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 같은 남의 집 이야기
네 번 째

아경은 올해로 어언 12년 차 전업주부이다. 한가로운 평일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도 학교에 가 아무도 없는 집은 조용했다. 정적 속에서 자신의 허벅지에 자리를 잡은 강아지의 숨소리만 들려오는 가운데 아경은 문득 지난날을 회상했다. 주마등처럼 천천히 떠오르는 과거의 잔상들은 군데군데 비어있어 나이가 들수록 점점 희미해졌다. 그런 기억들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떠올리려 해도 떠올려지지 않는 켜켜이 쌓인 과거의 잔예와 같은 것이었다. 50년 남짓한 세월을 살아가며 나름의 산전수전을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뚜렷하게 남는 것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자 모든 것이 부질없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파생되는 부정적 감정을 안고 있는 것도 정신 건강에 해로우니 묵직하게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갈색 푸들의 따뜻함에 기대어 TV를 틀었다. 집 안이 TV의 음성으로 가득 찼다. 아경은 TV 채널을 빠르게 넘기며 프로그램을 훑어보았다. 한낮의 TV는 하릴없는 사람들을 위한 재방송만 주구장창 틀어줄 뿐이라 전부 익숙한 것들이었다. 네모난 상자 속 철 지난 예능들도 과거를 온전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인간의 뇌는 점점 저장공간의 용량을 비우느라 바쁘다는 사실이 허무하다. 결국 전부 보았던 방송만 가득한 채널 중 하나를 라디오 삼아 틀어놓고 아경은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대강 뉴스를 읽으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도 머릿속에 집어넣은 뒤, 하루의 고정된 루틴에 따라 자연스럽게 청약 사이트를 방문했다.

재개발과 재건축이 막히고 부동산의 공급 물량이 어려워지자 청약으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이 급증했습니다. 이렇게 청약 경쟁률이 올라가는 일은 초유의 사태로 정부에서는 치솟는 청약 경쟁률에 대책을 내놓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 ···

로또 당첨보다 어려워진 청약 당첨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번 넣어 인생 한탕을 노리는 것 또한 사람의 심리였다. 오늘도 청약홈에 들어간다. 그리고 천천히 부동산 정보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눈에 익은 공고들 위에 새로운 공고가 올라와 있었다. 상투적인 소개 글을 읽으며 청약에 당첨되었을 때를 가장해본다. 우선 가장 먼저 할 일은 주변 입지를 고려해 보는 것이다. 1순위는 편의시설이다. 마트, 병원, 인프라 등 주변 상권이 잘 조성되어 있는가는 윤택한 삶을 위해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이다. 2순위는 교통이다. 특히 인천은 수도권이지만 서울이나 경기와 그리 가깝지 않다. 1호선 혹은 터미널과 가까운 위치인가, 혹은 광역 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이 마련되어 있는가는 집값 상승의 발판이 된다. 마지막 고려 요소는 녹지시설의 유무이다. 6년 전쯤 남편이 데리고 온 갈색 푸들 한 마리는 무료한 삶 속 다채로운 침입자였다. 원체 우울한 기질이 있던 아경의 마음에 강아지는 너무나도 쉽게 침투했고 그 이후로는 강아지의 산책을 위해 녹지시설의 유무를 필수적으로 따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24분의 1의 시간을 꼼짝없이 저당 잡혔으니, 이 아이가 제멋대로 나가기 전까지는 매연 가득한 도시 숲에서 그나마 푸른 곳을 찾아야 했다. 그런 여러 조건들을 따져보았을 때 새로 올라온 이 아파트는 아경의 조건에 그럭저럭 적합한 집이었다. 당첨이 되는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청약 신청을 해 놓은 뒤 커피를 타기 위해 소파에서 일어났다. 평화로운 오후의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여전히 빠르게 흘러가고 단조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시간이 속절없이 흐른다는 것을 체감하며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는데, 문자 한 통이 왔다. 홈쇼핑 광고 문자일 것이라 생각하고 대충 확인해 넘기려는데 상단에 익숙한 아파트명이 적혀있었다.

뜻밖의 소식에 놀라 청약홈에 들어가 보니 정말 예비 번호가 떠 있었다. 아경은 얼떨떨한 마음에 몇 번이나 홈을 새로고침 했다. 결과는 그대로였다. 신혼부부도 아니고 무주택자도 아니라 가점을 받을 수 없어 당첨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예상치 못한 당첨이었다. 하지만 곧 513번이라는 가망도 없는 예비 번호를 보자니 이게 될까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기뻤던 마음이 무색하게 높은 예비 번호에 한숨만 나왔다. 아경은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모를 애매한 소식을 들려주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한숨 소리와 함께 그게 되겠냐는 책망이 쏟아졌다. 그리고는 요즘 같은 시국에 이사 갈 생각은 접으라는 남편의 말에 아경은 괜한 오기가 생겨 당첨이 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쏘아붙였다. 결국 물러난 것은 남편이었고 아경은 씩씩대며 전화를 끊었다. 그렇지만 전화를 끊은 아경 또한 확신이 들지 않았기에 그저 근심할 뿐이었다.
일상은 빠르게 지나 추첨일이 다가왔다. 추첨일 당일, 아경은 홀로 추첨 장소로 향했다. 추첨 장소를 향해 운전해 가면서도 확신은 없고 일말의 희망과 절망만이 공존한다. 요 며칠 불안한 마음에 인터넷을 뒤적거리자, 인기가 없는 매물이라면 500번이 넘는 예비 번호까지 돌 수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운이 좋은 누군가의 정보를 토대로 한 추측일 뿐, 기대를 부추기는 허울뿐인 말에 불과했다. 당장 지금 집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가족 중 누구도 청약에 당첨될 것을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었다. 30여 분의 시간 동안 아경의 마음은 점점 심란해졌다. 한참을 이동해 추첨 장소에 도착했고 의자에 조금 앉아있자 추첨이 시작되었다. 생각보다 추첨 장소에 사람이 없다는 긍정적 생각을 하며 의자에 앉자 머지않아 추첨이 시작됐다.
핸드폰에 눈은 가 있지만 온 정신은 당첨 번호를 부르는 사회자의 목소리에 집중해 있다. 번호가 불릴 때마다 움찔하며 단상을 쳐다본다, 올라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단상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도 있다. 당첨이 된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서 튀어 나간다. 하지만 당첨 확률만큼이나 서류 조건을 충족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지 상담을 하다 침울한 표정으로 회장을 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 중 대부분은 결국 돈이 부족해서, 대출을 하지 못해서 허탕을 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사회자가 번호를 호명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당첨이 될 확률이 희박한 200번 대부터는 번호가 불려도 사람이 안 나타나는 경우가 속속히 발생했다. 아경은 가속되는 추첨의 분위기에 보던 핸드폰도 내려놓고 사회자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200번 대를 지나 호명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321, 322, 323, 324 ··· 416번까지 불리게 된 것은 추첨이 시작된 지 2시간 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렇게 400번 대를 지나 마침내 500번 대로 진입했다.
“512번 계신가요? 512번? ······ 네, 없으신 것 같으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513번! 513번 계신가요?”
“···네! 있습니다!”
아경은 손을 들고 번쩍 일어나 단상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러자 단상 아래에서 대기하던 통솔 직원이 데스크로 안내했고 아경은 직원으로부터 주의사항과 안내 사항을 듣기 시작했다. 이전에 청약을 했을 때보다 복잡해지고 까다로운 절차에 정신을 겨우 차려가며 안내를 듣고 서류에 사인하기 시작했다. 후에 처리해야 할 서류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예치금을 넣어야 한다는 설명에 아경은 곧바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은 청약이 되었다는 사실에 흥분하며 계좌로 돈을 넣어주겠다 하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통장에 돈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입금 내역을 확인하자마자 예치금을 송금하고 계약서 작성을 완료했다. 그렇게 3시간의 기다림 끝에 아경은 청약으로 아파트를 구입하는데 성공했다. 빈손으로 갔던 것이 무색하게 여러 서류들을 품에 앉고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아경은 서류를 빈 조수석에 던져 놓으며 얼떨떨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운전대를 붙잡았다. 그렇게 부동산이 곧 재산인 시대에 아경은 청약에 성공했다. 역시 로또보다 청약이다.
sti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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