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커피 타는 여직원’···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리다

김보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책임연구원
[그럼에도, #미투]③‘커피 타는 여직원’···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리다

연일 성폭력 피해자들의 말하기가 대서특필되고 있다. 성폭력이 이렇게나 일상적이고, 조직적이고, 만연한 ‘보통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누군가는 법과 제도를 점검하고, 누군가는 대책위원회를 꾸려 힘을 모으고, 누군가는 피해자의 손을 잡고 이제부터 시작될 거센 파도 위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중이다. 또 우리 모두는 분주하게 나와 주변을 돌아보고, 사과하고, 문제제기하면서 내가 있는 공동체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 내에서 성폭력 사건을 처리하고, 고민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 글은 미투운동이 좀 더 세밀하고 단단하게 확장되기를 바라면서, 공동체 내 성폭력 사건 발생 시 겪을 수 있는 상황과 고민을 나누기 위해 작성됐다.

김상민 기자

김상민 기자

■공동체내 성폭력 사건처리는 왜 필요한가

일회용 커피믹스는 수많은 ‘미쓰김’들이 더 이상 커피를 타지 않게 되면서 대히트를 쳤다는 누군가의 말은 사실일 것 같다. 한 블로거는 “IMF로 인한 구조조정 때문에 ‘커피타는 여직원’이 사라졌고, 부장, 차장, 팀장, 과장님들이 직접 커피를 타 마셔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사무실에 비치된 커피믹스가 증가했다”고 말한다.

1993년 서울대 신교수 성희롱 사건이 발생하면서 한국에서는 ‘성희롱(sexual harassment)’이라는 개념이 명문화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도 직장과 대학 등에서 발생하는 성적 괴롭힘은 매우 일상적이었다. 법적 용어로 ‘강간’과 ‘강제추행’에 해당되지는 않았지만, 여성들은 여성차별과 혐오를 오가는 언어적 희롱과 업무상 차별들을 겪어내야 했다.

이후 이러한 문화를 개선하고자 양성평등기본법, 남녀고용평등과일가족양립지원에관한법률 등에 성희롱의 사건 처리와 예방 지침이 명시됐다. 대학내 여학생들의 반성폭력자치규약운동도 공동체 내 사건 처리의 의미를 강조하는 흐름에 기여했다. 이러한 흐름은 공동체 내 성폭력이 ‘괴물화’된 가해자 개인과 ‘불운한’ 피해자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문화의 문제이고, 공동체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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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왜 좌절하는가… 사건 처리시의 고민들

공동체는 직장, 운동사회, 정당, 대학 내 학생회/동아리/소모임 등, 취미나 친목 모임, 영화계, 연극계, 종교계 등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범주를 포함한다. 개개인에겐 각자가 속해 있는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 기대, 위치 등에 따라 공동체의 의미는 다를 수 있다. 현재 대부분의 민간사업장과 공공기관, 교육기관, 공직유관단체 등은 성희롱 예방과 처리에 대한 지침을 가지고 있고, 운동사회, 정당, 대학 안/팎의 소모임에서는 각 공동체의 특성에 맞춰 성평등 내규나 처리 규칙 등을 만들어 적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막상 피해를 공동체에서 해결하려 하면 ‘믿을 만한’ 조사를 통해 결과를 도출하고, 해결 과정에서 피해자·가해자·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만족하기가 어렵다.

첫째, 피해자의 요구/욕구와 공동체 내 사건해결 역량의 불일치

피해자는 가해자의 사회적 지위가 계속 유지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추측과 분노,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공동체에 공식적 해결과정을 의뢰한다. 하지만 피해자의 기대에 비해 공동체는 너무 불안전하고, 감수성의 격차는 크며, 기초적인 매뉴얼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용기를 내 문제제기를 했음에도 왜 공동체는 바뀌지 않는지, 왜 지나치게 개인화되거나 혹은 지나치게 공론화되는지, 가해자나 공동체의 대책없는 궁금증과 조언, 무능함이 어떻게 피해자를 무력화시키는지에 대한 호소는 때때로 ‘2차 피해’라는 용어로 설명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얽힌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칫하면 ‘성폭력 피해’라는 본래의 문제보다 주변인, 조직과의 갈등으로 마무리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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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사건해결 과정에 대해 피해자가 상상할 수 있는 ‘나침반’의 부족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2011년 발행한 <보통의 경험>은 성폭력 사건 발생 후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피해자의 건강 상태, 피해 정도, 피해 상황 등을 검토해 다양한 나침반을 탐색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신고 외에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나와 주변인의 상황은 어떠한지 등에 대한 고려 없이 사건을 처리하려 하면 오히려 추가 피해가 발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피해를 입었을 때, 어디에 신고하라는 것 외에 어떤 선택지들이 있고 가장 먼저 피해자 자신을 돌보기 위해서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지, 선택지들은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전달은 부족한 점이 많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향신문 자료사진

셋째, 수동적 존재로만 인식되는 ‘피해자다운 피해자’에 대한 편견

때때로 피해자는 피해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고통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빠진다. 이때 의료적으로 ‘진단’되지 않거나 못하는 피해자의 고통은 삭제되기 때문에,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스스로 검열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동의·저항의 정도와 평소 관계, 피해의 정도, 바로 신고하지 못한 것 등이다.

피해자라는 ‘정체성’은 피해자가 처해있는 특별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는 모순적인 정체성이다. 피해자들은 오늘은 힘들지만, 내일은 참을 만하고, 모레는 또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또 한동안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은 다양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답지 않은 피해자’의 행동, 예를 들어 적극적인 투쟁, 긍정적인 태도, 주체적인 모습 등은 ‘진짜 피해자’임을 의심받는 빌미가 되고, 전형적인 편견 속에 갇혀 버린다. 단일한 경험으로 상정되는 ‘피해자다운 피해자’에 대한 편견은 피해자들 간의 차이를 없애며 피해 경험을 타자화한다. 이때, 피해자의 피해경험은 ‘내 것’이 아닌, ‘전시’하고 ‘증명’ 받아야 할 어떤 것이 돼버리면서, 치유 과정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여자 직원과는 말도 못하겠다”

미투에 대한 ‘백래시’도 한창이다. “여자 직원과 말도 못 하겠다” “미투 당할까 여성과는 접촉을 최소화해야겠다”는 등의 이른바 ‘펜스룰’ 현상도 힘을 얻고 있다. 앞서 말한 서울대 신교수 성희롱 사건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3000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걸자, 한동안 “여직원과 손잡으면 3000만원”이라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떠돌았던 때를 생각하면, 이런 반응은 새롭지 않다.

얼마 전 실태조사를 진행했던 한 직장에서 남자 직원들 여러 명이 “우리는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 부장님이 여직원들은 말이 많으니까 일을 안 시키고 우리에게만 시킨다. 여직원은 여자친구 대하듯이 대해 줘야 한다”며 푸념했다. 하지만 동료가 아닌 ‘여자친구 대하듯이’ 대하고, 주요 업무에 배제시켜 결국에는 업무상 승진과 성과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방식은 그간 남성중심조직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구조적’ 차별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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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백래시’나 ‘펜스룰’은 ‘성폭력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란 식으로 자신의 굳건한 자리를 지키려는 방식이다. “무서워서 말 못 하겠다”는 전형적인 강자의 감정이다. 학생들이 “요즘 선생님들하고는 말을 못하겠다”라거나, 신입사원이 “요즘 사장님들하고는 말도 못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즉 “무서워서 말 못하겠다”는 그간 누려오던 것을 잃게 된 강자의 입장에서 행하는 ‘반성찰적 비아냥’에 다름 아니다. 진짜 무서운 사람은 그런 언행을 하지 못한다.

이러한 반성찰적 비아냥의 핵심에는 ‘두려움’이 있다. 나도 문제제기당할까봐, 나도 ‘실수’한 게 있을까봐, 나는 저 가해자들과는 다른데, 요즘 여자들은 너무 드세서 이기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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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반성폭력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은?

공동체는 때때로 갈등에 취약하고, 구성원들이 감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인권감수성 없는 공동체에서 성폭력 감수성만 높기는 어렵다. 갈등해결과 소통체계, 인권에 대한 훈련이 평상시에 되어 있어야 성폭력이 발생했을 시 추가적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모든 공동체에서 상황에 맞는 기본적인 내규와 매뉴얼을 마련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매뉴얼이나 실무적 완벽함보다 피해자와의 소통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 또한 사건 처리를 시작할 때 피해자와 처리 절차나 소요 기간 등 사건 처리 과정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더불어 가해자 성찰 및 재발방지, 공동체 문화 쇄신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과 이를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담당자도 있어야 한다.

담당자를 정한 뒤엔 사건 처리 과정에서 피해자가 추가적 피해에 노출되지 않게끔 하기 위해 사건 지원자, 실무 진행자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 내용에는 공공적 해결의 위상과 실무, 한계, 피해자와의 파트너십, 가해자에 대한 교섭/설득력 확보가 포함돼야 하고, 시뮬레이션 등으로 사전 준비를 갖추는 것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고통에만 빠져있는 피해자’가 아닌 ‘역량이 강화될 수 있는 주체’로서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각을 갖춰야 한다. 이는 피해자만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과 문화가 조성되어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김상민 기자.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상민 기자. 경향신문 자료사진

■공동체 내 문화를 바꾸기 위해 체크해볼 것들!

- 공동체 내 여성 및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인 분위기는 없는지?

- 평상시 갈등 상황 해결에 대한 훈련과 소통구조가 있는지?

- 문제 제기를 받았을 때,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지?

- 내가 가진 권력, 권위에 대해 성찰하고 나눌 수 있는 문화가 조성돼 있는지?

- 성폭력은 특별한 사람에게 발생하는 불운한 일이 아니라 이를 방조하고 비호해온 남성 중심적 법, 인식, 문화적 구조에서 비롯된다는 것에 공감하는지?

- 신고와 처리를 할 수 있도록 우리 공동체의 특성에 맞는 내부 규칙이 있는지?

- 전형적인 ‘피해자다움’, ‘가해자다움’에 대한 편견은 없는지?

-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 공동체에서 하나씩 논의를 통해 만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

성폭력 사건 해결은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신뢰를 통해 가능하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왜곡하지 않고, 듣고, 성찰하고, 변화해 갈 수 있는 힘은 그 신뢰를 바탕으로 생겨난다. 따라서 ‘공동체 내’ 성폭력 사건 처리의 문제는 단지 ‘가해자 척결’이 아닌 공동체 내 ‘공유된 책임’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완벽한’ 성폭력 사건처리는 사실상 지향점일 뿐이다. ‘너’의 문제를 도와주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충분한 마음과 시간을 들여,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이는가의 문제다. 이제 우리 공동체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또 다른 ‘ME TOO 운동’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가늠해보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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