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호
(통권 65호) 2022. 10. 9
🤘 열린 세미나 🤘

『심층적응』

 


다음 열린 세미나에서는 젬 벤델루퍼트 리『심층적응』(착한책가게 | 2022년 8월)에 관한 토론을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세미나 전 미리 책읽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10월 세미나는 4주 차 목요일(10/27)에 한 번만 진행합니다.
열린 세미나는 관심 있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토론회입니다.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 일정: 10월 27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 장소: 카카오톡 <열린 세미나> 오픈채팅방


*책 소개: 
이 책은 이러한 상황에서 탄소 배출을 줄이고 대기 중 탄소를 드로다운(격리)하는 노력과 함께 피할 수 없는 붕괴에 대비하고, 지금까지의 주류적 접근에서 벗어나 생산, 교역, 생활방식을 전면적으로 전환하는 심층적응과 변형적 적응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고자료:
Deep Adaptation Forum 2022 (심층적응 포럼 영문 홈페이지) 

👇  지난 세미나 갈무리  👇 
 

현실이 된 기후위기

9월 22일 (목) 저녁 7시 30분



   소주제


  1. 한반도를 휩쓸고 간 수해와 태풍
  2. 전쟁으로 다시 부상한 화석, 원자력 에너지
  3. 기후위기와 철학, 그리고 예술

1. 한반도를 휩쓸고 간 수해와 태풍
 ㅈ) 올 초에 울진에서 최악의 산불이 발생했고(6월인가 울진을 지나칠 때가 있었는데 산들이 갈색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최근에 힌남노를 겪었는데 피해는 예상보다 심각하지 않았지만, 태풍이 새로운 차원을 맞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해였습니다.

ㄱ) 924 기후정의행진

기후변화, 기후위기를 지나 이제 우리는 기후재난의 한복판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폭염, 산불, 가뭄, 홍수가 이제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기후재난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기후는 왜 재난이 되고 있습니까? 결코 줄어들지 않는 온실가스 배출과 과도한 자원 채굴로 인한 생태계 파괴때문입니다. 이는 끊임없는 이윤추구로 자본을 축적해 성장하고 권력을 손에 쥐려는 기업과 이를 뒷받침하는 정부때문입니다.

다시 묻게 됩니다. 기후는 누구에게 재난이 되고 있습니까? 누군가에겐 외제차가 침수되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목숨을 잃는 재난입니다. 새로운 돈벌이 기회가 생겼다고 반색하는 기업에게 기후위기는 기회이지만 일터에서 쫓겨나는 노동자, 농토와 삶터에서 쫓겨나는 농어민, 무참히 희생되는 수많은 생명들에겐 당장의 ‘기후재난’이 되고 있습니다.


ㅂ) 홍수와 함께 가뭄도 큰 문제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농어촌공사가 농업용 저수지 물을 골프장에 팔았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경향신문] 최악의 가뭄에 저수지 물 골프장에 판 농어촌공사


ㅅ) 이번에 태풍이 연이어 오는 상황들도 아무래도 눈여겨보게 되는 것 같아요.

뉴스 등을 살펴보면 태풍이 연달아 오거나, 기온이 크게 달라지는 이유를 기후위기로 보는 점들도 몇 년 사이 달라진 변화인 것 같아요.


ㅂ) 네, 지구온난화로 태풍이 더 강해지고 많아진다는 기사도 보았습니다.


ㅅ) 직접적인, 체감할 수 있는 형태로 기후위기가 다가오지 않으면, 사실상 기후위기를 생각하기 어려운데 올해 더위나 (한국에 국한하지 않고). 태풍 등을 보면 더욱 실감 나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기후위기 안에서 불평등의 문제들도 더욱 이야기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특히 반지하 침수 등이 인지된 것 같아요.

 

ㅈ) 기후 온난화로 인한 재난이 온난화의 원인 제공자들이 아니라 정반대의 사람들, 짐승들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점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메트로폴리스보다 농촌, 서울보다 지방, 부자보다 빈자, 발전한 나라보다 저발전 나라.


ㅂ) 네, 원인 제공자들은 재난을 오히려 이윤 추구의 기회로 활용하려는 모습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ㅈ) 924 기후정의행진의 첫 단락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기후위기는 온실가스를 뿜어대는 화석연료 때문만이 아닙니다. 화석연료는 자연과 인간을 희생시켜 더 많은 상품을 만들고 팔아치워 이윤을 쌓아야만 시장에서 살아남는 기업과 자본이 필연적으로 선택한 에너지일 따름입니다. 이러한 권력과 자본의 폭력 앞에서 농촌과 자연은 생명과 삶이 아닌 착취와 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노동자는 인간이 아닌 기계의 부속품처럼 쓰고 버리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는 여성, 장애인, 이주민, 지역주민 등 차별받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에 대한 폭력 아래 가능했습니다. 지난 수백 년간 지구적 규모로 자행된 폭력의 역사이며, 화석연료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

기후위기의 원인이 화석연료에만 있지 않고 다른 원인도 있다고 썼는데, 두 번째 문장 이후에 나오는 내용이 기후위기의 원인으로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요?

자연과 인간(노동자, 여성, 장애인, 이주민, 지역주민 등)에 대한 폭력이 기후위기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는지 궁금합니다.


ㅈㄱ) 도시화로 인한 열돔 현상 같은 걸 말하는 것일까요?


ㅅ) 저는 화석연료는 권력과 자본이 농촌, 자연 여성, 장애인을 착취하여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형태이고, 그렇기에 권력과 자본은 소수자들을 억압하면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화석원료를 주된 에너지로 삼았다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소수자들을 억압하면서 -> 저렴한 노동력으로 이용하면서(?)' 의 맥락으로 이해했습니다.

화석원료를 떠올리면 대표적으로는 의류산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패스트 패션 산업 등에 많이 동원된 구성원을 떠올려보면 여성,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 이주노동자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저렴하게 활용하면서 화석원료를 이용하며 이윤으로 삼은 기업과 자본'이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ㅂ) 자연에 대한 폭력을 생각해 보면, 무분별한 벌채 같은 것도 기후위기의 원인으로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ㅈ) 기후정의 개념이 에너지형태의 전환만이 아니라 체제 전환까지 포함하려면 위의 단락이 설득력 있게 조직되어야 하는데 문장들이 전체적으로 난삽하고 논리 연관이 취약하며 정서적 호소에 머무르고 있는 느낌입니다.

화석연료는 석유와 석탄을 의미하는데 석탄 채굴은 광부가 힘든 노동을 통해 노동집약적으로 수행함에 반해 석유는 시추장치를 동원해서 기술집약적인 방식으로 하지 않나요?

여성, 장애인, 이주민 등과의 직접적 연관성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ㅈㄱ) 국가집약적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특정 국가나 지역에서 얻을 수 있으니까요.


ㅈ) 농촌과 자연이 착취와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도 정치경제학적으로는 좀 부적절한 말입니다. 착취라는 말은 노동을 통해 생산된 가치와 노동력 가치의 차이를 자본이 전유한다는 표현이기 때문에 농촌과 자연에는 잘 맞지 않습니다.


ㅂ) 권려과 자본이 1)기후위기와 2)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폭력의 공통원인임은 분명하지만, 그 두 결과를 또 인과로 연결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ㅅ) 화석연료가 기업과 자본이 필연적으로 선택한 에너지일 따름이라는 말에서…. 석유는 채굴과정 후의 과정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채굴 후에 어떤 식으로 활용하고, 얼마나 활용할 것이냐의 문제처럼 들리기도 하여서요.

뭔가 농촌과 자연에 대한 설명에서는 의인화된 표현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자연의 노동, 농촌의 노동처럼요.


ㅈ) 화석연료 선택이 권력과 자본에게 '필연'이라는 말은 화석연료 없는 자본주의는 '불가능하다'라는 뜻을 함축하는데, 원자력이나 재생에너지로도 자본은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역시 부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행진'이 비판하는 녹색자본주의('녹색성장체제')는 화석연료가 자본에게 필연이 아니라 우연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ㅅ) 네 그럴 것 같습니다. 효율적으로 선택된 연료일까요? "에너지일 따름입니다."라는 표현은 그렇게 들립니다.


ㄱ) 오늘 발표된 선언문에서도 그린워싱 비판 구절이 나옵니다.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인 우리는 기후정의의 주체로 나설 것을 선언한다. 불평등하고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이 체제 아래서 이대로 살 수 없고, 이대로 살지 않을 것이다. 막대한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시스템을 전환하기 위해 결집할 것이고, 불평등한 체제를 끝장내기위해 연대할 것이다. ‘탄소중립’, ‘녹색성장’, ‘ESG 경영’과 같은 허울 뿐인 그린워싱에 기만당하지 않고 ‘배출제로’ 시대를 앞당기고 기후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924 기후정의행진] 기후재난, 이대로 살 수 없다. 기후정의를 위해 함께 행진하자


ㅈ) 이명박의 4대강 사업도 녹색의 이름으로 전개되었습니다.


ㅂ) 네! 오히려 '행진'의 글은 화석연료 사용이 자본주의에게 필연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ㅅ) 기후정의라는 것이 어떤 뜻일지 갑자기 헷갈리는데요. 기후정의와 사회정의는 어떤 식으로 분리되고 혼합될까요?

 

ㅈ) 원자력도 탄소배출 없는 청정에너지로 홍보되었습니다.

사회정의와 기후정의를 뒤섞지 말고 차라리 "사회정의가 기후정의의 실현조건이다."라는 방향에서 서술했다면 더 이해하기 쉬웠을 것 같습니다.

자본은 이윤 경쟁 속에서 부단히 과잉생산으로 내몰리는 체제이고 그것은 에너지의 과잉 소비를 체제의 필수조건으로 품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인간 비인간 객체들에 대한 착취나 수탈도 극대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ㅅ) 네, 그러한 편이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행진 등에서는 기후위기와 사회정의의 연관(혹은 기후 위기의 영향)을 주되게 끌고 가는 것 같습니다. 포스터도 그러한 모습인 것 같습니다.


ㄱ) 아래 단락에서는 "기후정의"를 아직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은 것으로, 논의를 거쳐 함께 그려야 할 미래상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9월 24일 우리가 기후정의행진에 함께 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더 많은 당사자의 이야기. 우리도 그 중 하나입니다. 내 위기를 타인이 정의하는 것이 아닌 내 스스로 정의하고 말하기 위해 우리는 9월 24일에도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924에 기대를 걸어봅니다. 기후위기가 사회 불평등과 부정의의 문제이며 착취의 문제이기에. 기후정의를 외치는 수 많은 사람들이 그 착취의 구조를 깨야 한다고 인정하는 날이. 기후위기가 여기 있는 우리 삶의 문제라는 걸 드러냈을 때. 기후정의가 조금은 선명하게 그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요. 단지 미래세대라서, 피해의 대상이 되어야 말할 수 있다는 주장을 부정하고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자리를 이곳에서도 함께 만들어갈 것입니다.

[924 기후정의행진] 기후재난, 이대로 살 수 없다. 9월 24일, 광화문으로 모이자


ㅈ) 서술은 혼란스럽게 되어 있지만, 하여튼 나는 기후위기의 극복이 에너지형태 전환만으로 달성되지 않는다는 <기후정의행진>의 근본 생각에 동의합니다.

최근 (정의당과 대비되는) 진보당의 약진을 다룬 어떤 기사에서, 광주 지역 태양광 발전 사업이 농민의 요구를 폭력적으로 무시하면서 전개된 것에 대한 항의가 (이러한 현실 앞에서 농민과 연대한) 진보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기후정의’는 녹색성장과 탄소중립을 빌미삼아, 농민이 땅에서 쫓겨나고…"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겨레] 태양광의 그늘에 주목한 진보당의 반전


ㅅ) 아래의 대목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핵발전은 기후위기의 대안이 아니다. 이산화탄소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핵발전은 핵사고와 방사성 폐기물의 위험으로 기후생태위기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한다. 이윤 추구를 위해서 위험을 지역으로, 사회적 약자로, 그리고 미래로 전가한다는 점에서 핵에너지는 화석연료와 다를 바 없다.

지구적인 한계를 넘어 지속적으로 채굴, 생산, 소비, 폐기하도록 만드는 채굴주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다. 빠른 속도의 멸종, 토지와 해양 오염, 산림 파괴 등의 생태위기와 지역 공동체의 사람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낳는다. 이는 불합리한 자유무역 체제와 함께, 안전하고 정의로운 먹거리 체제를 만들려는 노력을 방해한다. 비윤리적이고 지속불가능한 공장식 축산과 산업적 수산업을 통한 남획은 대표적인 모습으로, 빠르게 정의로운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ㅂ) '기후정의'라는 표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2. 전쟁으로 다시 부상한 화석, 원자력 에너지

ㄱ) [경향신문] ‘러시아 성토장’ 된 유엔총회…정상들 “전쟁 중단”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이날 개막 연설에서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큰 이익을 본 선진국 화석연료 기업에 횡재세를 걷어 기후위기 해결에 쓰자고 촉구했다. 그는 “오염 유발자들이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모든 선진국들에 화석연료 기업들의 횡재 이익에 세금을 부과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아프리카 “화석 연료 개발 추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앞당겨진 ‘기후 재앙’ 마지노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아프리카가 화석 연료 생산을 늘릴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지구 평균 기온 상승 폭을 1.5도 이내로 제한하자는 ‘지구 온난화 마지노선’을 지키기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유럽이 화력발전과 원자력발전 쪽으로 이동한 것은 그간의 탄소중립2050이 기만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국에서 화력발전이나 원자력 발전을 하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 대신 러시아에서 화석연료인 가스와 석유를 수입하여 사용해 왔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고 그것은 탄소중립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니까요.


ㅅ) [KBS] “한국, 전쟁 속 러시아 화석연료 2조 4천억 원 수입”

에너지청정대기연구센터는 "러시아산 화석연료 수입이 러시아 침공을 지원하는 행위"라고 못 박았습니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위해 러시아산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을 서둘러 탈피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기사를 보면 전쟁을 유지시키는데 화셕연료 사용도 이바지 한 것으로 보입니다.


ㅈ) 어쨌건 자본주의의 정상상태(확대적인 생산과 재생산 순환)에서 탄소중립을 달성하는 것은 더욱 요원해진 것 같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일시적으로 대기질을 좋게 만드는 공신이 되었던 적이 있는데, 그런 충격적 사건 혹은 조치 없이 성장과 거의 동의어가 된 기후 온난화에 고삐를 달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기후정의행진이 그런 사건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요?

아직 읽어보지 않았는데 젬 벤델과 루퍼드 리드의 책 『심층 적응』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이러한 상황에서 탄소 배출을 줄이고 대기 중 탄소를 드로다운(격리)하는 노력과 함께 피할 수 없는 붕괴에 대비하고, 지금까지의 주류적 접근에서 벗어나 생산, 교역, 생활방식을 전면적으로 전환하는 심층적응과 변형적 적응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전제가 사회 붕괴이고 기후 위기의 영향이 우리가 의지하는 산업소비주의를 뿌리부터 뒤흔들 것이라고 예측하기 때문이다. 파국을 피하기엔 너무 늦었고, 탄소 배출량을 줄인다는 목표 자체를 실현할 가능성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티핑 포인트를 넘어서면 그 속도가 갑작스럽게 빨라질 것이다. 그리고 전환은 기존의 위계질서를 뒤집고 사회정의, 반가부장제, 탈식민화, 불평등 해소에 노력을 쏟고 서로의 자유를 지지하는 공동해방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전환의 과정이 고통만은 아니고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레디앙] 기후대혼란, 피할 수 없는 붕괴에 어떻게 적응하나

이런 접근법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현재 각국 정부의 기만적 태도(유럽 여러 나라들과 문재인 정부)나 뻔뻔한 태도(일본이나 윤석열 정부)가 문제 해결에는 가망 없어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ㅅ) 기후위기를 주요 쟁점으로 대규모 결합을 하는 기회, 행진들은 많지 않았던지라... (914 기후행진은) 그래도 효과를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다만 이번 태풍만 보더라도, 태풍의 원인이 기후위기로 인한 것이더라도 각 지역에 따라 미치는 영향이 달라 인식 차이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영향을 받는자와 받지 않는 자의 차이 등이요.

기사를 찾지 못하였는데요.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댐을 설치하는 기술적인 구상들도 적극적으로 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기술적 발전이 속도를 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KBS] 기후위기 대비, 고강도 방파제 시설 도입

제가 직접적으로 본 기사는 댐을 설치하면서 열기구를 띄우는 기사였는데, 지금 제가 검색을 하지 못하네요.


ㅈ) 댐 건축은 기후위기를 막는다기보다 그것에 적응하는 방식인 것 같아요. 제주도 탑동 앞에도 1~2년 전에 트라이포드 방파제가 바다 한가운데에 길게 세워졌습니다.

 

ㅅ) 네 그런 것 같습니다.


ㅈ) 프리드리히 폰 보리스 외가 지은 도시의 미래라는 책을 오디오로 들어본 바 있는데, 건축가들이 인공섬을 만들어 방파를 하고 그 인공섬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문화 기지화하여 육지와 연결하는 구상(인지 실험인지)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ㅅ) 조금 다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리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라는 책에서 카트리나와 같은 자연재해로 사회가 붕괴되고 공동체가 폐허 속에서 형성되는 과정을 그리는데 그 안에서는 인종, 성별, 빈부에 따른 차별과 억압등이 일시적으로 해소되어 다른 형태의 사회가 형성됨을 보여줍니다. 해당 책도 폐허 속의 절망 속에서 다른 희망을 발굴하도록 안내해서 함께 살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ㅂ) 체제에 맞선다는 아이디어는 어떤 면에서 현 체제가 앞으로도 공고히 버티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하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현 체제의 붕괴가 우리 앞에 놓인 (혹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시나리오라면 조금 다른 방향의 대안과 사고와 언어들이 필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체제의 붕괴가 곧 모두의, 모든 것의 붕괴가 되게 하지 않으려면요.


ㅈ) 역사적으로 붕괴는 '혁명인가 야만인가?'(로자 룩셈부르크: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의 모멘트였다고 생각합니다. 붕괴를 전환으로 바꿀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야만으로 귀결되었다고 할까요?

3. 기후위기와 철학, 그리고 예술
 ㅈ) 기후위기는 기후라는 비인간적 사태를 사유의 중심에 놓도록 촉구하는 계기로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기후위기와 팬데믹이 아니었다면 객체지향철학이나 신유물론과 같은 새로운 사상조류를 위한 자리는 없지(혹은 좁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런데 기후위기와 팬데믹 이후로 객체지향철학이나 신유물론에 관한 관심은 폭발적이고 이전의 철학들이 다분히 인간중심적이고 상관주의적이었다는 성찰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ㅂ) '상관주의'가 어떤 것이었는지 헷갈려서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사물의 풍경] 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상관주의에 관하여

한결같이 상관주의의 의문은 "우리 인간들에 대해 사물들은 무엇인가?", "세계의 존재자들은 우리 인간들을 어떻게 반영하는가?"라는 의문인 듯 보인다.

 

ㅈㄱ) 기후라는 것을 인간의 어떤 기준에 따라 사유하고 있다는 점이 생각납니다. (기후라는 것을 생각할 때) 어떤 극한 지역들은 제외하고, (인간) 자신에게 편안한 생활로 적응하고 어떤 문명화를 지속하는 데 동참하고 있는 것(으로만 생각한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가져야 할까요. 너무 탈역사적인 생각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ㅅ) 올해 일어난 화재를 다루는 언론들에서도 인간이 아닌 동물, 짐승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씩 비중이 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집에서 키우던 가축들, 산에 살던 짐승들 이야기도 조금이나마 더 이야기되고요. 화재 장면을 영화의 한 씬으로 묘사한다면, 인간 외에 배경으로 존재했던 것들을 조금씩 더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ㅈ) 카메라의 눈은 인간만이 아니라 거미줄, 먼지를 포함하는 비인간까지 구별 없이 응시한다는 들뢰즈식 사유(시네마)가 떠오르네요.

『종과 종이 만날 때』 는 인간과 개라는 이종의 회집에 대해 주로 서술하는데, 우리 사회에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게 된 것이 기후위기나 팬데믹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비인간을 주제화한 이 사건들을 빼놓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으로 보입니다.


ㅂ) 이러한 관심이 예술로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을까요?


ㅈ) 최근 어떤 전시회에서 사변적 실재론을 전시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ㄱ) 여러 개를 보았는데 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 존재론이 예술 영역에서 활발히 논의되는 것 같습니다.

존재의 지리학 : 현대 예술과의 접점에서 존재를 재사유하기

아름다운 사물: 새롭고 오래된

열흘간의 동기화


이런 영화들도 도시의 재개발, 이동에 따른 이야기의 주인공을 고양이에 집중해서 그려냅니다. 유사한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과 관계한 고양이만이 아니라, 도시의 고양이로 그려내는 점이 그러합니다.


ㅂ) 흥미로운 전시와 영화 정보 감사합니다. 세미나 후에 천천히 살펴보도록 겠습니다!

🔊
진실연대자들이 추천하는 강연회


[디자인의 양면성]

호모 아르티스와 메트로폴리스


강연자: 조정환
날짜: 2022년 10월 13일 목요일
시간: 10:00 - 11:00
위치: 온라인

'호모 아르티스와 메트로폴리스'는 10월 6일부터 14일까지 열리는 '디자인의 양가서' 강연 시리즈중 하나입니다.

이 강연에서는 근대 자본주의가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네트워크로 연결된 대도시가 생산을 위한 확장된 지리적 공간으로 등장하고, 생산적 주체성이 소멸되는 복잡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통일된 산업 노동자에서 다방면의 호모 아르티스로 재구성되는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삶을 위한 실천의 방향과 형태를 규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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