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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뭐 읽지]  2021-09-09 #71
책, 책방, 사람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이우일 그림


이번에도 말 조심하셨습니까. 누구나 명절에는 말의 범람으로 고생합니다. 대학은 어디니, 취직은 했니, 연봉은 얼마니, 애인은 있니, 결혼은 언제 할래, 아이는 가져야지, 부모에게 효도해라…. 끝없이 이어지는 명절 잔소리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부러 귀를 닫고, 입을 닫고, 눈을 닫았던 사람이 저만은 아닐 겁니다. 한 사람이 하고 한 사람이 듣는 말이면서도, 누구나 하는 말 같고 누구나 듣는 말 같은 이 ‘가부장의 언어’는 도대체 언제 누구로부터 시작된 걸까요. 언제 누구에게까지 이어지게 될까요.

고향에 내려가 부모·형제, 친지들과 북적북적 어울리며 명절을 쇠고 ‘혼자 살던 곳’으로 돌아오면 ‘내 집이 최고’라는 말이 자연히 흘러나옵니다. 며칠, 말의 요란함을 견딘 후에 얻게 되는 그 혼잣말은 귀한 거지요. 욕이나 흉이나 칭찬을 들어도 그저 그렇구나 하고 넘기는, 귀가 순해지는 나이도 있다곤 하나 명절이 지나고 나면 누구나 서둘러 귀가 순해지고 싶고, 말이 없는 한가운데에서 나를 다독이게 됩니다. 듣기 싫었던 말, 하지 못했던 말, 듣고 싶던 말, 하고 싶던 말을 찬찬히 되돌아보게 되지요. 

그때 책상이나 소반 위에 맥주 한 깡통과 크래커 한 봉지를 올려두고 읽거나 보는 행위는 그야말로 ‘어른의 말씀’에 주눅 들지 않고 나 자신과 대면하게 하지요. 무례한 이에게 웃으면서 대꾸하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기엔 이미 늦었고,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배워야 할 말과 이미 배웠으나 버려야 할 말들에 관해 골몰해보는 건 명절 뒤풀이에서 보장되는 확실한 재미입니다. ‘명절증후군’이란 대체로 말은 많고 생각은 적었던 날들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그 순간 발견하는 “사람은 말을 할 때 타인의 목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얼굴을 본다. 얼굴은 듣는 행위의 일부다” 같은 문장들은 말없이 생각의 기둥을 솟구치게 하지요.

막스 피카르트는 〈인간과 말〉에서 ‘침묵이란 뜻밖의 사건의 가능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집단의 상태에서 벗어나 ‘혼자’라는 상태가 되고 보면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보이던 게 보이지 않지요. 스스로 힘써 혼자라는 ‘내부 공간’을 만들어보면 명절은 뜻밖에도 ‘인간과 말’을 탐구할 수 있는 좋은 학습의 현장이 됩니다. ‘홀로 걸어가는 고독한 인간의 침묵 속에서 말은 불현듯 집을 얻는다’라는 피카르트의 말처럼 우리는 혼자가 되어서 비로소 진리의 창문을 열게 되지요. 사람은 말할 때 목소리만이 아니라 얼굴도 본다는 것, 얼굴을 살펴 들으면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고심해야 한다는 것은 알 듯 말 듯한 깨달음입니다. 명절에 우리는 타인의 얼굴을 살펴 듣는 것에 참 야박하지 않나 싶습니다. 남의 얼굴을 살펴 듣는 행위를 포함하는 말하기만을 우리는 ‘대화’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요.

명절증후군을 극복하는 데에 책보다 더 효과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가성비를 따지면요. 그러나 ‘사색의 언어’로 가득 차 있는 책은, 책과의 대화는 우리의 얼굴을 산뜻하게 명절의 뒤끝에서 다른 차원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말로 가득 찬 세계가 아니라, 말로써 텅 빈 세계로요. 명절에는 누구나 가득한 듯 공허한 말들 속에서 헤맵니다. 이제, 공허한 듯 가득한 말들의 세계를 느릿느릿 거닐어보면 어떨까요. 설령, 그다음 페이지가 잠으로 연결된다고 해도요. ● 김현(시인) 
<시사in> 576호에 수록된 원고입니다 (2018년 9월). 

시사IN 기자들이 주목한 책
조선의 위기 대응 노트
김준태 지음, 민음사 펴냄
“중차대한 선택의 국면에서 조선 사회 구성원들은 어떻게 상황을 인식하고 대응했는가?”

역사의 ‘효용’은 무엇인가? 저자는 한나라 학자 동중서의 말을 인용해 “지나간 것을 살펴 다가오는 것을 밝히는” 데 있다고 적었다. 책은 조선 사회 구성원들이 위기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핀다. 20개 사례를 모아 일종의 ‘기출문제집’을 만드는 게 저자의 목적이다. 실제로 책에 실린 수백 년 전 일화 가운데에는 오늘날에도 적용할 만한 게 적지 않다. 병자호란 전후 국제 정세를 21세기 미·중 갈등에 빗대는 이들이 있다. 과거 시험에서 임금에게 간하는 선비를 두고 저자는 ‘취업 면접에서 총수를 비판하는 격’이라고 썼다. 교훈이 될 만한 사례와 반면교사 삼을 사례 모두 흥미롭다. 책 자세히 보기 >>>

인공지능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
스티븐 핑커 외 지음, 김보은 옮김, 
프시케의숲 펴냄
“기계의 위험은 기계 자체가 아니라 기계를 만든 인간에게서 나온다.”

인공지능의 미래는 무엇일까. 컴퓨터가 세계 정복을 위해 미친 듯 날뛰면서 인간을 노예화하는 세상일까. 혹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기적을 행할까. 스티븐 핑커는 말한다. 모두 터무니없는 오해라고.
한국 독자들에게도 알려져 있는 명망 높은 과학사상가 25인이 인공지능에 관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본 책이다. 첨단의 과학 테크놀로지이자 미래산업을 견인하는 막강한 엔진인 인공지능 기술의 가능성과 위험 및 한계를 짚어본다. 현재 각광받는 ‘딥러닝’ 인공지능뿐 아니라 앞으로 도래할 ‘초지능’ 인공지능에 대해서도 진지한 논의를 이어나간다. 책 자세히 보기 >>>

방관자 효과
캐서린 샌더슨 지음, 박준형 옮김, 
쌤앤파커스 펴냄
“가장 큰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격렬한 외침이 아닌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다.”

주위에 사람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현상을 ‘방관자 효과’라 부른다. 심리학에서는 위기 상황에서 도움을 얻으려면 누군가를 콕 집어 호명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침묵과 방관, 무관심이 모이는 곳에 폭력이 움튼다.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심리학 교수인 저자는 방관자의 입장에서 출발한다. “괴물을 찾아내 막는 것만으로 끔찍한 행동을 막을 수 없다. 선한 사람을 나쁜 선택으로 이끄는 원인을 찾아내야 그릇된 행동을 막거나, 적어도 줄일 수 있다.” 낡은 조직문화에 맞서 변화를 만드는 일은 거기서 시작된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이 목소리를 높일 수 있도록 용기를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책 자세히 보기 >>>

마이너 필링스
캐시 박 홍 지음, 노시내 옮김, 마티 펴냄
“나는 행운을 거저 받는 선물이 아니라 매주 악운을 당함으로써 할부상환해야 하는 융자처럼 취급한다.”

미국 사회에서 성장한 아시아인 여성이 경험하는 차별과 혐오는 일상적이고 은근하다. ‘모범 인종’으로서 끊임없이 자신의 경험을 의심하고 의심받는다. 저자는 자신이 경험한 ‘소수적 감정’을 촘촘하게 추적해나간다. 무엇보다 그는 누군가를 대표해서 말하거나 쓰지 않는다. 그 자신의 이야기조차 ‘오직 근처에서’ 발언한다. 현재 자신이 누리는 안락함은 누구의 희생에서 오는지를 질문함으로써 또 다른 소수자와 손을 맞잡는다. 한국 사회는 저자가 ‘폭로하는’ 미국 사회와 얼마나 다를까. 머지않아 한국 사회에서 성장한 이주민의 목소리도 읽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그 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보지 않고도 벌써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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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11년 전 결혼했습니다. 당시 제가 가장 잘한 일은 '이참에 제사를 없애자'고 엄마를 설득한 일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잘 먹고 행복하기를 죽은 사람도 바라지 않겠냐는 말에 엄마도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그때부터 저희는 명절음식 대신 먹고 싶은 음식을 해먹습니다. 이를테면 김밥 같은걸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라 평소에는 해먹기 어렵잖아요. 올해는 재난지원금으로 대게를 잔뜩 사서 삶아 먹었습니다. 

저는 7년 전 결혼했습니다. 외동아들인 동거인은 결혼 준비 중 하나로 집안의 각종 제사를 정리했습니다. 저희는 결혼 전 양가에 저희를 철저히 '손님'으로 대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사위도, 며느리도 가족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이니 예의를 지키겠다"까지만 약속할 수 있다고요. 제 친구의 표현에 따르면 '시댁 식구는 식용유에 붙어있는 키친타올 같은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는 거죠. 그건 친정 식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원가족이 내게 주어진 것이라면, 결혼은 '내가 선택한 가족과 사는 일'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거겠죠. 

저희 집만 이런 명절을 보내는 건 아닐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명절의 의미를 다시 써나가는 중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만나게 될 겁니다. 가족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는 삶은 물론 죽음과도 긴밀히 연결돼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출생률 저하, 노령 인구 증가, 1인 가구 증가로 가족이 관계 맺는 형식과 맥락이 달라질 겁니다. 가족이 아니라 나와 전혀 모르는 타인이 나를 돌보게 될 가능성이 높겠죠. 그런 상황을 어떻게 제도적으로 잘 뒷받침하느냐가 '존엄한 죽음'의 중요한 요소가 될 겁니다."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 213쪽) 

시사in북이 준비한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 텀블벅 펀딩 후원 마감이 나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원고 뭉치를 처음 책꼴로 앉히며 뭉클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명절 연휴에 최종교를 보았습니다. 독자들이 어떻게 읽어주실까 떨리고, 긴장되고, 기대됩니다. '랜선 북토크' 등 펀딩 기간에만 만나보실 수 있는 선물도 놓치지 마시길요. 

출판 관련 많은 행사들이 '무료'로 진행됩니다. 한 명이라도 더 책과 가깝게 지내도록 돕기 위해 각종 정책이 지원되기 때문입니다. 지켜보는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책을 만들고, 서점을 운영하고, 강의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건 아닐까?' 

읽는 당신x북클럽 참가비(12만원, 청소년 9만원)가 특히나 요즘 같은 때 부담 되는 액수임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참가비 안에 책 3권, 3개월 간 독서모임 참가비, 북토크 4번이 포함돼 있다고 하면 어떤가요? 책을 만들고 파는 사람들이 '제값' 받는 생태계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여러분 역시 힘껏 함께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책을 함께 읽고, 책이 남긴 질문을 곱씹고, 여럿이 책 이야기를 나누는 근사한 경험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참여 책방 34곳 중에 내가 사는 곳과 가까운 책방이 없어도 북클럽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비대면 시기가 길어지면서 상당수가 온라인 모임을 병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계인구'라는 말이 있죠. 이번 기회에 평소 관심 가지고 있었던 지역, 관계 맺고 싶은 지역의 책방 문을 두드려보면 어떨까요. 읽는 당신x북클럽은 사흘 뒤인 9월26일, 신청 마감합니다. 

함께 읽을 책
① 몸의 다양성과 공존 : <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김원영 지음, 사계절 펴냄)
② 삶의 다양성과 공존 : <다른 세계에서도> (이현석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③ 생명의 다양성과 공존 : <짐을 끄는 짐승들> (수나우라 테일러 지음, 오월의봄 펴냄)
 
북토크 
강사진이 확정되었으며, 온라인으로 진행됩니다
① 오프닝 북토크(9월30일) : “기후위기 시대의 공생과 진화”, 강사 이정모(국립과천과학관장)
② 1차 북토크(10월21일) : 김원영(저자, 변호사)
③ 2차 북토크(11월18일) : 이현석(저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④ 3차 북토크(12월16일) : 홍은전(작가, <그냥, 사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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