ㅈ) 올 초에 울진에서 최악의 산불이 발생했고(6월인가 울진을 지나칠 때가 있었는데 산들이 갈색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최근에 힌남노를 겪었는데 피해는 예상보다 심각하지 않았지만, 태풍이 새로운 차원을 맞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해였습니다.
ㄱ) 924 기후정의행진↗
기후변화, 기후위기를 지나 이제 우리는 기후재난의 한복판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폭염, 산불, 가뭄, 홍수가 이제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기후재난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기후는 왜 재난이 되고 있습니까? 결코 줄어들지 않는 온실가스 배출과 과도한 자원 채굴로 인한 생태계 파괴때문입니다. 이는 끊임없는 이윤추구로 자본을 축적해 성장하고 권력을 손에 쥐려는 기업과 이를 뒷받침하는 정부때문입니다.
다시 묻게 됩니다. 기후는 누구에게 재난이 되고 있습니까? 누군가에겐 외제차가 침수되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목숨을 잃는 재난입니다. 새로운 돈벌이 기회가 생겼다고 반색하는 기업에게 기후위기는 기회이지만 일터에서 쫓겨나는 노동자, 농토와 삶터에서 쫓겨나는 농어민, 무참히 희생되는 수많은 생명들에겐 당장의 ‘기후재난’이 되고 있습니다.
ㅂ) 홍수와 함께 가뭄도 큰 문제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농어촌공사가 농업용 저수지 물을 골프장에 팔았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경향신문] 최악의 가뭄에 저수지 물 골프장에 판 농어촌공사↗
ㅅ) 이번에 태풍이 연이어 오는 상황들도 아무래도 눈여겨보게 되는 것 같아요.
뉴스 등을 살펴보면 태풍이 연달아 오거나, 기온이 크게 달라지는 이유를 기후위기로 보는 점들도 몇 년 사이 달라진 변화인 것 같아요.
ㅂ) 네, 지구온난화로 태풍이 더 강해지고 많아진다는 기사도 보았습니다.
ㅅ) 직접적인, 체감할 수 있는 형태로 기후위기가 다가오지 않으면, 사실상 기후위기를 생각하기 어려운데 올해 더위나 (한국에 국한하지 않고). 태풍 등을 보면 더욱 실감 나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기후위기 안에서 불평등의 문제들도 더욱 이야기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특히 반지하 침수 등이 인지된 것 같아요.
ㅈ) 기후 온난화로 인한 재난이 온난화의 원인 제공자들이 아니라 정반대의 사람들, 짐승들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점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메트로폴리스보다 농촌, 서울보다 지방, 부자보다 빈자, 발전한 나라보다 저발전 나라.
ㅂ) 네, 원인 제공자들은 재난을 오히려 이윤 추구의 기회로 활용하려는 모습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ㅈ) 924 기후정의행진의 첫 단락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기후위기는 온실가스를 뿜어대는 화석연료 때문만이 아닙니다. 화석연료는 자연과 인간을 희생시켜 더 많은 상품을 만들고 팔아치워 이윤을 쌓아야만 시장에서 살아남는 기업과 자본이 필연적으로 선택한 에너지일 따름입니다. 이러한 권력과 자본의 폭력 앞에서 농촌과 자연은 생명과 삶이 아닌 착취와 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노동자는 인간이 아닌 기계의 부속품처럼 쓰고 버리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는 여성, 장애인, 이주민, 지역주민 등 차별받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에 대한 폭력 아래 가능했습니다. 지난 수백 년간 지구적 규모로 자행된 폭력의 역사이며, 화석연료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
기후위기의 원인이 화석연료에만 있지 않고 다른 원인도 있다고 썼는데, 두 번째 문장 이후에 나오는 내용이 기후위기의 원인으로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요?
자연과 인간(노동자, 여성, 장애인, 이주민, 지역주민 등)에 대한 폭력이 기후위기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는지 궁금합니다.
ㅈㄱ) 도시화로 인한 열돔 현상 같은 걸 말하는 것일까요?
ㅅ) 저는 화석연료는 권력과 자본이 농촌, 자연 여성, 장애인을 착취하여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형태이고, 그렇기에 권력과 자본은 소수자들을 억압하면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화석원료를 주된 에너지로 삼았다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소수자들을 억압하면서 -> 저렴한 노동력으로 이용하면서(?)' 의 맥락으로 이해했습니다.
화석원료를 떠올리면 대표적으로는 의류산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패스트 패션 산업 등에 많이 동원된 구성원을 떠올려보면 여성,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 이주노동자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저렴하게 활용하면서 화석원료를 이용하며 이윤으로 삼은 기업과 자본'이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ㅂ) 자연에 대한 폭력을 생각해 보면, 무분별한 벌채 같은 것도 기후위기의 원인으로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ㅈ) 기후정의 개념이 에너지형태의 전환만이 아니라 체제 전환까지 포함하려면 위의 단락이 설득력 있게 조직되어야 하는데 문장들이 전체적으로 난삽하고 논리 연관이 취약하며 정서적 호소에 머무르고 있는 느낌입니다.
화석연료는 석유와 석탄을 의미하는데 석탄 채굴은 광부가 힘든 노동을 통해 노동집약적으로 수행함에 반해 석유는 시추장치를 동원해서 기술집약적인 방식으로 하지 않나요?
여성, 장애인, 이주민 등과의 직접적 연관성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ㅈㄱ) 국가집약적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특정 국가나 지역에서 얻을 수 있으니까요.
ㅈ) 농촌과 자연이 착취와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도 정치경제학적으로는 좀 부적절한 말입니다. 착취라는 말은 노동을 통해 생산된 가치와 노동력 가치의 차이를 자본이 전유한다는 표현이기 때문에 농촌과 자연에는 잘 맞지 않습니다.
ㅂ) 권려과 자본이 1)기후위기와 2)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폭력의 공통원인임은 분명하지만, 그 두 결과를 또 인과로 연결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ㅅ) 화석연료가 기업과 자본이 필연적으로 선택한 에너지일 따름이라는 말에서…. 석유는 채굴과정 후의 과정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채굴 후에 어떤 식으로 활용하고, 얼마나 활용할 것이냐의 문제처럼 들리기도 하여서요.
뭔가 농촌과 자연에 대한 설명에서는 의인화된 표현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자연의 노동, 농촌의 노동처럼요.
ㅈ) 화석연료 선택이 권력과 자본에게 '필연'이라는 말은 화석연료 없는 자본주의는 '불가능하다'라는 뜻을 함축하는데, 원자력이나 재생에너지로도 자본은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역시 부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행진'이 비판하는 녹색자본주의('녹색성장체제')는 화석연료가 자본에게 필연이 아니라 우연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ㅅ) 네 그럴 것 같습니다. 효율적으로 선택된 연료일까요? "에너지일 따름입니다."라는 표현은 그렇게 들립니다.
ㄱ) 오늘 발표된 선언문에서도 그린워싱 비판 구절이 나옵니다.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인 우리는 기후정의의 주체로 나설 것을 선언한다. 불평등하고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이 체제 아래서 이대로 살 수 없고, 이대로 살지 않을 것이다. 막대한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시스템을 전환하기 위해 결집할 것이고, 불평등한 체제를 끝장내기위해 연대할 것이다. ‘탄소중립’, ‘녹색성장’, ‘ESG 경영’과 같은 허울 뿐인 그린워싱에 기만당하지 않고 ‘배출제로’ 시대를 앞당기고 기후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924 기후정의행진] 기후재난, 이대로 살 수 없다. 기후정의를 위해 함께 행진하자↗
ㅈ) 이명박의 4대강 사업도 녹색의 이름으로 전개되었습니다.
ㅂ) 네! 오히려 '행진'의 글은 화석연료 사용이 자본주의에게 필연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ㅅ) 기후정의라는 것이 어떤 뜻일지 갑자기 헷갈리는데요. 기후정의와 사회정의는 어떤 식으로 분리되고 혼합될까요?
ㅈ) 원자력도 탄소배출 없는 청정에너지로 홍보되었습니다.
사회정의와 기후정의를 뒤섞지 말고 차라리 "사회정의가 기후정의의 실현조건이다."라는 방향에서 서술했다면 더 이해하기 쉬웠을 것 같습니다.
자본은 이윤 경쟁 속에서 부단히 과잉생산으로 내몰리는 체제이고 그것은 에너지의 과잉 소비를 체제의 필수조건으로 품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인간 비인간 객체들에 대한 착취나 수탈도 극대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ㅅ) 네, 그러한 편이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행진 등에서는 기후위기와 사회정의의 연관(혹은 기후 위기의 영향)을 주되게 끌고 가는 것 같습니다. 포스터도 그러한 모습인 것 같습니다.
ㄱ) 아래 단락에서는 "기후정의"를 아직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은 것으로, 논의를 거쳐 함께 그려야 할 미래상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9월 24일 우리가 기후정의행진에 함께 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더 많은 당사자의 이야기. 우리도 그 중 하나입니다. 내 위기를 타인이 정의하는 것이 아닌 내 스스로 정의하고 말하기 위해 우리는 9월 24일에도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924에 기대를 걸어봅니다. 기후위기가 사회 불평등과 부정의의 문제이며 착취의 문제이기에. 기후정의를 외치는 수 많은 사람들이 그 착취의 구조를 깨야 한다고 인정하는 날이. 기후위기가 여기 있는 우리 삶의 문제라는 걸 드러냈을 때. 기후정의가 조금은 선명하게 그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요. 단지 미래세대라서, 피해의 대상이 되어야 말할 수 있다는 주장을 부정하고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자리를 이곳에서도 함께 만들어갈 것입니다.
[924 기후정의행진] 기후재난, 이대로 살 수 없다. 9월 24일, 광화문으로 모이자↗
ㅈ) 서술은 혼란스럽게 되어 있지만, 하여튼 나는 기후위기의 극복이 에너지형태 전환만으로 달성되지 않는다는 <기후정의행진>의 근본 생각에 동의합니다.
최근 (정의당과 대비되는) 진보당의 약진을 다룬 어떤 기사에서, 광주 지역 태양광 발전 사업이 농민의 요구를 폭력적으로 무시하면서 전개된 것에 대한 항의가 (이러한 현실 앞에서 농민과 연대한) 진보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기후정의’는 녹색성장과 탄소중립을 빌미삼아, 농민이 땅에서 쫓겨나고…"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겨레] 태양광의 그늘에 주목한 진보당의 반전↗
ㅅ) 아래의 대목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핵발전은 기후위기의 대안이 아니다. 이산화탄소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핵발전은 핵사고와 방사성 폐기물의 위험으로 기후생태위기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한다. 이윤 추구를 위해서 위험을 지역으로, 사회적 약자로, 그리고 미래로 전가한다는 점에서 핵에너지는 화석연료와 다를 바 없다.
지구적인 한계를 넘어 지속적으로 채굴, 생산, 소비, 폐기하도록 만드는 채굴주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다. 빠른 속도의 멸종, 토지와 해양 오염, 산림 파괴 등의 생태위기와 지역 공동체의 사람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낳는다. 이는 불합리한 자유무역 체제와 함께, 안전하고 정의로운 먹거리 체제를 만들려는 노력을 방해한다. 비윤리적이고 지속불가능한 공장식 축산과 산업적 수산업을 통한 남획은 대표적인 모습으로, 빠르게 정의로운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ㅂ) '기후정의'라는 표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