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에너지 절감사업에 1100억 低利 대출… 곳곳서 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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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현장 수백곳중 4~5곳만 점검… 업체들, 서류 꾸며 돈 빼돌려


"1500만원 초저금리 대출을 끌어다 드립니다. 연리가 고작 1.45%! 무조건 대출됩니다."

지난 18일 서울시 관악구의 A인테리어 업체 사무실. 이 업체는 올 초부터 '서울시로부터 초저금리 대출을 받아준다'는 내용의 전단을 뿌리고 있다. 홍보 대상은 서울시의 '건물 에너지효율화 대출'이다. 주택의 단열·냉난방이나 조명 시설 등 인테리어를 에너지 절감 시설로 바꾸면 시에서 저리(低利)로 돈을 빌려준다. 그러나 이 업체에서는 실제 인테리어를 하지 않고서도 돈을 빌릴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업체 대표는 기자에게 "가짜 공사 증빙을 만들면 된다"며 "일부만 인테리어에 쓰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또 "서류는 대리 작성이 가능하고, 은행은 신용 조회를 위해 한 번만 방문하면 된다"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였다.

서울시의 건물 에너지 효율화 사업에 참여한 한 가정에서 실내 조명을 LED 전등으로 교체하고 있다. /노원구

서울시가 에너지 절감을 위해 조성한 1100억원대 저금리 대출이 새고 있다. 서류로만 공사한 것으로 꾸며 허위로 대출을 받는 사례가 많다. 시의 부실한 관리 감독 탓이라는 지적이다.

시는 2008년부터 연평균 100억원 규모의 건물 에너지효율화 대출 사업을 진행 중이다. 주택은 최대 1500만원, 건물은 최대 20억원을 빌려준다. 연리 1.45%, 8년간 원리금 분할 상환 조건이다. 신청자가 시공업체에서 공사를 마쳤다는 증빙을 받아 시에 제출하면 대출이 시행된다. 대출액은 시가 2007년 조성한 기후변화기금에서 나온다. 2008년부터 지난 8월까지 총 1105억원이 대출됐다. 올해는 547가구, 6개 건물이 78억원을 대출받았다.


가짜 증빙을 권유하는 업체가 횡행하게 된 것은 시가 대출받은 주택 현장을 점검하지 않기 때문이다. 업체들은 대출 대행 조건으로 일감을 따거나 대행료를 챙겨 이익을 본다. 급전이 필요한 이들이 주 고객이다. 2009년부터 재작년까지 해당 사업에 참여해온 인테리어 업자는 "사업 초기에는 시·구청 직원들이 공사 현장을 무작위로 점검했는데 최근엔 감독이 느슨해져 편법을 쓰는 업자들이 늘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시 관계자는 26일 "지난해와 올해는 민원이 접수된 4~5건만 현장 확인을 나갔다"며 "금액이 적은 데다 빌려주는 돈이기 때문에 서류 심사를 원칙으로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가 원칙으로 내세우는 서류 심사마저도 느슨하다. 시공업체가 제출해야 하는 증빙 서류는 세금계산서·납품확인서·시공 전후 사진 등이지만, 서류를 조작하면 알아채기 어렵다. 사업 시행 이후 시에서 거짓 증빙 서류 제출 업체를 적발한 사례는 한 건도 없다. 거짓 증빙이 탄로 나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점도 문제다. 신청자와 시공업체를 2년간 사업 지원 대상에서 배제할 뿐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일부 인테리어 업자들은 이 같은 허점을 악용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허위 증빙을 만들어 대출을 대행해주는 것이다. 본지가 방문한 관악구 업체는 "지난 4년간 170가구에 대출 대행을 해줬다"고 했다. 대출 대행만 하고 인테리어를 전혀 하지 않은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 가구당 1500만원씩 대출했다고 가정하면 많게는 20억원이 넘는 시비가 업체 한 곳을 배불리는 데 쓰인 것이다. 일부 업체는 일감을 따기 위해 고객의 증빙 위조 요청을 들어주기도 한다. 서울 양천구의 한 인테리어 업자는 "고객이 요구하면 시 에너지효율화 사업 기준에 맞춰 가짜 증빙을 만들어 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시에서는 이처럼 허점이 많은 대출 자료를 바탕으로 에너지 절감량을 계산해 홍보한다.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에너지 7434TOE(석유환산톤·원유 1t이 연소할 때 발생하는 열량)를 아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짜 증빙을 만들어 대출받은 경우를 감안하면 실제 사업 효과는 이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벌찬 기자 b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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