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한국의 갈라파고스

입력
기사원문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오재철 여행작가

갈라파고스에선 망원 렌즈가 필요 없다. 이곳의 동물은 인간을 봐도 도망가지 않는다. 아내와 함께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으로 유명한 갈라파고스로 여행을 떠났다. 남아메리카 동태평양 바다에 있는 섬이다.

신기한 동식물이 많다. 그중 부리가 큰 새를 찍기 위해 천천히 다가섰다. 새들은 작은 소리만 나도 멀리 날아가 버려 사진으로 담기 어렵다. 그런데 웬걸, 귀라도 먹었는지 코앞까지 걸어가도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카메라를 아예 새 눈앞까지 들이대자 "모델 한번 해주마"라는 듯 자세를 취한다.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 다리가 아파 벤치라도 찾을라치면, 뒤뚱거리는 바다사자들이 이미 큰 대(大)자로 벤치 위에 누워 코웃음을 친다. 아이들은 해변에서 거북과 달리기를 한다. 작은 새들은 화려한 옷을 입은 여행객에게 브랜드가 어디냐고 묻기라도 하려는지 졸졸 쫓아다닌다.

갈라파고스가 오래전부터 지금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희귀 동물이 많다는 소식에 무분별한 포획이 횡행했다. 하지만 1934년 동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사냥이 금지됐다. 그렇게 80년 넘는 시간이 지나자 동물들이 더는 인간을 위험한 존재로 여기지 않게 됐다. 인간과 동물이 어울려 사는 생경한 광경이 펼쳐지는 이유다.



며칠 전 딸 아이와 공원을 산책했다. 화단 한편에 참새들이 옹기종기 모여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 모습을 본 딸도 신이 나 동요를 부르며 새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참새들은 기겁하며 날아가 버렸다. 아이는 이내 울음을 터뜨린다. "새들이랑 함께 있을 순 없는 거야?"

문득 비무장지대(DMZ)가 떠올랐다. 이곳 동물 역시 갈라파고스처럼 오랫동안 사람에게 공격받지 않았다. 언젠가 통일이 돼 사람들의 출입이 허가되고, 지금 있는 그대로 보호한다면 한국의 갈라파고스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날이 오면 딸 아이와 손잡고 찾아가 새들과 함께 노래 부르고 싶다.

[오재철 여행작가]

[조선닷컴 바로가기]
[조선일보 구독신청하기]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오피니언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