 그것은 그냥 서류상의 집이고, 나는 몸뚱아리에 들어 있기에 물리적 장소가 필요할 뿐이다. 나는 확정된 ‘나의 지리적 위치’가 없다. 거기 있던 나도 나고 여기 있는 나도 나다. 여기서 또 다른 어디로 가도 상관이 없고, 아마 갈 거다. 모든 건 그냥 기억의 파편이고, 그것들은 다 조각나서 흩어져 있다.

예전에 듣던 음악을 들으면 그 시공간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어서 좋은 점은, 그 음악이 믿을 만한 동지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찌하려면 너무나 많은 자원이 들어가는 물리적 공간보다야 믿을 수 있는 존재다. (나는 물성에 대한 의심이 많다. 물성은 나를 저버릴 확률이 높고, 음악이나 글은 그렇지 않다.)
음악이든 뭐든, 닻이 없는 나는 그냥 흩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걸 아는 나는 무아지경의 상태를 가장 좋아한다. 마약이 아닌 글과 음악을 찾아서 천만다행이다. 글은 모르겠고, 음악은 국ㄱr에서 허락ㅎr는 유일한 ㅁr약…☆

싸이월드가 부활하더니 내가 미친 것 같다. 
아무튼, 학교 앞 떡볶이 집은 이제 없다. 아주 오래전 내가 돌아가 봤을 때 이미 없었다. 다른 떡볶이 집이 있었는데, 드럽게 맛없더라…
그러니 내가 그 동네에서 평생 살았다 한들, 최초로 그린데이를 듣던 시절의 그 시공간은 어차피 없어졌을 거다.
그러니 나는 계속 글을 써서 박제하고, 또 박제한다. 예전 걸 다시 읽진 않는데 말이지. 예전 걸 읽느라 순간을 보내면, 그 순간은 박제하지 못하니까. 쓰고 떨구고 쓰고 떨구고, 그냥 앞으로 계속 간다.
떠오르는 그대로 편지를 쓰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전하는 정서가 저절로 노스탤지아가 된다면, 좋다. 너와 내가 편지를 주고받는데 어떻게 현재나 미래 얘기만 하는 게 가능하냐. 그린데이를 처음 듣던 그 시절로부터 지금까지 흐른 시간만큼 또 시간이 흐르면, 그때 우리는 반백 년을 산 인간들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 말을 H에게도 했다. 그랬더니 H는 내게 폭력적인 이모티콘을 보냈다.)
말했듯이, ‘기대 수명’이란 게 있으니, 아마 우리에겐 앞으로 시간이 좀 더 있다. 그러나 산 날도 그리 적진 않다. 그러니 앞에 있는 것만큼 뒤에 있는 것도 있을 수밖에.

100년 전, 1922년에는 미국 경기가 좋았다. 그러다 1920년대 말에는 대공황이 왔다. 지금, 2022년에는 그 어느 나라에도 경기가 좋다고 할 순 없겠다. 2020년대 말에는 뭐가 달라져 있을까.

아무튼, 너 왠지 이거 좋아할 듯:
아련한 데에는 왠지 기타가 적합...

마지막으로, 또 다른 추억 돋는 음악, <해리 포터>의 대표 사운드트랙을 덧붙인다.
하. 호그와츠에 갈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지. 호그와츠 열차 타고 싶다. 호수에 가고 싶다.
넌 어느 기숙사야?
네가 말해주면 나도 말해주지. 혹시 설마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른다면, 너는 머글이다.
- 그럼 안녕.
아임-
이번 편지를 보낸 한아임은...
아무 데에도 아무 때에도 있었던 적 없는 세상, 그리고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하는 세상 사이의 해석자다. 원래도 괴란하고 괴이하고 괴상하며 해석함 직하다고 여기는 것도 여러모로 괴하다. 이런 성향은 번역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오리지널 스토리텔링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이러나저러나 결과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뭐 하고 사나, 뭘 쓰고 뭘 번역했나 궁금하면 여기로. https://hanaim.imaginariumk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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