ㅈ) interaction과 intra-action의 차이를 먼저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ㅂ) 전자는 '상호작용' 후자는 '내부-작용'으로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ㅈ) 상호작용=interaction은 독립된 개체들을 전제함에 반해 내부-작용은 그런 전제를 갖지 않는데요. 우리 말에서 ‘내부’라는 말은 당장 어떤 것이 내부가 되는 어떤 전체를 상상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ㅂ) '상호작용'은 이미 존재하는 개체들이 작용action하는 것을 말하는 용어인 데 반해 내부-작용은 개체들이 작용을 통해 창발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었습니다.
ㅈ) 캐런 바라드가 그런 전체를 상정하고 있는 것일까요? 개체들이 내부-작용의 결과로써 창발 된다는 의미겠지요?
ㅅ) 내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은 캐런 바라드는 내부의 바깥을 상정하고 있는 걸까요?
ㅈ) 외부는 선험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 행위적 절단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ㅅ) 책에서 지팡이를 예로 든 것이 기억이 남는데요, 지팡이를 쥔 신체에서 지팡이를 꽉 쥐는 것과 느슨하게 쥐는 것을, 차이를 두어 설명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지팡이는 지팡이를 놓는 행위를 통하여 외부가 될 수도 있고, 꽉 쥐는 행위를 통하여 내부가 될 수도 있는 걸까요?
ㅈ) 네 꽉 쥔 지팡이는 내부화됨에 반해 느슨하게 쥔 지팡이는 외부화되어 객체로 위치 지어지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자는 이 물음에 명확하게 답하고 있지 않지만, 행간에서 바라드가 경계 지어지지 않은 우주를 상정하고 있다는 암시를 받았습니다.
ㅂ) '내부'라는 말이 이미 '외부'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내부-작용'이라 하면 닫힌 전체 안의 내부를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되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또 '닫힌 전체'는 이미 '개체'이므로 위에 설명해 주신 것처럼 외부, 즉 외부를 발생시키는 개체는 작용 후에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바라드가 말하는 '내부-작용'에서 '내부'는 '어떤 것'의 내부는 아니겠습니다.
ㅈ) 그래서 어떤 사람(박준영)은 내부-작용이라 번역하지 않고 간-행으로 번역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intra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가가 바라드 공부에서 하나의 문턱이 되는 것 같습니다.
ㄱ) 바라드는 '사이' 개념을 새롭게 봐야 한다고 주장하던데요, ‘내부-작용’, ‘간-행’ 차이가 의미심장한 것 같습니다.
ㅂ) 책의 구절 중에 "우주는 내부-작용으로서 계속 생성 중이다."라는 문장이 있는데요, 이 경우 우주는 어떤 우주일까요?
ㅈ) 경계가 끊임없이 변하면서 내부-작용을 통해 창발하는 무한성의 우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ㅂ) 경계 지어지지 않은 우주와 경계가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는 다른 것 같은데요, 경계 지어지지 않은 우주를 바라드가 상정하고 있다는 암시를 어떻게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ㅈ) 경계 지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확정된 혹은 고정된 경계가 없다는 말이고 내부-작용을 통해 경계가 계속 변하는 우주이므로 나의 경우는 다른 의미로 쓴 것은 아닙니다.
ㅂ) 꽉 쥔 지팡이의 예, 그리고 뒤에 '회절'을 설명하는 부분을 읽으며, "내부-작용"을 "침투-작용"으로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는데요, 어떨까요?
ㅈ) 바라드라면 침투-작용은 내부-작용의 한 양상으로 볼 것 같습니다. 내부-작용은 경계를 짓고 절단하는 것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ㅂ) 네, 침투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경계를 만드는 작용이네요.
ㅈ) 그래서 intra가 ‘내부’로 새기기에 일정한 난점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사이 ‘간’으로 표현한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이에 대한 고민은 바라드도 깊게 하지만 상호작용에 점점 접근해 가는 표현이 되어버리는 것 같거든요. 간은 독립된 개체를 상상하게 만드니까요.
ㅅ) 자기-만짐 챕터 내용 중 일종의 내부라고 할 수 있는 나의 몸에서도 피부 안의 타자를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명확한 내부를 떠올리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ㄱ) 책에서 내부-작용의 의미를 설명하는 박신현 저자님의 문장 몇 개 가져와 봅니다.
- 몸과 환경은 내부-작용으로 함께 구성된다.
- 인간의 몸을 비롯한 모든 몸은 세계의 거듭되는 내부-작용, 즉 그 수행성을 통해서 물질화한다.
- 환경과 신체는 내부-작용으로 함께 구성된다.
ㅂ) 첫 챕터에 "행위적 실재론"이라는 용어도 중요하게 등장했는데요, "사변적 실재론"과 "행위적 실재론"은 여러 지점을 공유하면서 또 대립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변적 실재론" 중에서도 "하먼"은 라투르의 한계를 지적하며 존재를 모두 관계로 환원하는 것을 경계했는데요, "행위적 실재론"은 라투르보다 관계 쪽으로 더 나아가는 것 같더라고요.
ㅈ) 라투르는 행위자(소)를 인정했는데 바라드의 경우 행위자를 결과물로 보기 때문에 “더 나아간다”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럴 경우 과연 고유한 의미의 “관계”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적어도 우리 말에서는 관계라는 용어가 항을 전제하니까요.
ㄱ) 하먼의 『사변적 실재론 입문』 268쪽 각주에 보면 바라드에 대한 하먼의 입장은 아랫글에 있다고 합니다.
[Rhizomes] Agential and Speculative Realism: Remarks on Barad's Ontology↗
ㅈ) 오래전에 읽어본 적이 있는데 바라드의 생각에 대한 상당한 긍정 위에서 바라드 철학을 상관주의 철학으로 규정하는 것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ㄱ) 마지막 부분을 보면 하먼이 바라드는 위로도 환원하고 아래로도 환원한다(이중으로 환원duomining)고 보는 것 같습니다.
"바라드의 행위적 실재론은 '관계적 실재론'에 기초한다. (...) 바라드는 2012년 인터뷰에서 '행위자' 또는 '행위소'는 그녀가 제안하는 관계적 존재론에 반하기 때문에 (...) 대신 '행위성' 개념을 관계적 존재론에 적합한 방식으로 재작업하고자 한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녀는 행위성이란 타인에게 응답하는 능력, 즉 응답-능력(responseability)이며 상호적인 응답의 가능성이라고 정의한다."
ㅈ) 나의 독해 속에서 하먼 SO-SQ(감각객체-감각성질)의 장은 실제로는 관계장입니다. 그가 RO-RQ장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 관계장에 관한 서술을 계속 상대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만.
ㅂ) "상호 응답"이라는 표현도 어떤 면에서는 항(혹은 개체)을 전제하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경계는 끊임없이 변한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굳이 '관계'를 '항'보다 앞세워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ㅈ) 바라드의 경우는 하먼이라면 SO-SQ라고 할 지평을 철학의 본질이자 핵심으로 끌고 와서 윤리-인식-존재론과 심지어 정치학까지 그곳에 통합시킵니다.
ㄱ) 하먼의 실재객체나 실재성질에 해당하는 것이 바라드에게도 있는 것일까요?
ㅈ) 하먼이라면 당연히 “없다”고 평가할 것입니다.
ㄱ) 바라드가 감각을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대목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바라드도 만짐과 감각하기는 응답의 문제이며, 우리는 타인과 접촉하는 존재로서 즉 타인에 대해 책임지는 존재로서 구성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가 만지고 우리에 의해 만져질 수 있는 타자에는 비인간도 포함된다.
- 바라드는 만짐과 감각하기가 바로 물질이 하는 일, 또는 물질의 존재 자체라고 하면서 물질은 '응답-능력'의 응축이며 만짐은 '응답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ㄱ) 바라드에게 실재객체 같은 개념이 필요한 것일까요?
ㅈ) 바라드에게서는 행위성만이 실재하고 객체는 그것의 파생물이기 때문에 실재객체라는 표현은 형용모순에 가까울 것입니다.
실재객체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행위성의 특수한 양상에 지나지 않겠지요.
ㄱ) "2장 거미불가사리"에 등장하는 거미불가사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