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아동사업 이야기

 태화복지재단은 1921년에 세워진,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복지기관입니다. 당시 매우 척박했던 이 땅에, 소외된 여성과 아동을 위한 사회사업을 펼쳤던 태화의 노력은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태화 창립 100년을 준비하며, 태화의 역사와 사회복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본 내용은 1997년 4월 1일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에서 발행한 ['태화이야기' - 이덕주 著]에서 발췌 구성했습니다.
네 번째 이야기 – 유희장과 오후구락부 “무산아동사업 이야기”
“요람에서 무덤까지”
 태화가 사업을 시작할 때 인기 있었던 사업 중 하나가 유치원 사업이었습니다. 태화는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cradle to grave)”라는 사회사업 이념에 맞춰 다양한 사업을 시작했는데, 유치원은 바로 ‘요람’에 해당하는 기초 사업이었습니다. 다른 사업들은 서양 선교사가 하는 사업이라며 조선 여인들이 거리를 두고 봤지만, 유치원만큼은 문을 열기가 무섭게 학생들이 몰려왔으니, 교육열이 그때도 대단했나 봅니다. 양반집 도련님들이 식모 등에 업혀 태화유치원으로 몰려왔으니 유치원만큼은 시작부터 흑자였습니다.

<초기 태화유치원의 교육>
‘거리의 아이들’
 그런데 매일 수업 때마다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치원 수업이 진행되는 광경을 문틈으로 훔쳐보며 오전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더 많은 아이들이 교실 밖에 몰려있었던 것입니다. 이름하여 ‘거리의 아이들(children of street)’. 가정형편이 어려워 ‘월사금’을 낼 수 없어 교실 안에는 들어갈 수 없고, 자기 또래 아이들이 때때옷을 입고 창가와 유희를 배우는 것이 하도 부러워 아침만 되면 태화를 찾아든 아이들이었습니다.
 유리창 밖에서 교실 안 아이들이 하는 대로 손짓, 몸짓, 유희를 따라 하다가 오전 수업만 끝나면 이 아이들 세상이 되었습니다. 부잣집 아이들이 식모 등에 업혀 집으로 가면, 그 빈 마당에서 거리의 아이들이 선생도 되고 학생도 되어 그날 오전 교실 안에서 이루어졌던 수업을 재탕 삼탕하며 뛰어놀았던 것입니다. 특히, 오전 수업 때 유치원 아이들이 독점했던 그네, 미끄럼틀, 시소 등 운동장 놀이기구들은 새 주인을 만나 더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던 태화 선생님들이 가난한 집 아이들 몇 명을 받아들여 오전 수업에 참여시켰는데, ‘월사금’ 내고 아이를 보낸 집 부모들이 “더러운 집 아이들과 같이 가르칠 수 없다”며 항의하는 바람에 아픈 마음만 더욱더 아플 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거리의 아이들’을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이에 태화유치원 최활란(崔活蘭) 선생님은 오후구락부를 고안해냈습니다.

유희장과 오후구락부
 태화는 연령, 성별, 직업에 따라 다향한 구락부(俱樂部, club)를 만들어 자율적인 공간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이제 ‘거리의 아이들’을 위한 구락부를 만들었으니 오후에 모인다 해서 오후구락부라고 했습니다.

<태화 유희장에 모인 거리의 아이들’>
 오후구락부 활동의 특징은 실외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유치원 교실은 ‘월사금’ 낸 부모들의 눈치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고, 경계선 없는 운동장이 이 아이들의 교실이자 놀이터가 된 것입니다. 전에 태화정, 낙원정 정자가 있던 연못을 메워 만든 이 운동장을 아이들은 ‘유희장(playground)’이라 불렀었지요. 정식유치원까지는 못되더라도 유희장 맑은 공기 속에서 거리의 아이들은 마음껏 뛰놀며 태화의 사랑을 느꼈을 겁니다.
태화의 유희장은 '거리의 아이들'이 마음껏 들어와 사랑을 맛볼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춘 그런 곳이었습니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의 소외된 이웃들에게
캄보디아 현지 직원이
직접 강사가 되어 진행한 사회복지교육.
이 직원은 석사 학위 과정 수료자라네요?!
코로나19 확산 방지와 예방을 위한
태화복지재단 복지시설 현황을 소개합니다.
(매주 업데이트 됩니다!)

사회복지법인 감리회 태화복지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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