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김도균 필자는 자산기반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투자자로서 혹은 채무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중요한 사회경제적 이슈들에 대해 매우 개인적이고 탈정치화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 자산 정치라고 할 만한 현상들이 한국 민주주의 어떤 위협으로 작용하게 될지 지속적인 관심이 요구된다” (179-180)
ㅈ) 권창규 교수는 탈성장과 대항발전(168)이라는 대안을 내놓았고 김종철 교수는 기본자산제를 대안으로 내놓았습니다.
ㄱ) "민주적으로 관리되는 커먼즈형 경제 원리를 바탕으로 자본주의를 구하는 방법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구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99)라는 구절을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ㅅ) “자본주의의 본질을 벗어나 지속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 라는 문장에서 자본주의 본질 부분에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본질은 지속가능성이라는 말일까요?
ㅂ) 특별히 자본주의의 본질이 지속가능성이라기보다는, 어떤 것이 본질을 벗어나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ㅈ) 자산기반자본주의가 (공공)복지의 도입에 반대하는 성향을 산출한다고 보는 관점에서의 정치적 민주주의를 지칭할 것입니다. 자산기반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투자 민주화(소수만이 아니라 다수가 투자자가 된다)의 입장에서 민주주의가 신장된다고 주장하곤 하니까요.
자산기반 자본주의론이 가진 결정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논자 사이에 상당히 공통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것이 자산기반 자본주의 이전의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이상한 믿음과 긍정입니다.
ㄱ) 78쪽 밑에서 세 번째 줄에 '자본주의 지속가능성이 약화'라는 문구가 한 번 더 나옵니다. 이 부분이 논쟁점이라고 쓰고 나서 필자의 입장을 99쪽에서 더 분명히 밝히는 것 같습니다.
ㅈ) 대안들에서까지 관철되는 표면의식은 아니지만 지속가능하려면 실물자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어떤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이와 말이 나온 김에,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 문제를 자본형태(실물자본인가 금융자본, 가공자본인가)에서 찾는 것은 자본중심 관점을 지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ㄱ) 『인지자본주의』(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1) 32~33쪽입니다.
"오늘날의 제3기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나 금융자본주의 혹은 소비자본주의로 정의하기보다 인지자본주의로 정의하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 그것은 인지노동의 착취를 주요한 특징으로 삼는 자본주의이다. 우리는 이 개념을 통해서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다시 사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의 문제설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지자본주의라는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자본 자신이 아니라 노동이 현대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을 가져오는 우선적 힘이라는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그 노동의 역사적 진화와 혁신의 과정을 중심적 문제로 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의 문제설정'을 바탕으로 한 이런 관점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ㅈ) 자본주의가 지속되는가 않는가는 자본 자체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광의의) '노동'의 투쟁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착취에 기반한 사회는 지속가능하고 수탈에 기반한 사회는 지속불가능하니 이 지속불가능성을 기회로 삼아 1)산업자본주의로 돌아가자 2)실물자본 기반 사회주의로 나아가자 3)실물기반 커먼즈로 나아가자...이런 대안들이 제출되고 있는데 이 모두에 투쟁(력)의 관점이 누락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자본주의는 늘 착취와 수탈의 두 방법론을 동시에 사용해 왔습니다. 수탈에서 착취로, 다시 착취에서 수탈로 강조점의 이동을 주목해 볼 수 있으나 착취의 시대로 인식되었던 시대가 사실은 광범위한 수탈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는 것이 로자 룩셈부르크에서 시작된 재인식이기도 합니다.
ㅅ) 그렇다면 착취와 수탈은 어떻게 다른가요?
ㅈ) 착취는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분절 위에서 잉여노동시간의 전유라면 수탈은 노동과 무관한/별도의 가치 이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ㅂ) 착취를 뒷받침하는 수탈은 자본의 인클로저를 생각하면 비교적 쉽게 이해될 것 같습니다.
노동의 문제를 보아야 한다는 관점은 첫 번째 글, 「자산화를 어떻게 인지할 것인가?」에는 어느 정도 제시되고 있는데요,
"왜 맑스주의는 직접적 인간노동이 가치의 실체이자 잉여가치의 원천이라는 낡은 견해를 고수하는 것일까? (...)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노동 담지자인 인간만이 노동을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62)
위 구절을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ㅅ) 노동 담지자를 인간만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또 다른 노동 담지자는 누가 있을까요? 궁금합니다.
ㅂ) 기계도 노동 담지자로 볼 수 있겠고, 글에는 언급하지 않지만 가축도 노동의 담지자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중 인간만이 노동을 거부할 수 있는 노동의 담지자라고 말하는 점이 저는 흥미로우면서도 아리송했어요.
ㅈ) (1) 맑스는 과학기술의 생산에의 응용이 더 이상 직접적 인간노동을 가치척도로 삼지 않고 가처분소득을 가치척도로 삼는 조건을 창출할 것이라고 『요강』에서 말했기 때문에 위인용에서의 "맑스주의"에서 맑스는 제외될 것 같습니다.
(2) 카펜치스는 노동의 부정성에서 대안 사회의 에너지를 찾는데(비슷한 경향의 홀러웨이 같은 경우는 최근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에서 부정성을 "안에서-대항하고-넘어서"in-against-beyond의 삼중성으로 확대해석해서 『제국』에서의 Within-Against-Beyond/네그리 하트와 접근해 갑니다) 부정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새로운 것(가치)을 창출할 수 있는 행위능력으로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ㅅ) 그렇다면 이때 행위능력은 앞서 말씀하신 광의의 노동 투쟁과도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ㅈ) 네.
ㅈ) 멜린다 쿠퍼는 <임상노동>에서 동물을 노동 담지자로 등장시킵니다.
ㅂ) 대안 사회의 에너지가 노동의 부정성에 있으므로 그 에너지의 원천에 계속 주목하게 하려고 '낡은 견해'를 고수한다는 말이었네요, '노동의 부정성'이 '가치의 실체'라는 것처럼 읽혀서 헷갈렸는데, 이제 잘 이해가 됩니다.
ㅈ) 실제에서 자본은 이 세상의 수많은 인간-비인간의 운동/활동을 자기 것으로 전유하는데 그것을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인정하는 순간부터 임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의 범위를 최소화하고자 했습니다. 인간 활동 중의 극히 일부만이 노동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은 무상으로 전유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ㄱ) 여성의 가사노동도 그렇습니다.
[한국일보] 집안일이 유급이라면... 여자는 83세까지, 남자는 46세까지 돈 번다↗
ㅈ) 이런 의미에서 협의의 노동은 존재론적 개념이라기보다 사회학적 혹은 제도론적 관계의 술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ㅂ) 학생의 공부노동, 누리꾼들의 댓글노동 등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ㄱ) 게임플레어들의 플레이노동도 있습니다.
자산기반자본주의도 투자자, 채무자, 저축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비가시노동으로 굴러갑니다.
ㅈ) 우리가 "노동"이라는 말을 쓸 때 1) 자본주의에서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고용된 활동 2) 우리 삶에서 사용가치를 창출하는 인간-비인간의 수많은 활동 사이에서 혼란에 빠지곤 합니다.
범주적으로 보면 1)은 2)보다 훨씬 좁고 2)가 1)을 포함합니다.
ㅂ) 저는 전반적으로 자산기반 자본주의론이 산업자본주의를 긍정한다는 인상은 크게 받지 못했는데요, “자기자론”이 이러한 비가시노동과 수탈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전 산업자본주의에서는 이러한 수탈이 없었던 듯한 (혹은 덜했던 듯한) 착시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ㅈ) 금융화, 증권화, 자산화를 실물자본과 대립시키면서 전자를 부패한 것, 가공된 것, 지속불가능한 것 등으로 묘사하게 되면 대안 구상에서 비물질적인 것, 상상적인 것 등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지게 됩니다. 실물기반을 중시하는 것이지요. 대안구상에서도 마찬가지 논리가 지속되겠지요.
ㅂ) 네, “자기자론”이 만들어 내는 대립들이 대안구상의 논의를 가로막는 논리가 될 수 있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ㅈ) 산업자본이 노동이 생산한 가치에 대한 착취를 중심에 놓는 것이라면 금융자본은 공통장이 생산한 가치에 대한 수탈을 중심에 놓습니다. 내가 보기에 착취되거나 수탈되는 것은 모두 실물적(real)입니다.
철학의 언어로 풀어보면 actual+virtual=real입니다. actual만을 real로 보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virtualization 기술을 사용하는 금융화, 증권화, 자산화의 기저에는 물질적 비물질적; 인간적 비인간적 공통장이 실물적으로really 창출하는 가치가 놓여 있습니다.
ㅂ) 네, “자기자론”이 만들어 내는 대립들이 대안구상의 논의를 가로막는 논리가 될 수 있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ㅈ) 산업자본이 노동이 생산한 가치에 대한 착취를 중심에 놓는 것이라면 금융자본은 공통장이 생산한 가치에 대한 수탈을 중심에 놓습니다. 내가 보기에 착취되거나 수탈되는 것은 모두 실물적(real)입니다.
철학의 언어로 풀어보면 actual+virtual=real입니다. actual만을 real로 보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virtualization 기술을 사용하는 금융화, 증권화, 자산화의 기저에는 물질적 비물질적; 인간적 비인간적 공통장이 실물적으로really 창출하는 가치가 놓여 있습니다.
ㅂ) 현실-액추얼-과 가상-버추얼-의 대립을 넘어선 실물-리얼-을 이야기하는 자본주의 시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토론을 바탕으로 “자기자론”을 다시 검토해 봐야겠습니다.
ㅈ) 이승철 필자의 논문에 등장하는 뮤직카우의 음악이나 푸빌라NFT의 공동체나 P2C의 문화 등은 모두 실물적 생산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