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정해민
현재 팩토리2에는 가지런한 벽화 선반들이 캔버스 그림과 함께 벽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 선반에는 ‘마음’이라 불리는 때로는 동글동글한, 뾰족한, 무언가에 가려진, 형체를 알 수 없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마음들이 있지요. 미처 살피지 못한, 혹은 모른 척하고 내버려 둔 마음들이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저마다의 모습을 하고요.
전시 <움직이는 마음들>을 구성한 민정화 작가는 동명의 작품에 더하여, 방 안쪽에 <남아 있는 풍경> 아홉 점, <도자기로 만든 마음> 화병 시리즈, 그리고 이담 작가와 함께 쌓은 마음인 <오픈 엔딩 캔들홀더>를 팩토리2로 가득 메웠습니다.
오는 토요일 오후, 작가와 전시에서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전시장에서 나눌 예정입니다. (2022. 12. 3. 오후 3시 @factory2) 그리고 그에 앞서 작가와 나눈 길고 긴 이야기의 일부를 발췌하여 레터로도 미리 전하고요. 저마다 돌보지 못했던 마음들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 팩토리2의 문턱을 너머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서로를 향해 귀 기울이는 토요일 오후를 상상합니다. 그리고 이후 남아 있는 풍경은 무엇일지 기대하면서요.
완결된 열여섯 이야기의 시작,
<움직이는 마음들>

인터뷰. 이경희 
ⓕ 사석에서 말씀하시길, 이번 전시의 일부인 자체 제작 책이 원래 계획한 건 아니었다고요.
이번 작업은 제 마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시작점이었어요. 처음에는 그것을 그림으로만 풀어보려고 시도했고요. 그러다 보니 일기와 작가노트에 적어나간 글들이, 글 자체로 그리고 이야기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떠오르는 순간이 여럿 생기더라고요. 그림과 글이 한 곳에 같이 있어야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오롯이 표현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후에는 그림책과 그림을 병행하며 작업했습니다. 이전에는 글이 없는 그래픽 책을 꾸준히 만들어 왔지만, 이번처럼 글이 있는 그림책은 아주 오랜만에 만들게 되었어요.
ⓕ 꾸준히 책을 만들어오셨다고 했는데, 작가님의 삶에서 책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겐 이야기를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에요. 어릴 때부터 집에서 혼자 그림책, 동화책을 많이 봤어요. 집에 있는 책 다 보면 친구네 가서 보는 그런 아이였어요. 그런데 아홉 살, 열 살이 되면서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잖아요. 그렇게 마주한 세상이 내가 봐온 책과 대비해 너무도 시시한 거예요. 심지어 색도 다 칙칙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도 없고요. 그래서 책을 쓰고 싶다고 생각해왔어요. 이야기들은 이미 머릿속에 있고요. 그래서 이번 전시 준비에 착수할 때도 머릿속에 있던 온실 속 식물 이야기를 쓰려 했는데, 코로나가 닥치니 이야기는커녕 그림도 그리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다가 ‘보자, 내가 현재 계획한 이야기가 16개인데 이걸 3년에 하나씩 써도 60, 70살이 되는 거네!’ 하고 깨달은 거죠. 그래서 이래선 안 되겠다, 순서를 정해야겠다 싶었고 그 첫 이야기가 이번의 <움직이는 마음들>이에요. 일단 내 속의 마음 이야기를 내놓아야겠더라고요. 3년 뒤 내가 세상에 없을 수도, 유류세가 너무 올라서 한국에 못 올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막상 쓰려니 그 ‘마음들’을 쓰는 게 무척이나 힘들었죠.
ⓕ 왜죠?
하나하나마다 저의 트라우마를 끄집어내고 직면해서 그에 대해 썼다 버리기를 반복하고, 써서 남은 것 중 보석 같은 단어 몇 개만 딱 남기려니까 한편 할 때마다 너무 힘이 드는 거죠. 혼자 수없이 울고. 그래서 제가 이 작업 할 땐 미사포를 썼어요.
ⓕ 성당에서 기도할 때 쓰는 그 미사포 말인가요?
제가 종교는 없고 그것도 친구에게 선물받은 건데 그걸 쓰면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칸타타를 틀어놓고 그림 그리고 그래요. 제 감정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많이 됐어요. 여튼, 각각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게 무척 힘은 들었지만 긴 시간을 거치며 버리고 덜어내고... 그러면서 아주 짧아졌어요. 내 안의 이 이야기는 한번 넘어서야 할 것 같아 용기를 가지고 정리했어요. 그러지 않으면 평생 거짓말을 하고 넘어갈 것 같았어요. 제가 한 작업 중 가장 부끄러움이 없는 작업인 것 같아요.
ⓕ 자전적인 이야기가 직면하기 매우 힘들다고 하던데 마음을 다 쏟아부었고, 또 수차례 매만지며 용기 있게 넘기셨어요. 앞서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원래는 쓰고 싶은 픽션의 이야기가 많은데, 첫 책은 자전적인 것이네요. 각 ‘마음’에는 숫자가 매겨 있는데, 이건 ‘나의 어릴 때’, ‘어느 도시에서의 내모습’ 이런 게 아니라 특정한 사건들인가요?
가상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제 개인의 이야기이고, 특정 일에 대한 이야기가 맞아요.
사진. 정해민
ⓕ 그래서 그런지, 매우 압축한 글인 게 느껴져 읽으면서도 최대한 상상력을 끌어올려 읽다 보니 머리엔 온갖 그림이 그려지더라고요. 작가님은 최대한 정제했지만 독자로서는 그림과 함축된 글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어요.
원래는 이야기마다 각각이 구구절절했어요.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겠더라고요. 제가 평소 구원을 매우 바라요. 이 ‘구원’이란 말 대신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알겠더라고요. 구원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요. 그래서 ‘내가 나를 구원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방법은 제가 가장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그림이고요.
ⓕ 작가님이 생각하는 구원은 무엇인가요?
저는 언제나 종교 있는 사람이 참 부러웠어요. 저는 제가 등을 돌리면 그냥 바닥이거든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림 그리기이니, 내가 나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날 밤, 내 마음을 깊이 또 깊이 들어가 보니 아홉 살 여자애가 웅크리고 우는데, 내가 그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두고 온 거죠. 그래서 ‘어? 내가 쟤부터 일단 안아줘야겠다’ 싶었어요. 내가 모른 척했던 마음들이 돌아보면 아직도 화가 나 있고, 썩어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그 아이들부터 들어 올려 눈을 맞추고 반질반질하게 닦아 선반에 올려두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전시장 속 마음들 회화가) 선반 위에 올라가 있는 거예요. 구원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겐 생뚱맞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그걸 넘지 못하면 앞으로 남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사진. 정해민
ⓕ 어릴 때부터 책도 좋아하셨고, 짐작하기로는 ‘이야기의 힘을 경험한 적이 있으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영화, 소설책 모두 좋아해요. 심지어 평론집도 좋아할 정도예요. 그 이야기를 풀어주니까요. 내가 왜 이야기를 좋아할까 생각해보면... 물론 과정에서는 ‘왜 이런 슬픔을 나열하고 있는 거지?’ 하면서 다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누군가는 다른 이를 위안하고자 하는 희생의 태도로 어려움도 감내하기도 할 거예요. 실제 그런 글에서 제가 위안을 많이 받았고요. 돌아보면 평생 제가 그런 음악, 영화, 소설로 인해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나 싶어요. 외국 작가의 글을 번역해주는 이에게도 감사하고요.
질문으로 돌아와, 저의 작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면, 아니 그보다도 공감의 실마리가 된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일단 저는 이 작업을 하면서 저 스스로를 아주 조금 구원했다고 느낍니다. 이야기의 힘을 이렇게 경험하였네요.
ⓕ 그림 속 저 몽글한 것들이 마음인 거죠? 구상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책 작업과 동시에 진행된 것인가요?
마음을 그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요. 마음은 형체가 없으니까요. 실제로 뭘 그려도 마음 같지 않아서 초반에는 실패의 거듭이었어요. 뭘 그려도 돌 같고... 물론 진짜 돌 같은 마음도 있었지만요. 돌덩이 같지만 부들부들한 솜사탕 같은, 그런 걸 그리고 싶은데 제가 잘 못 그리더라고요. 지금 전시한 그림들은 그중에 마음에 든 것이고, 이외에도 아직 여럿 있어요.
처음에는 ‘마음의 목록’을 만들었죠. 제가 구글 스프레드시트의 팬이거든요. (웃음) 그중 어떤 것은 나이는 아홉 살인데, 얘는 원래 부들부들했지만 오래 방치되어 나뭇조각처럼 쭈그러들어요. 그런 내용이 12개의 목록으로 쫙 정리되어 있죠.
원래는 마음 하나에 그림 하나로 모든 걸 다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게 가능하겠어요? 그 그림을 보고 지나는 사람이 ‘이쁘네’ 하고 지나가기에는 그 안에 담긴 ‘내 마음’이 안타까운 거예요. 그래서 한 줄이라도 넣어 얘를 알려줘야지, 하다가 글로, 책으로 엮게 되었어요.
사진. 정해민
ⓕ 촛대를 함께 만들면서 책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하셨겠어요.
이담 작가는 제가 독일에 처음 와서 학교에 갓 입학한 때 만난 친구예요. 벌써 15년이 넘었죠. 이 친구는 의자도, 테이블도, 촛대도 만드는데 이번에 함께 작업하는 게 제게도 큰 의미였어요. ‘내가 말하는 마음과 네가 이렇게 나무로 모양을 깎아 만드는 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 촛대를 만들며 함께 마음을 쌓아보는 건 어떨까’ 하고 제안했죠.
ⓕ 그림 속 이미지와 도자, 그리고 촛대가 마치 한 사람이 만든 것처럼 이질감 없던 이유가 오랜 친구와의 교감이 바탕에 있기 때문이군요. 작가님이 실제 겪어온 이야기를 솔직히 담은 만큼, 주변의 오랜 지인들의 반응도 궁금해요.
독일에 산 지 17년이 되어서 한국에 오면 만나는 친구들은 최소 20년의 관계를 맺은 셈이에요. 심지어 다들 그때와 크게 다른 것도 없어요. 하는 일도 비슷하고요. 다른 게 있다면 각자 좋아하던 일로 누군가는 학교에서 강의하고, 누군가는 영화를 만들고, 누군가는 차를 사는 그 정도 달라진 거죠. 친구들을 만나면 쑥스러워 작업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번엔 제가 친구들에게 부탁했어요. 열두 개의 마음이 있으니 한 친구에게 하나씩 읽어 녹음해달라고요. 전시에 오는 사람들이 그림만 보고 지나치는 것으로 그치기엔 아쉬운 부분이 있어서 그 녹음과 편집 영상을 제 SNS에 올렸어요. 전문 성우를 섭외할 수도 있었겠지만, 깊은 마음을 나눠온 친구들이 읽어주면 진짜 큰 위안이 될 것 같았어요. 그리고 개개인의 삶이 녹아있는 목소리가 녹아있는 낭독의 큰 힘을 경험하였고요. 개인적으로 아주 귀하고 고마운 시간이었어요. 선뜻 제 작업에 따뜻한 불을 밝혀 그 ‘마음들’을 외롭지 않게 해준 친구들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사진. 정해민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드는 일러스트레이터 민정화는 회화, 그림책, 프린팅 그리고 도자기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작업합니다. 2006년부터 독일에 기반을 둔 작가는 베를린에서 가까운 시골 동네에 살며 작업하고 서울에 오가며 활동합니다.
가내 수공업 형태의 리소 인쇄로 만들어온 그림책과 프린팅을 주로 작업하던 작가는 2018년부터 <관상식물> 회화 시리즈로 베를린과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2020년부터 회화, 그림책, 도자기 오브제들로 작업해 온 <움직이는 마음들>로 2022년 팩토리2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습니다.
전시명  움직이는 마음들
작가  민정화
장소  factory2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10길 15)
기간  2022. 11. 11.(금)-12. 11.(일)
관람 시간  화-일요일, 11-19시(월요일 휴관)
아티스트 토크  2022.12.3.(토) 오후 3시

기획  팩토리2 (factory2)
진행  김보경, 이경희, 이지연
그래픽 디자인  김보경
설치도움  손정민
주최  팩토리2 (factory2)
후원 STIFTUNG KUNSTFONDS, NEUSTART KULTUR, 서울문화재단, 서울메세나협회


기획 팩토리2 
진행 김보경, 이지연
디자인 유나킴씨
에디터 뫄리아
디렉터 홍보라 
팩토리2 드림
팩토리2
factory2.seoul@gmail.com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10길 15 02-733-48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