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여름이 이르게 왔다'라고 쓰려다 보니 작년에도 그렇게 생각했더라고요. 여름은 늘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불쑥 찾아오는 것 같아요. (지구온난화의 영향이기도 하겠지만은...) 이번에는 3주간 유럽에서 시간을 보내고 왔더니 더 갑자기 여름이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번 여행은 동선이 굉장히 엉망진창이었는데요, 사전에 고려라곤 하지 않고 지인들이 오라고 하는데 다 가겠다고 해놓고 보니 일정이 굉장히 꼬여서 😂 코트를 입어야 하는 4월의 베를린부터 비키니를 입고 바다에 들어가도 되는 5월의 카프리까지 경험했어요. 그리고 한국에 왔더니 갑자기 한여름 날씨였던 것이죠. "입을 옷이 없다"를 연발하며 여름맞이를 후다닥 시작했습니다. 

일단 겨울 이불에서 여름 이불로 전격 변경했구요, 에어컨 필터 청소도 했습니다. 오랜만에 돌아와서 집도 좀 쓸고 닦았고요. 3년 있다 들어온 것도 아닌데 먹고싶은 한국 음식이 얼마나 많았는지. 트레이너랑 이제 식단 하기로 해놓고는, 먹고싶은 것들을 하나씩 먹느라 식단은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가장 먹고싶었던건...역시 콩국수랄까요? 저는 진짜 콩국수를 너무 좋아하거든요. 콩국수에 오이소박이를 먹는 상상을 하면서 18시간동안 비행기에서 구겨진 상태로 버틸 수 있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오자마자 친구랑 진주회관 약속을 잡아놓았습니다. 진주회관에 늘 혼자 갔어서 콩국수만 먹었는데, 김치볶음밥이 진짜 맛있다는걸 이번에 알았어요. 각 콩국수 한그릇에 김볶까지 먹어줘야...진정한 진주회관을 맛본 것이구나....콩국수만 알았던 제 세계는 이렇게 좁았구나....

콩국수 한 그릇 먹으면서 감성이 과하다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요 여러분, 나의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은 정말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거더라구요. 저는 그 순간이 너무 짜릿하고 좋아요. 내가 아는건 세상의 아주 작은 조각이구나, 그 조각 밖에 있는 것들을 조금씩 더 볼 수 있게 되는 순간! 그게 그냥 갑자기 생겨서 내 눈에 보이는게 아니잖아요. 원래 있었는데도 보지 못했던 것들을 내가 보려고 노력했다거나, 내가 더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거나, 아니면 용기가 생겼을 때가 되어서야 보이는거니까요. 시야가 넓어져서 내가 성장하게 되는게 아니라, 내가 성장했기 때문에 시야가 넓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또 tmi타임을....이 버릇은 평생 갈거에요....^^ 그나저나 콩국수를 클리어하고 나니까, 다음은 이제 비빔국수가 땡기는더라고요. 여름이불로 갈고, 선풍기도 꺼낸 김에 오늘 점심 메뉴는 비빔국수를! 하고 생각했는데, 그 때 아파트에서 방송이 나왔습니다.

 전기 없이도 비빔국수는 할 수 있죠, 부르스타를 쓰면 되니까. 그래서 부르스타를 세팅하고! 당당하게 냄비에 물을 담으려고 수도꼭지를 튼 순간!

물이 안나옵니다....정전이 되면 물도 안나온다는 것을.....30대가 되어서야 처음 안 바보....ㅠㅠㅠㅠㅠㅠ 원래 물 끓이는 사이에 샤워를 하고 시원하게 비빔국수 한사발을 하려고 했거든요? 근데 세상에 물이 안나와....계획이 다 틀어졌습니다. 하지만 제가 멍청한 탓이라 할 말이 없었어....결국 저대로 다 두고....다시 누웠어요.

정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선풍기를 켰는데! 맞다 정전이지.

아 그냥 배달시켜먹을까? 맞다 정전이라 엘베도 운행 안하지.

티비나 보자ㅠ 맞다 정전이지

일이나 하자ㅠ 아 와이파이도 안되지

이런 끝없는 바보 인증을 했답니다. 전기의 소중함을 깨달은 하루였네요....

그래요 드디어 비빔국수를 만들 수 있게 됐어요. 그 전에 샤워부터 후다닥 하고 왔습니다. 전기 공사가 생각보다 오래걸려서 물이 나오자마자 달려가서 샤워를 했어요. 근데 여러분 정전된 후에 갑자기 전기가 들어오니까 온갖 기계가 동시에 "안녕하세요!" "쿠쿠입니다" "디리리링" 하고 울리는데 온 집안의 기계들이 막 떠들기 시작하니까 좀 아포칼립스물같더라고요 🙄

그게 중요한게 아니죠. 일단 달걀을 삶았습니다. 혼자 먹어도 달걀은 두개를 삶아야해요 달걀은 단백질이니까 (?) 보다도 그냥 제가 삶은 달걀을 정말 좋아하니까요. 아 저는 최근에 흰색달걀을 먹고 있어요. 다른 이유는 아니고 흰색 달걀을 동네에서 계속 할인하고 있더라고요.

전에 현대카드 쿠킹라이브러리의 달걀 전시를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달걀 껍질의 색은 닭의 색을 따라갈 뿐 맛이나 구성성분에는 차이를 주지 않는대요. 근데 한국에서는 흰색 달걀이 갈색 달걀보다 '뭔가 좀 모자랄 것 같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판매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하네요. 근데 먹어보면 맛에는 차이가 없지만, 흰색 달걀의 껍질이 갈색 달걀보다 확실히 더 두꺼워요. 그래서 더 잘 까진다고 해야하나? 그리고 일단 뽀얀 것이 귀여우니까 합격입니다 (?)

일단 달걀을 다 삶고 나서 국수도 삶았어요. 저는 집에 정말 다양한 국수를 챙겨두는데, 비빔국수에는 소면이나 중면이 좋더라고요. 오늘은 소면으로 했어요. 문제는 늘 국수 양 조절이 어렵다는 것인데....조금 적다 싶어서 몇 가닥 더 넣으면 국수가 아주 한 바가지가 나오고, 더 넣으면 넘치겠지 싶어서 그대로 하면 모자란단 말이죠. 국수 양은 정말 난제에요. 오늘은 어떨까요?  

잘 익은 묵은지를 꺼내 가위로 쪼샀습니다! 도마에 김치 물이 드는게 요즘따라 너무 싫어서 ㅠㅠㅠ 햇빛을 쬐면 없어지긴 하지만 뭔가 깔끔하게 지워지지 않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가능하면 가위로 해결하는 요즘입니다. 

그 다음에 고추장과 설탕, 다진마늘과 간장, 식초를 넣어서 잘 섞어요. 저는 요즘 집에서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고추장을 쓰고 있어요. 원래 요리에 설탕을 거의 넣는 편이 아닌데 시판 고추장에 비해 전통 고추장은 단맛이 확실히 적어서 요리마다 설탕을 더 넣어줘야 하더라고요. 들어가는 설탕의 양에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이렇게 넣었는데도 충분히 달지 않다니? 슈가보이 백선생님 말씀 중 틀린게 하나도 없네요.

양념을 잘 섞어놓고 나니까 소면이 다 익었더라고요. 과연 이번에는 정량을 맞췄을 것인가! 🥁🥁🥁🥁

  🚫 그럴리가요.....한강을 다 국수로 채울 수 있을만큼 삶았더라고요 또. 이번에는 느낌이 왔는데!! 분명히 느낌이 왔는데! ㅎㅏ 이미 삶은건 어쩔 수 없죠. 국수는 찬물에 3~5번 정도 잘 빨아서 체에 담아 물기를 뺐어요. 근데 사진에 있는 국수 양은 나쁘지 않지 않냐고요? 사진 밖에 한 줌 더 있었어요....앜핰핰 일단 양념의 양에 맞게 국수를 넣고 잘 무쳤습니다. 비빔국수는 손으로 무치는 것이 더 맛있지만, 오늘은 귀찮아서 젓가락으로 샥샥 비벼 해결했습니다. 

찬물에서 잘 식은 달걀도 까서 반으로 갈랐어요. 요즘 달걀 삶는 감이 좋아져서인지 딱 좋은 반숙이 되더라고요. 최근에 달걀을 한 10개 정도 삶았는데 대부분 그랬던 것을 보면 실력이 늘었는지도 🙄 달걀 노른자 위에 소금을 조금씩 뿌려 준비해둡니다. 그래야 간이 잘 맞아서 비리지 않더라고요.

국수를 그릇에 예쁘게 담고 베이비루콜라를 올렸습니다. 원래는 오이를 올리고 싶었는데, 정전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고 솔직히 나가기 귀찮았어요....그리고 이번주에 집 비울 일이 또 있었기 때문에 오이를 살 수가 없더라고요. 사도 다 쓸 재간이 없어서요. 휴 근데 오이가 없는 집에 루콜라는 왜 있냐고요?! 저도 그게 너무 어이가 없는데 ㅋㅋ 지난주에 미니 텃밭을 꾸리는 언니네 놀러갔다가 허브를 한가득 따왔거든요. 그래서 어떻게든 써야 했어요...

이제 먹어봐야지! 하고 젓가락을 들었다가 잊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습니다. 식초가 이미 들어가있지만 마지막에 레몬즙을 넣어서 향긋함을 살리면 더 좋거든요. 샐러드에 올리브오일 두르듯 오늘도 저의 사랑 레이지 레몬을 위에 살짝 둘러 마무리해줬습니다. 국수는 참 금방 먹게 돼요.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 새콤달콤한 비빔국수를 먹으니까 벌써 한여름인 것 같다는 착각도 들었습니다. 

소면 100g

묵은지 한 장

달걀 n개

소금 약간

🔴 양념

  

* 구독자님은 국수의 양을 잘 조절하시길 바라요......실패한 사람 드림...  

개인적으로 샘표 제품을 좋아하는 편이기는 한데요, 이 제품은 진짜진짜진짜 물건입니다. 팔도비빔면 비빔장도 맛있긴 한데 너무 달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근데 이 비빔장은 정말로!! 정말로 과하게 달지도 않으면서 무나 김치 같은 것을 갈아넣은 듯한 시원한 느낌이 있어요. 

마트에서 냉면 면만 산 다음에 이 비빔장에 비비면 완벽한 비빔국수가 되고요, 소면을 삶아서 이 비빔장을 짜넣고 참기름과 통깨, 약간의 레몬즙만 더하면 또 입맛이 싹 도는 비빔국수가 됩니다. 국수가 아니라 채썬 채소에 무쳐도 맛있어요. 상추나 양배추 같은 것들이요. 그래서 저희집에서 1년 내내 절대 떨어지지 않는 상품이지만, 여름에는 특히 빠르게 소진되기 때문에 최소 2~3개씩은 늘 쟁여놓는 편이에요. 

유일한 단점은 마트에 안판다는건데요,,,? 이마트여 홈플러스여 동네 마트여 제발 비빔장을 넣어주세요 진공소면이랑 세트로 팔아달란 말이에요 진짜 이게 필승템인데 왜 안팔아주냐구요! 팔도비빔장보다 3배 맛있는데!! 시판 비빔장으로 여러분의 여름이 조금 더 쉽게 맛있어지기를 바라며!

오랜만에 레터를 쓰는 거라 고민이 많았는데, 막상 쓰기 시작하니까 또 늘 그렇듯 즐겁게 쓰게 되네요! 다다음주에는 또 어떤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까 저도 기대가 되어요. 이 적당한 여름의 기운을 즐기며 국수 한 그릇을 후루룩 비운 기분좋은 배부름으로, 5월의 마지막 레터이자 오랜만의 첫 레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