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막연하게 책을 더 깊이 읽고 싶은 마음에서 번역을 시작했다.
2024년 2월 첫째 주: 5호
안녕하세요. 이예은입니다.

매주 인사드리던 정민호가 아닌 이예은이라니, 누군지 궁금하시죠? (궁금해해 주세요…) 구독자님들은 모르셨겠지만, 사실 저는 매주 이 공간에서 여러분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일러스트로요. 오늘은 글로 인사를 드립니다. 한 주 동안 잘 지내셨나요?

저는 최근에 퇴사를 했습니다. 전과 다르게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이 시간을 아무렇게나 채우고 싶지 않아서,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해서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웬걸요. 한자리에 앉아 가만히 책을 들여다보는 일이 이렇게 어려웠다니요. 그동안 바빠서 못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책을 보다 중간중간 자꾸만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 그런 제 모습이 너무 싫었어요. 핑계일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하기엔 제게 여유가 없달까요. 조금 슬프기도 했어요.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그저 눈앞에 보이는 일에만 집중하며 살다가, 바쁘고 바쁜 현대사회인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 같았거든요.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책에 좋은 것들이 있다고 믿습니다. 꾸준히 가방에 책을 넣고 다니고, 침대 옆 책장엔 많은 책이 꽂혀있습니다. 책은 제게 수많은 상상과 질문, 위로와 힘을 주었거든요. 계속 책 읽기에 도전할 겁니다. 열심히 읽다 보면 언젠가는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와 달리, 저만의 리듬으로 살아가게 되겠죠? 구독자님들에게 책은 어떤 의미인가요?

오늘도 책을 읽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내드립니다. 먼저 다른 언어의 글을 우리말로 옮기는 정다운 번역가님의 글입니다. 책을 만날 누군가를 생각하며 일하신다는 말이, 어쩌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번역가들의 고뇌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이어서 차보람 교수님의 《상처 입은 앎: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 다시 보기》(비아) 서평도 짧게 소개합니다. 링크를 타고 가면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복음과상황〉 종이 지면엔 소개되지 않은 글입니다.)

그리고 복음과상황 강동석 기자님의 글도 보내드립니다. 성경 해설에 관한 책의 연대기입니다.

오늘도 재밌게 읽어주세요!


번역에 대하여

정다운
  
“극단적으로 느린 독서”. 소설가 김영하가 필사에 대해 한 표현인데 ‘번역’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극단적으로 느린 독서’라고. 번역자는 일차적으로 독자이고, 번역은 기본적으로 좀 다른 형태의 ‘독서’이니까.

나는 막연하게 책을 더 깊이 읽고 싶은 마음에서 번역을 시작했다. 그런데 작은 책 몇 권을 번역하게 되면서, ‘이게 책을 더 깊이 읽는 방법이 맞나?’ 싶어졌다. 번역 과정은 종종 책을 ‘음미’하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번역을 통해 더 깊은 독서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기대는 깨졌다. 그리고 내가 기대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혹자가 저자와 나뿐인 세계로 들어가 천천히 저자와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면, 그런 내밀한 대화를 원한다면, 순수한 독자로 남는 것이 좋지 싶다. 번역하는 시간 대부분은 어딘가 구석에 박혀서 홀로 텍스트를 파고드는 일로 채워지지만, 번역은 엄밀하게는 ‘혼자’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번역은 근본적으로 ‘같이’ 읽는 일이다. 내가 번역한 글은 결국 그 글을 읽을 독자를 위한 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나는 번역 과정 내내 독자를 의식한다. 명시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텍스트의 의미가 잘 전달되고 있는지, 오해의 여지는 없을지, (두 언어의 간극에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의미의 탈락과 왜곡 같은 것을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을지 같은 고민들. 그런 고민들은 나를 위한 것, 나의 독서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나 혼자 읽고 말 것이면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이해했으면(혹은 무언가를 느꼈으면) 그것으로 끝일 테고, 그 문장이 어떻게 전달될지 고민할 이유가 없다. 홀로 하는 독서에는 그런 과정이 없다. 책을 잘 ‘음미’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나와 저자 사이에 독자가 끼어든다는 뜻. 나 혼자 읽을 때는 하지 않아도 되었던 고민을 하는 데 에너지를 써야 한다는 뜻. 이 책을 만날 누군가를 계속해서 생각한다는 뜻. 그리고 이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 때문에 이제는 계속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번역을 이어가게 된다. 번역에는 보르헤스가 말한 의미에서의 ‘쾌락 독서’와는 다른 즐거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보람이 있다.
물론 일(번역)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르고, 책임이란 그 태생이 무거운 것이다. 무게를 감당하는 일이 마냥 즐겁기만 할 수는 없다. 아마도 자신의 즐거움이 ‘일’이 된 이들 모두가 어느 정도는 그런 경험을 할 것이다. 더 이상 순수하게 그 일을 ‘즐기기만’ 할 수는 없는 경험.

번역을 하면서 나는 전에 누렸던 쾌락을 일부 반납한다. 하지만 내가 반납한 쾌락은 아마 또 다른 누군가의 즐거움으로 흘러들 것이다. 그리고 그 기꺼운 ‘쾌락의 반납’은 (분명히!) 나 홀로 쾌락을 간직하는 일보다 더 멋진 일이다. 그렇게 즐거움의 순환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번역을 이어간다.

정다운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번역을 한다. 서로 다른 두 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에 관심이 있다.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십자가》 《신학자의 기도》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 《오라, 주님의 식탁으로》 등을 옮겼다. 팟캐스트 〈슬기로운 독서생활〉에 참여하고 있다. 〈복음과상황〉에 ‘질문의 시간: ‘사이’에서 묻다’를 연재하고 있다.


은혜는 상처를 타고 온다

차보람

  

2023년 9월 케임브리지 대학교 옛 신학부 건물에서 열린 로완 윌리엄스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은퇴 기념 학술 대회에 참석했을 때, 내 가방에는 그가 맡은 첫 번째 강의인 그리스도교 영성사를 펴낸 첫 번째 책 《상처 입은 앎: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 다시 보기》(비아, 2023)가 담겨있었다.

한 신학자의 은퇴를 기념하는 학술 대회에 그가 40여 년 전에 낸 첫 번째 책을 들고 참석하는 감회는 남달랐다. 학부생 윌리엄스가 속해있던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머물며 그와 그의 동료들이 도널드 맥키넌의 난해한 강의를 듣던 강의실에서 그의 퇴임을 기념하는 여러 논문을 경청하는 일정은 나에게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경험을 선사해주었다. 학술 대회 일정을 마친 후에는 그가 두 번째로 그리스도교 영성사 강의를 했던 케임브리지 웨스트 코트 하우스 교정을 부학장의 안내로 둘러보았다. 채플의 문을 여는 순간 제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안수를 받으며 부제로 서품을 받는 27세 청년 윌리엄스가 보이는 듯했다.
《상처 입은 앎》 초판이 출간된 해는 그로부터 2년 후, 즉 29세 때다. 신학자요 성직자로 첫걸음을 내딛던 청년 로완, 그리고 이제는 주교직과 학장직에서 내려와 삶을 뒤돌아보는 로완, 놀랍게도 이 반세기 간격은 일관된 사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미 《상처 입은 앎》에는 일생을 거쳐 변함없이 흐르는 그의 사상의 핵심이 분명하게 드러나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수난, 부활이 인간과 세계에 던지는 기이하고 낯선 질문에 끊임없이 자기를 내어 맡기며 신적 언어의 대화 속에서 인간의 언어를 정화하고 회복하는 여정, 청년 로완에게는 이것이 고전 그리스도교 영성의 정수였고 노년의 그에게도 여전히 그러하다. 우연적이고 역사적이며 물질적인 창조세계의 질서 안으로 하느님이 인간으로 드러나셨다는 당혹스러운 사실, 그리고 바로 그분께서 죽음의 어둠 가운데서 부활을 통해 자신의 초월성을 알리셨다는 기이한 사실, 이 사실과 끊임없이 마주하며 그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 세대를 거듭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공동체가 그리스도 교회이다.


차보람
대학에서 물리학·철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성공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현재 성공회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친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의 《바다의 문들》(비아), 한스 부어스마의 《신학자가 성서학자에게 바라는 다섯 가지》(IVP)를 한국어로 옮겼다.


나의 해설 성경 연대기

강동석

  

※ 〈복음과상황〉 399호(2024년 2월)에 실린 에디터가 고른 책 ‘《IVP 성경연구주석 구약: 오경·역사서·시가서》 내겐 고마운 단권 주석’을 대폭 확장한 글이다.

내가 처음 접한 단권 해설 성경은 고등학생 때 중고등부 선생님에게 받은 《레노바레성경》(두란노)이었다. 막 회심해서 해설 없는 성경(교회 이름이 박힌 통일 찬송가 합본 개역개정판)을 막무가내로 읽기만 하던 내게 선물로 주셨다. 가죽 느낌이 나는 장정에 본문 속 간간이 섞인 옅은 보라색 글씨가 마음을 온화하게 만들었다. 신자의 영성 함양을 강조한 해설을 만날 수 있어 초심자 묵상용으로 제격이었다. 지금까지도 들춰보는 저자인 유진 피터슨, 월터 브루그만을 이 해설 성경 집필진으로 처음 만났다.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지만, 기도로 이끄는 본문 해설이 담겨있었던 것 같다. 찬양을 틀어놓고 성경을 읽다 자연스레 그 자리에서 기도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아주 훌륭한 해설 성경이라고 느끼진 못했다. 다만, 선물을 주신 선생님 모습이 기억에 선하다.

선생님은 은행에 다니는 30대 중반 워킹맘이었다. 이혼하고 난 뒤 두 딸을 키우며 교회에 출석했다. 선생님이 아동부를 다니는 장난 많은 두 딸을 호되게 꾸짖던 장면과 기도회 시간에 눈물을 흘리시며 통성기도하던 장면을 몇 차례 목격해서인지, 사연이 있겠거니 싶었다. 교회 내 은근한 수군거림이 그분 주변을 맴돌았던 기억도 있다.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마음 씀에 깊이 감사했다. 공과 교재가 따로 있는데도 ‘청소년을 위한 큐티 매거진’ 〈새벽나라 sena〉(두란노) 2년 치 구독권을 끊어주셨다. 대학 시절 다른 교회 중고등부 교사를 맡아 아이들과 2년 정도 즐겁게 보내고, 10년쯤 지나 지금 다니는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이 임명하셔서 자리를 지키는 형태로 2년째 중고등부 교사를 해온 입장에서 이때를 떠올려보면, 한 학생을 위해 결코 쉬운 노력은 아니었다.

말씀 연구에 갈증을 느껴 처음으로 직접 구입한 해설 성경은 《프리셉트성경》(프리셉트)이었다. 그때까지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애실 사모의 《어? 성경이 읽어지네!》(두란노), 노우호 목사의 《성경통독집》(하나)을 가이드로 삼았다. 《어? 성경이 읽어지네!》는 관련서를 찾다가 발견해서 구입한 책이었고, 《성경통독집》은 노우호 목사가 운영하는 에스라하우스를 자주 방문하는 집사님 한 분이 계셨기 때문에 소개받은 책이었다. 이와 더불어, 중고등부 담당 부목사님이 성경 본문 전체를 A4에 큰 글씨로 뽑아 연대기순으로 재배열하여 손수 제본해 선물로 준 성경책이나 당시 교회에서 성경 통독을 가장 많이 했던 안수집사님(약국을 운영하셨다)과 목사님이 통독을 위한 길잡이 정보를 엮어 만든 가이드북을 살폈더랬다. 열심히 읽지는 못했지만, 도움은 받았다.

대학 시절 꾸준히 활용한 《프리셉트성경》은 귀납적 연구를 추구하며 본문 핵심 단어가 원어로 무엇을 뜻하는지 간략히 밝히고, 너른 여백을 두어 필기하도록 만든 해설 성경이었다. 스스로 읽고 해석하는 습관을 갖는 데 도움을 줬다. 문제는 원어 뜻만 들여다봐서, 점차 영해(靈解)의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데 재미를 들이게 됐다는 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방식에 한계를 느꼈다. 기숙사 룸메이트 신학생에게 빌린 권별 성경 주석 내용을 여백에 빼곡히 필기하며 참고하기 시작했다.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등 이단·사이비가 급성장하여 본격적으로 활개 치던 시절이라, 특히 요한계시록을 여러 번 정독했다. 이필찬 교수의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하 성서유니온선교회)로 해석의 큰그림을 잡았고,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 주석 내용을 정리했다.

무엇보다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맘에 들어 한동안 성서유니온선교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시리즈 읽기를 이어갔다. 추후 일부 저자가 표절 논란에 휩싸였지만, 그건 몇 년 뒤의 일이었다. 뒤늦게 고든 D. 피와 더글라스 스튜어트가 쓴 이 분야 스테디셀러인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책별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접했다. 성경 해석을 둘러싼 논점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받으면서 곧잘 들춰봤던 기억이 난다. 양용의 교수가 집필한 《마가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권연경 교수가 집필한 《고린도전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등도 좋았다. 난해한 구절을 읽을 때 도움이 컸다. 성경 66권 전체를 ‘한 권’으로만 봐왔던 그동안의 익숙한 관점에서 벗어나, 각 권을 전체 구조와 더불어 구절별로 깊이 보는 법에 대해 숙고해본 게 수확이었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 시리즈는 특히 한국 저자가 성경 본문을 사역(私譯)한 시도가 신선했다. 지나치게 학문성만 추구하지 않고, 어느 정도 일반 교인까지 염두에 둔 책으로 읽혔다. 홍성사에서 내놓은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도 저자 사역을 담고 있지만, 당시엔 출간되지 않았었다. 유진 피터슨 ‘메시지 성경’도 《메시지 신약》(복있는사람)까지만 번역 출간된 상황이었고, 권별 주석은 죄다 번역서였으니 꽤 앞선 작업이었달까. 시행착오 끝에 성경 읽기에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해설 성경은 《관주·해설 성경전서》(대한성서공회) 개역개정판이었다. 독일성서공회 해설이 번역돼 실렸는데, ‘벨하우젠 문서가설’을 처음 진지하게 눈여겨봤다. 아주 보수적인 신앙 서적만 읽어온 탓에, 비평적 관점이 신선했다. 맥락을 짚어주는 해설은 친절하고 꽤나 자세했다.

《관주·해설 성경전서》은 《프리셉트성경》과 함께 대학 시절 내내 붙들었던 해설 성경이었다. 당시 다니던 교회에는 《톰슨Ⅱ 성경주석》(기독지혜사, 2016년 Ⅲ까지 출간)도 굴러다녔다. 개혁주의 관점에서 상세히 해설한 ‘톰슨 주석’의 명성을 교회 형들을 통해 들어온 터라 종종 눈길을 줬다. 그 뒤 《새성경사전》(CLC), 《손에 잡히는 성경 지도》(부흥과개혁사) 등 참고서를 곁에 두고, 아는 이들에게 추천받아 유명 저자들이 쓴 권별 주석을 필요할 때 사서 봤더랬다. 성경과 함께 들여다보며 공부다운 공부를 하는 듯한 감상이 좋았지만, 때때로 지나치게 학문적인 풀이에 집착했다. 성경을 읽어놓고 정작 묵상 너머 실천까지 이어지지 않는 우를 범하기 십상이었다. 일반 교인의 눈으로 봤을 때, 잘 만든 해설 성경이나 단권 주석만 한 물건이 없음을 깨닫고 있다.

나는 지금 다니는 교회에서 중고등부와 청년부 교사로 참여하게 된 후, 말씀 묵상 및 나눔을 위해 가끔 단권 주석을 살피곤 했다. 이때 전자책으로 낱권씩 나온 ‘IVP 성경연구주석’ 시리즈 신약(단권은 《IVP 성경비평주석 신약》(IVP)으로 출간, 구약 2권 중 1권이 나오면서 제목을 바꾸어 다시 출간할 예정)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소개 글에서 내세우듯 신구약 전체와 각 권을 읽을 때 ‘숲’과 ‘나무’ 둘 다 보게 한다. 구약 중 ‘오경·역사서·시가서’가 최근 출간되었고, ‘예언서·구약 외경·위경’도 머잖아 한국어로 나올 것 같다. 포괄적 시선에서 성경 전체와 각 권 흐름을 차분히 보도록 이끌면서, 실제 내용은 물론 비평적 관점까지 압축적으로 명료하게 훑는다. 개별 의미를 지나칠 정도로 파헤치지도 않는다. 얽힌 논점들 사이를 헤매지 않는 ‘과하지 않음’이 맘에 든다.

시간 여유가 있을 때는 단권 주석이나 해설 성경과 함께 목회적 주석서나 IVP에서 개정판을 내놓는 ‘BST 성경 강해’ 시리즈도 같이 읽었다. 과거엔 ‘매튜헨리주석’을 꽤나 선호했지만, 이제 그 자리는 ‘현대성서주석’ 시리즈가 차지하고 있다. 번역서이고 나온 지 오래됐지만 ‘현대성서주석’ 시리즈는 학술적 시선에 천착하지 않아 일반 교인의 눈으로 봐도 부담스럽지 않다. 문제는 번역의 질. 어느 정도 참고 보면, 말씀 사역을 위한 교육 자료로서 실제적 주석을 추구한다는 취지가 잘 드러난다. 문학적 읽기가 돋보이는 주석도 일부 있어서 만족스럽다. 이 시리즈에 속한 내가 애정하는 책은 월터 브루그만이 작업한 《창세기》·《사무엘상·하》(한국장로교출판사)이다. 지금은 유튜브로 좋은 성경 강의도 찾을 수 있고, 인터넷에 괜찮은 자료가 많아 굳이 책만 읽진 않는다.

그러고 보니, 내가 구입한 해설 성경 중 가장 비싼 책은 《ESV 스터디 바이블》(부흥과개혁사)이다. 11만 원. 10% 할인받아 9만 9천 원에 샀다. 당시 내로라하는 한국의 보수적인 목회자들과 교수들이 이 스터디 바이블에 대한 추천사를 썼다. 리뷰를 찾아보면, 오타나 오자도 적지 않고 성경 본문이 ESV 번역도 아닐뿐더러 광고가 과장된 면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게 이 해설 성경은 비운의 책이다. 큰맘 먹고 샀지만, 본격적으로 활용하기도 전에 취업해서 부산에 버려둔 채 서울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이 책을 낸 부흥과개혁사는 한국 개혁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출판사로, 나도 한때 기백만 원을 이곳에 바쳤다. 한국 개혁주의가 가진 한계를 느끼면서 시들해져, 이 해설 성경을 다시 읽는 일은 없었다. 결국 부산 집에 있던 수백 권의 책과 함께 중고서점에 넘어갔다.
현재는 성경을 읽을 때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대한성서공회) 특대 사이즈 개역개정판과 해설 없는 새번역성경을 본다. 가끔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을 대한성서공회 사이트에서 참고하기도 한다. 이렇게 썼지만, 성경을 막 열심히 읽진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보는 편이다. 이 중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은 대한성서공회가 내놓았던 《관주·해설 성경전서》에 대한 인상이 좋아서 2021년 출간 당시 광고를 보고 샀다. 스위스 취리히 개혁교회가 2010년 펴낸 성경 안내서 중 대부분 내용을 한국 상황에 맞게 편역한 것이다. 업데이트 차원에서 샀으나 만족도는 떨어진다. 뒤편의 글자가 비칠 정도로 종이가 얇은 탓에 오래 읽기 불편하고 힘들다. 해설이 《관주·해설 성경전서》보다 간소해졌다는 인상도 받는다. 물론 통독 및 공과 참고용으론 충분하다.

그 외에 김근주·권연경 교수의 해제가 담긴 봄이다프로젝트 ‘Bible in Hand 교양인의 성경’ 시리즈 낱권을 필요할 때마다 들고 다닌다. 각 권 제목도 멋지고(《세상의 모든 처음: 창세기》·《마음의 끝에서 부르는 새 노래: 시편》·《검은 현실을 부수는 빛의 소리: 요한복음》·《벼랑 끝 인생에게 주는 생존방정식: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등), 디자인이 우아해서 모양새가 난다. 전반적으로 담백한 해제가 돋보여 묵상용으로도 딱 맞다. 시리즈 책을 거의 다 갖춰서 한쪽에 보관하다가, 다른 책들을 대거 정리할 때 같이 처분했었다. 성경책은 이미 여러 권 있으니까. 그런데 최근 진가를 재확인하며 다시 모으는 중이다. 무슨 ‘뻘짓’인가. 한 권씩 들고 정독하기에 이만한 성경책을 못 찾았다. 시간이 없으면, 권별로 초입에 나오는 성경 개관만 읽어도 은혜롭다.

신약을 읽을 때만 참고하는 해설 성경이 또 있는데,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 금장본이다. 2022년 61% 할인을 받아 중고서점에서 36,600원 주고 샀다(원가 95,000원). 1,400쪽이지만 그동안 구입한 해설 성경 중 가장 크고 무겁다. 인터넷 서점 서지 사항을 보면 《ESV 스터디 바이블》이 2,838쪽에 163×233mm 1,995g이고,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가 195×278mm 2,660g이다. 사무실 책장 한구석에 보관하면서 부분부분 필요할 때 핸드폰으로 찍어둔다. 펼쳐놓고 읽기엔 두께와 무게가 심히 부담스럽기 때문. 개신교인으로서는 참신하고 낯설게 다가오는 본문(가톨릭 쪽 성서학자들이 12년간 36번 독회하며 직접 번역했고, 다소 학문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해제와 주석을 담았다)이 흥미롭다. 자고로 성경책이란 거듭 낯설게 읽어야 하는 법이다.

강동석
〈복음과상황〉에서 글을 받고 고치는 일을 주로 한다. 그전에는 〈뉴스앤조이〉 편집기자로 일했다.

선율 출판사 이재원 대표님이 〈서사의 서사〉를 응원하며, 선율의 책(《과학자의 신앙공부》, 《닮은 듯 다른 우리》, 《생물학자의 신앙고백》)을 50권이나 찬조해 주셨습니다. 구독자님들에게 선물로 드립니다. 피드백을 남겨주신 분들에게 책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래 뉴스레터 피드백을 꼭 남겨주셔야 합니다.)
우리네 신앙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주는 과학자 김영웅 박사님이 집필한  종의 책입니다.


지난 호 의견💌

🗣️ “매주 보내 주시는 글을 잘 읽고 있습니다. 특히나 메일로 받아서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바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서사의 서사〉의 큰 강점 같습니다. 그럼에도 가볍지 않고 생각할 거리를 안겨 주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특히나 이번 면지에 대한 글을 좋네요. 사실 우연한 기회로 8 가까이 출판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교정 교열만 외주로 하다 보니 전체 출판 과정을 몰라 궁금해하던 차였는데, 보내 주시는 , 특히 이재원 대표님의 글을 읽으며 호기심을 채우고 있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범진 편집장님의 글을 보면서는 편집장님이 사인을 바라보는 관점에 동의가 되기도 하고, 저는 어떠한 마음으로 사인을 하고 있나 생각하게 되기도 하네요.

🗣️ “책을 펼치면 처음 만나게 되는 친구의 이름이 면지라는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게 수많은 면지를 만났음에도 이름이 뭔지 거기에 있는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느 때에 잠시 관심 가졌다가 이내 익숙해져서 신경조차 쓰지 않았는데 면지라는 이름을 알게 되니 왠지 애틋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스무 면지를 활용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름을 몰랐던 녀석에 책을 구입한 날짜를 적거나 책을 읽었던 날짜를 적고 별로 쓸모가 없었던 중학교 시절에 만들었던 사인을 것이다. 누가 그랬던 것을 흉내를 것인지 없지만 남이 책에 사인을 남기고 그날을 기록했다고 하니 새삼 이불킥을 해야 같다. 어쨌든 서사의 서사를 통해 면지라는 이름을 불러 내게로 꽃이 되었긴 한데 환경위기 시대에 불필요한 면지도 없어져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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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강동석 | 일러스트 이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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