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피곤한 한 주 보내신 분들 많을 것 같습니다. 워낙 박빙이었던 대통령 선거 때문에요. 결과보고 잔다고 평소보다 늦게 주무셔서 리듬 깨진 분들 많이 계시죠?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다룰 영화는 변성현 감독의 <킹메이커>입니다 라고 하면 너무 클리셰라 절대 안 합니다. 대신 이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건 소소하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원래 밤에 늦게 자서,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는 것을요. ㅋㅋ.

저는 밤 생활을 좋아합니다. 특별한 스케쥴이 없는 이상, 늘 새벽 2-4시 사이에 침대에 들어가 (유튜브 보다가) 잠을 청한지 오래되었습니다. 한때 유행했던 미라클 모닝은 저에겐 진짜로 안 일어날지도 모르는 기적이며, 대신 제가 믿는 것은 ‘역사는 밤에 만들어진다’는 말입니다. 밤이 되어 어둑해지고 주변의 소음도 좀 줄어들어야 뭔가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는 좀 변명이고, 그냥 낮에 놀거 다 놀다가 밤 돼서 그제야 뭔가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밤은 저에게 특별합니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밤에 저 개인의 역사에 남을만한 뭔가를 한 게 많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NO. 002]

사일런스 얼롱(silence-along) : 기적 같은 적막
 
2022년 3월 12일


저의 페이버릿 밤 액티비티는 혼자 심야 영화를 보는 것입니다. 요즘은 영화관이 빨리 문을 닫아 아쉽지만, 예전엔 밤 10시 11시 넘어서 하는 영화를 자주 보러갔었습니다. 그러면 영화관이 제가 딱 좋아하는 상태로 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운이 좋아 큰 상영관에서 혼자 영화를 볼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영화 자주 보러 다니시는 분들이라면 그런 경험 많이 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얘기하고 싶은 영화는 그런 상영 조건이나 타이밍이랑 아무 상관없이, 그러니까 영화관이 정말 거의 꽉 찬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관에서 기적과 같은 적막을 느끼게 해준 영화입니다. 오드리 디완 감독의 <레벤느망>(L’evenement)입니다.
  

<레벤느망>에 관한 간단 정보 먼저 알려드립니다. 프랑스 영화입니다. 작년 9월에 열린 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 황금사자상 수상했습니다. 이 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은 봉준호 감독이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2021년 자신이 본 베스트 영화 목록에 이 영화를 넣기도 했습니다. 찌라시에 의하면 모 뉴스레터 위원장 김씨 또한 이 영화를 2022년 베스트 영화 목록에 올릴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약간 tmi로 베니스 영화제의 은사자상인 감독상과 심사위원대상은 각각 <파워 오브 도그>(제인 캠피온)와 <신의 손>(파올로 소렌티노)이 받았습니다. 둘 다 넷플릭스에서 관람 가능하지만, ‘넷플릭스 영화’ 같지는 않은 작품입니다. 굳이 넷플릭스 이야기를 한 이유는 <레벤느망>은 국내에선 왓챠에서 머지않아 관람이 가능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레벤느망>만큼은 정말로 영화관에서 보는 것을 추천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웬만해선 상영관 안 따집니다. 아이맥스도 잘 안 갑니다. 스크린 크기나 사운드의 퀄리티 차이 잘 못 느낍니다. 잘 못 느끼니까 유효한 차이가 실제 있긴 한건지 이 세상을 의심하고 있는 중입니다. 반면 민감한건 다른 관객으로부터 생성되는 것입니다. 같은 영화관에 있는 다른 사람 때문에 시야가 가려지거나, 핸드폰 불빛, 혹은 지각러나 크고 작은 소음 같은 거를 잘 못 참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다 사정이 있으셔서 그러시겠거니. 저도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피해를 줬을 수도 있는 것이구요. 그래서 되도록 심야 영화를 보거나, 그것도 아니면 적절한 방법을 찾아 컴퓨터로 영화를 보곤 합니다.

그렇게 사람을 믿지 않는(?) 제가, 방해받을 위험이 발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벤느망>을 반드시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영화는 절대 멈추거나 중도 관람 포기를 하면 안 되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앞서 말씀드린 기적 같은 적막,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보던 모두가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아무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게 느껴졌던 그 영화관 분위기를 제가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레벤느망>은 원치 않은 임신을 한 20대 초반 대학생이 주인공인 영화입니다. 이름은 ‘안’입니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안은 임신중절을 원합니다. 그러나 영화의 배경인 1960년 초반의 프랑스는 그것을 어떤 이유로도 허락하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즉 범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신중절을 강력히 원하는 안은 위험한 길을 택합니다. 바로 혼자서 어떻게든 임신중절을 해내려는 것입니다.


오드리 디완 감독은 집요한 안을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이야기만 들으면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영화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레벤느망>의 특별함은 이 집요함들에 있습니다. 일단 영화의 모든 씬에 안이 있습니다. 아무리 주인공이라지만, 영화의 모든 씬에 주인공이 얼굴을 비추는 영화는 드뭅니다. 영화에 투입되는 모든 에너지가 안의 안과 밖을 보여주는데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보면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영화인지 안의 하루인지, 안의 하루가 영환지 영화가 아닌지, 영화가 안을 따라다니는 건지 그냥 안인건지, 내가 목격자인건지 당사자인건지 분간이 잘 가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영화의 안과 밖이 가장 가까워질 때, 바로 그 장면이 나옵니다. 안은 불법 수술을 받으러 밤에 혼자 어딘가로 향합니다. (스포가 정말 싫으신 분들은 영화보고 읽으셔도 좋습니다.) 도착한 허름한 아파트에서 안은 의사로부터 아무리 아프더라도 “절대 소리를 내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의사는 소리를 내면 수술을 당장 멈출 것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불법으로 몰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면 안 됐던 것입니다.


그렇게 수술이 시작됩니다. 이 영화는 너무나 강력한 체험 영화입니다. 안이 어떻게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도 보여주지 않던 감독이, 안이 수술 받는 순간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를 보여줍니다. 부디 이 영화를 보고나서만큼은 ‘진작 처신을 잘했어야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감독이 before를 하나도 보여주지 않는 것은, before가 그 뒤에 벌어지는 일에 비해선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영화를 보면 이게 진짜 맞는 말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왜냐면 이 체험을 하는 순간엔 다른 어떤 생각도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너무 아픕니다. 당연히 이것은 영화를 통한 간접 체험이지만, 그래도 너무나 아픕니다. 간접 체험인데도 이렇게 아프다는 것이 너무나 미안할 지경입니다. 너무 미안해서, 안이 이 아픔으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벗어났음 해서, 수술이 중단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보고 있는 나라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뿐만 아니라 영화관에 있던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던 것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냥 아무 소리도 안 났던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필사적으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를 쓰는 그 기운을 저는 감지했습니다. 평소 관객들이 내는 소음에 항시 민감하게 반응했던 저만이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하하. 농담이고 여러분도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보신다면 그 에너지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는 모두가 한 목소리를 (안)내게 되는, 흡사 <보헤미안 랩소디> 싱-얼롱(sing-along) 상영관을 방불케 하는 사일런스-얼롱(silence-along) 관람 경험을 놓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현재 임신중절(낙태)은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특정 조건에 따라 불법이 아닌 상태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2019년 헌법재판소 판결에 따라 낙태죄가 폐지되었습니다만, 아직 관련한 법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여전히 위험한 여지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남아있는 것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종교계의 저항입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레벤느망>은 그 시선을 조금 부드럽게 만드는, 사포질 해주는 영화입니다. 시선(눈)에 사포질한다? 이건 비유가 아닙니다. 그래서 꽤 아픈 영화고, 저는 태어나서 본 영화 중 가장 아팠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호에 계속)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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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는 말씀
 
1. <레벤느망> 관람을 추천하는 글을 쓰긴 했지만, 사실 모두에게 막 보라고 섣불리 말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엄마한테 보라고 추천은 못할 것 같습니다. 선택에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원데이원무비까지 신청해주신 분들이라면!

2. 최근 재밌게 본 영화는 <킹 리차드>입니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 여섯 개 부문에 후보를 올린 작품입니다. 다음주 혹은 다다음주에 관련해서 조금 쓸 것 같습니다.

3.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피그>도 재밌었습니다.

4. 원데이원무비로 보내드린 글의 일부는 저의 블로그나 다른 곳에 전문 게시, 또는 재활용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메일 보내드린 뒤 최소 1주의 간격은 두겠습니다.

5. 경쟁을 붙이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감사한 마음을 전달해야할 것 같아서.. 3월 12일 기준 가장 여러 잔의 커피값(약 6.6잔)을 지불해주신 노창희님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sti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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