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어서는 아티스트' 정주영 인터뷰
2020.06.27 | 구독하기 | 지난호보기


K E Y W O R D
#왜 안 돼?  #도전  #Doodling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정주영은 긴 답변을 하였다. 아티스트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디자이너이자 앙트레프레너이자 드리머. 회사에서는 또라이라고 불리고요.
조만간 하나가 더 추가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눈의 반짝임. 또 하나의 도전을 앞둔 인간의 긍지. 자유로운 곡선처럼 넘실대는 생의 의지.

'경계를 넘어서는 아티스트' 정주영에게 '도전'에 대해 물었다.


"왜 안 돼?"
인스타그램 프로필을 보고 놀랐어요아티스트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디자이너이자 앙트레프레너이자 드리머.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평소 소개할 때는 '라우렌'이라고 말해요제 이름이 로렌인데 인도에 있을 때 '라우렌'이라고 불렸거든요. '아티스트'회사에서는 '또라이'를 맡고 있습니다.

 
다양한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지요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공대에 진학하고학부생 연구원이 될 정도로 열의를 갖다 갑자기 디자이너로 진로를 선택하셨다고요.

돌이켜보면 하나 같이 "왜 안 돼?" 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처음은 공대를 선택한 거였죠. 수능 끝나고 대학을 둘러보니까 인문계에 재밌어 보이는 전공이 하나도 없더라고요그래서 공대를 살펴보는데, 주변에서 공대는 점수를 깎고 가야 한다고 손해라고 그러는 거예요심지어는 그런 이야기도 하더라고요?

"여자가 무슨 공대야!"

소위 말하는 ''이 쳤어요왜 안 돼왜 공대는 가지 말라고 해저는 좀 반골 기질이 있거든요호기심도 강하고요그래서 물류시스템학과에 들어갔어요들어가고 보니 과 수석이었고요.
 

대학 가자마자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어요2학년 때부터 열의를 불태웠는데한 선배의 말 때문이었어요.

"나는 있잖아지금까지 과 수석으로 들어온 애가 끝까지 성적 잘 받는 걸 본 적이 없어!"

그 말에 또 ''이 쳤지요안 될 거 같아내가 보여줄게미친 듯이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문과를 나왔기 때문에 공업 수학의 기초가 되는 탄젠트미적분이 뭔지도 몰랐어요대학원생 선배들을 쫓아다니고고등학생이던 남동생에게 <수학의 정석>으로 과외를 받아가며 공부했어요결국과탑을 쟁취했고요.
 

디자인 전공을 마음먹게 된 것도 마찬가지예요친한 선배들이 공모전에 나가는 것을 도와주려다 일러스트레이터를 접하게 되었는데, 몇 날 며칠 독학해보니 웬걸너무 재밌는 거예요.
안 되겠다디자인을 전공해야겠다마음을 먹었을 때 학부생 연구원이었어요'대학원을 안 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말씀드렸더니 교수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하고 싶으면 해근데 공대 나온 놈은 디자인을 못 해공대 나온 놈은 아니면 1밖에 모르거든네가 디자인을 할 수 있을 거 같아?"

기름을 끼얹으신 거죠하하그래서 완전히 고 나왔어요바로 디자인을 공부할 수는 없었어요졸업하고 마케팅 회사에서 일도 좀 해봤는데도저히 디자인을 하고 싶어서 안 되겠더라고요부모님께 말씀을 드리고 첫 학기 등록금만 받았지요나머지는 충당 못 하면 그만두기로 약속하고요첫 학기 이후로는 장학금 받아서 공부를 끝마쳤어요.
 
 
대단한 "왜 안 돼?"의 여정이네요!
 
항상 최고가 목표였다기보다는 '네가 이걸 할 수 있을 거 같아?'라는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목표였어요그들에게 증명해 보일 필요는 없었지만나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던 거죠남을 격려는 못 할망정 '너는 이거 못 해!' 하고 못 박는 것에 반감이 컸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감사하죠좋아하고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간 과정이니까요너무 힘든 길이었지만 다른 길이라고 해서 쉽진 않으니까.

 
성취의 경험이 쌓면서 용기를 더해준 게 아닐까 싶어요.
 
'한 번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말자주의예요내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괴로워하거나 걱정하지 않으려 해요저지르기 전에는 엄청나게 고민하지요진짜 이게 맞는 건가저지르고 나면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물론 생각지도 못하게 너무 어려운 적도 많았어요벽도 있었고요그렇지만 그 이상으로 얻는 보람이 컸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벽과 어떤 보람이었나요?

공대에서 첫 2년은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놀다가도 집에 오면 매일 울었어요수업을 전혀 이해 못 했거든요일단 다 받아 적은 다음에 집에 와서 나머지 공부를 해야 했어요너무 고통스러웠어요.
그런데 힘들다고 말하면 주위에서 '거봐아니라고 했잖아!'라고 하니까 이를 악물게 되더라고요? 힘든 여정을 뚫고 과탑을 차지했을 때모두가 인정하는 아이가 되었을 때 성취감을 느꼈어요.

디자이너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예요뛰어난 디자이너들에 비하면 스펙에서부터 까이지만실무로 붙었을 때는 절대로 안 지거든요. PT 들어가서도 제가 다 따오고요.

그래서 깨달았어요. 종이에 적힌 게 내 가치를 증명하지는 못하는구나내가 진짜 프로가 되면 되는 거구나.


경계를 모르고 도전하는 정주영에게도 실패는 있었다. 라오스에 간 지 100일 만에 암이 발견되어 항암 치료를 위해 귀국했고, 사랑하는 회사를 위해 인도에 갔을 때도 트라우마에 시달려 6개월 만에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실패의 의미를 찾아 나섰다. 서사를 써나가기 위해. 다시 도전하기 위해.


모든 도전이 성공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더라도  
'도전'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이제까지 말씀하신 도전은 모두 끝을 보았고 의미가 있었지요. 혹시 일찌감치 돌아서거나 중도에 포기한 경우는 없었나요?
 
저는 누군가 '해볼래?'라고 권유할 때, 하겠다고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요. 일단 해봐요. 해보고 안 되면 아프지만 내려놓더라도요. 스스로 포기하는 성향은 아니에요. 오래 걸리는 것은 상관없는데, 포기는 안 해요.
디자인 회사를 퇴사하고 라오스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라오스에 갔을 때요?
 
한 기업의 총괄 디자이너로 갔었어요. 사실 여유롭게 일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결정하였었지요. 주변에서 되게 말렸고요. 당시에 라오스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거든요. 아무래도 여자 혼자, 잘 모르는 나라에 가는 결정은 어려웠어요. 그런데 두 번이나 연락을 주면서 만나보고 싶다고 하기에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결정했어요.
못 버텨도 1년에서 3년은 버틸 생각이었어요. 한국에 있던 짐을 다 팔고, 가재도구와 살림살이도 다 정리하고. 다시는 안 올 사람처럼 갔지요.
 
 
정말 '후회 없이'네요.
 
하하. 결론부터 말하면 그게 옳은 결정은 아니었어요. 용감한 건 좋지만, 모든 도전에는 위험과 책임이 따르잖아요? 저는 위험이 무엇인지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갔거든요. 너무 좋은 동료들과 일했지만 갖은 고생을 하다가 100일 만에 돌아와야 했어요.
 
 
'돌아와야' 했다고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암에 걸려서였어요. 아직 젊은데 암이니까 무조건 빨리 들어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곧바로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에 들어왔지요.
 

나한테는 내일이 있을 수도없을 수도 있어.
내일이 없으면 나는 오늘 뭘 해야 하지?


어떤 심경이었을지 상상도 안 가네요.
 
들어오자마자 항암 치료를 시작하는데, 내가 뭐를 위해서 이렇게 달려왔나 싶더라고요. 남들은 다 앞서가는데 나는 여기서 숨 한 번 쉬려고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야 했으니까.

그때 생각했어요. 나한테는 내일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어. 내일이 없으면 나는 오늘 뭘 해야 하지? 
그래서 그림을 계속 그렸어요. 간간이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그림 그려주는 아르바이트도 했고요.
 
 
오늘에 충실한 방법으로 그림을 선택하셨군요.
 
누워있는 걸 싫어했거든요. 방사선 치료를 받는 동안 한 달 내내 병원 카페로 링거를 끌고 나갔어요. 오죽하면 간호사분들이 카페로 와서 혈압을 쟀어요. 제가 침대로 안 돌아가니까! 도장도 엄청나게 채워서 무료 커피를 몇 번이나 마셨는지 몰라요.
 
그때 네이버 포스트에 <유방암 환자들을 위한 애티튜트 제안>을 연재했어요. 사람들이 유방암에 대해 잘 모르더라고요. 모르니까 저에게 위로라고 하는 말이 너무나 상처가 되는 거예요.
암 환자 자체에 대한 정보는 많아요. 그런데 우리 엄마가 유방암에 걸렸을 때 내가 뭘 해야 도움이 되는지, 내가 엄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내가 이 병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려야겠다'라는 생각으로 포스트를 만들었지요.

항암 치료를 받을 때는 중국과 말레이시아를 아주 느린 속도로, 걸을 수 있을 만큼만 걷는 여행기를 포스팅했어요. 하다 보니 네이버 메인에 노출이 되었고요. 단일 포스팅 조회 수가 하루 만에 5만 가까이 찍기도 하고. 네이버 여행 포스터로도 활동했었지요.

그것을 계기로 쭉 블로거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항암 치료를 하던 중에 지금의 회사에 들어갔지요.
 
 
너무 이르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있었을 텐데요.
 
만약에 내일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평범하게 일상을 살다가 가고 싶었어요. '나는 이제 죽을 거니까 이제부터는 아무것도 안 하고 여행만 할 거야!'라든가 '내가 못 해본 모든 것을 다 해볼 거야!'라고 할 거였다면 평소에 해야 했다고 생각해요.
이 일 하다가 죽으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한 거예요. 지금 회사가 저에게 정말 소중해요.
 
 
애정이 남다르게 느껴져요. 지금 회사를 위해 인도로 떠나기도 하셨지요?
 
맞아요. 무척 용감했을 때에요. 저는 암을 이겨냈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죽는 것보단 안 무서워! 못 하면 어때! 상관없어! 자신만만한 채 2018년에 인도에 갔지요.
결론부터 말하면 6개월 만에 들어와야 했어요. 인도가 너무 힘들었거든요.
 
 
어떤 문제가 있었나요?
 
커뮤니케이션 미스로 현지인과 크게 다투면서 언어에 트라우마가 생겼었어요. 생활에서 제대로 따라주는 부분도 하나도 없었고요. 단수는 일상이고, 비가 오면 물을 퍼내는데 모든 힘을 써야했어요. 내가 세상 그렇게 쓸모없게 느껴질 수가 없더라고요. 멘탈이 급격하게 무너졌죠.
사업 점검차 인도에 왔던 대표님이 제게 들어올 걸 권유하셨어요. 패배의식에 가득 찬 채 돌아왔지요.
 
돌아와서도 한참 동안 회복이 안 되었어요. 사람들에게 돌아왔다고 연락하는 것조차 싫었어요. 계속 한국이야? 인도야? 질문을 받는데, 한국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덕분에 아직도 주위 사람들이 한국에 있냐고 물어봐요. 2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요.
 
 
인도에서의 경험은 주영님께 어떤 의미로 남았나요?
 
인도에 다녀온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실패라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알게 되겠죠? 무엇을 배워왔는지. 아직은 인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만회하고 싶지만, 아직 대면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네가 넘어지는 건 당연한 거야. 너 이거 처음 해보잖아.
계속 넘어지면서 네 몸에 익히는 수밖에 없어."


그런데도 회사를 떠나지는 않으셨어요.
 
말하자면 또 길어요!
인도에서 돌아왔을 때 자존감이 바닥이니까 궁금해지더라고요. 혼자 있을 때 나는 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내가 여전히 내 모습 그대로의 내가 맞는지, 지금 나는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인지. 그래서 201812월 말에 발리로 여행을 떠났어요.
 
 
발리에서는 무엇을 하였나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쭉 지켜봤어요. 그랬더니 혼자 서도 식당 주인에게 말을 걸며 하나도 심심하지 않게 밥을 먹고, 어디 가서도 사진 찍어 달라고 서슴없이 부탁하고, 현지인들과 친해져서 현지 이름을 선물 받는 사람이더라고요.
그래서 깨달았어요. 나는 원래 낯선 환경을 겁내는 사람이 아니고,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구나. 어딜 가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는 사람이구나. 여전히 경계에 대한 두려움이 없구나.
 
 
잃어버렸던 '정주영'을 찾은 거군요.
 
맞아요. 그런데도 여전히 내 안에 해결되지 않는 답답함이 남아있었어요. 이래서는 회사에 도움이 안 될 거 같아 퇴사하려고 마음먹었었고요. 돌아가면 사표를 써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출발하기 3일 전에… 완전히 뒤바뀌었지요.
 
 
'완전히 뒤바뀌었다니. 어떤 일이 있었나요?
 
수영금지 팻말이 걸려있을 정도로 흐린 날이었어요. 서핑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바닷가를 거니는데, 한 현지인이 나를 보고 인사를 하더라고요. 아는 척을 했더니 서핑 레슨 받으라는 거에요. 나는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고 수영도 못 한다고 말했는데 자기를 믿으라는 거예요. 내가 너를 절대 안 놓을 거라면서.
 
 
서핑에 도전하셨군요!
 
호기심에 OK했어요. 그런데 너무 힘들었어요. 두 시간 반 하면서 물에 몇 번이나 빠졌는지 몰라요.
한 시간 정도 지나니까 너무 지치는 거예요. 암을 앓고 나서는 체력이 남들의 반 밖에 안 되고, 한 번 지치기 시작하면 말도 안 되게 지치거든요. 쉬려고 뭍에 나왔을 때 제가 사과했어요. '미안. 운동 감각 있는 사람들은 조금만 해도 늘던데. 나 때문에 너도 물에 많이 빠졌지.‘
 
그러자 그 친구가 말하더라고요.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운동 신경도 있고, 균형 감각도 있어. 내가 봤을 때 너의 진짜 문제는 뭔 줄 알아? 네가 물을 무서워하는 거야."
 
그 친구가 이어서 말했어요. "내가 뒤에서 네 보드를 잡아주고 있고. 네가 가야 할 곳이 눈앞에 있어. 네 발이 안 닿는 높이도 아니야. 근데 왜 무서워해? 옆에 누가 지나가는 게 무슨 상관이야? 넌 저기로 가면 되잖아."
그 말이 무슨 성경 말씀처럼 들리더라고요.
 
 
소름이 돋네요.
 
그 친구가 그랬어요. "네가 넘어지는 건 당연한 거야. 너 이거 처음 해보잖아. 계속 넘어지면서 네 몸에 익히는 수밖에 없어."
그 말에 모든 게 회복되는 느낌이었어요. 이후에도 보드를 잡고 한참을 고생했지만, 결국 2시간 반 동안 3번 일어났어요. 3. 3번 일어나서 끝까지 탔어요쾌감이 엄청났어요.
 
 
실패를 딛고 일어섰네요! 몸을 이기는 경험을 통해서요.
 
그러고 났더니 '나 한국 가서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끝내주죠?
11일 자정을 발리에서 보내고, 201911일 아침에 한국에 떨어졌어요. 모든 게 새로웠지요. 덕분에 다시 용기를 내서 지금까지 해오고 있어요.


주영님에게 '도전'은 어떤 의미인가요?
 
도전은 과정에 다이나믹을 부여해요저도 모든 도전이 성공으로 끝나지는 않았어요결과적으로 실패일 때도 있었고결과적으로 나를 상하게 하는 때도 있었어요그러나 모든 게 가치 있었다고 생각해요스스로 삶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그럼 도전은 인생이 주는 '재밌는 숙제'가 되지 않을까요?


"컬러이면서도 컬러가 아닌 검정은 내게 매우 매력적인 색이에요." 검정 라인으로 드로잉 하는 정주영은 굵기 별로 다양한 펜을 갖고 있다. 남에게 빌려주지도 않는다는 '최애'는 유니볼 시그노 0.38. 중간 굵기의 스테들러 피그먼트 라이너 0.5~1.0, 펜텔 에너겔 메탈포인트 0.7도 항시 구비하고 있다. 굵은 펜은 컴퓨터 사인펜부터 매직까지 때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한다.


NO TITLE. NO CANVAS. NO ANSWER. 
그림을 그릴 때 항상 같은 펜을 사용하시지요? 도구에 대한 고집이 느껴져요.

가장 익숙하니까요. 그 펜은 절대 떨어지면 안 돼요. 리필만 50개씩 사둘 정도예요. 남에게 빌려주지도 않아요. 그 펜이 제 그림을 가장 잘 표현하거든요.


채색도 잘 안 하시는 거 같아요.
 
맞아요. 웃긴 심리인데, 채색하면 그림이 고정되는 느낌이에요예를 들어 내가 바다를 그렸어요. 누가 봐도 바다지만 '파란색' 혹은 '보라색'으로 칠하는 순간 누가 봐도 바다가 되는 거예요. 사실 그게 정보 속에 헤엄치는 걸 수도 있고, 시류에 올라탄 것일 수도 있고, 헤매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색을 입히는 순간 의미가 좁아지는 거 같아요.

대신 스케치북에 구애받지 않아요. 예전에 카페에서 전시회를 열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걸 그림이 없더라고요! 종이컵에 꽂혀 있어서 내내 종이컵에만 그림을 그렸었거든요. 냅킨에도 그리고, 남이 찍은 사진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요. '나 줘!' 하면 주기도 하고, 사진만 찍고 버리기도 하고. 남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남겨놓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고정되고 싶지 않은 거 같아요. '너는 이렇구나!' 프레임에 가둬지길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림을 그릴 때도 담고자 하는 메시지는 꼭 담아내지만, 항상 여지를 남겨놓아요. 보는 사람마다 메시지를 다르게 해석하는 게 좋아서요. 조금이라도 위트를 넣으려고 노력해요. 너무 진지해지지 않으려 하는 만큼, 너무 곱기만 하지도 않으려고요.
 
 
Q. 만약 대형 작품을 한다면 어떤 주제로어떤 제목을 달고 나올까요?
A. 아마 제목이 없지 않을까요?
 
 
'스케치북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이 충격적이에요.
 
'스케치북'에서 시작하지 않아서 그런가 봐요. 어릴 때 미술학원에서 쫓겨났었거든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색을 칠하지 않아서요덕분에 닥치는 대로 그렸어요노트교과서남이 만든 그림책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요.

저는 지금도 연필 스케치를 하고 지워가면서 그리는 것을 못 해요. 한 번에 그리고, 실패하면 처음부터 다시 그려요.
 
 
그래서 'Doodling'이군요.
 
맞아요. 제 그림을 Artwork보다 Drawing이나 Doodling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해요.

예전에 이탈리아 작가분과 교류를 할 일이 있었어요. 그분이 제 그림을 보고 '너는 선이 굉장히 자유롭다. 선 쓰는 게 전형적이지 않다.' 그러면서 디자인을 하지 말고, 작품을. 작은 작품 말고, 2~3m짜리 대형 작품을 해보라고 얘기하더라고요.
이런 저의 스타일이 장점이지만 한계라고도 생각해요.
 

그럼 또 뛰어넘으시겠지요?
 
뛰어넘고 싶으면 도전하겠지요? 언젠가 대형 작품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요. , 일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졌을 때. 삶의 경험치가 충분히 쌓였을 때요.
 
 '대작'을 남겨서 아티스트로 명성을 날리고 작품이 팔려나가는 것보다는, 내가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내 에너지를 쏟고 싶어요. 아프고 나서 특히 이런 생각이 강해졌어요.
내가 인생을 바꿔줄 순 없지만, 누군가 우울했는데 내 그림 때문에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영향력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대형 작품을 한다면 어떤 주제로, 어떤 제목을 달고 나올까요?
 
아마 제목이 없지 않을까요?

 


또 한 번 경계를 허물기 위해  
어떤 도전을 앞두고 있나요?
 
유튜브를 시작하려고 해요. 몇 년 전부터 벼르던 일이에요.
 
 
왜 유튜브인가요? 이유가 궁금해요.
 
대학 때 아마추어 무전 동아리 활동을 했었어요. 소리바다가 흥하던 시절에는 음악 방송을 진행한 경험이 있고요. 그래서 실시간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어요.

방송할 때, 나의 한 마디에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다는 사실이 의미 깊었어요.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었는데 '꼬물이'가 락 방송을 한 번 하면 다 풀린다"는 사연이나, "방송을 녹음해서 몇 번이고 듣는다"는 사연을 여전히 기억해요아, 이게 콘텐츠가 가지는 힘이구나. 그래서 유튜브를 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유튜브는 화면까지 나가잖아요? 더욱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여태 시작을 못 했는데 최근에 마이크를 추천받았어요! 마이크를 받아보고 괜찮으면, 퀄리티 생각 없이 시작해보려고요.
 

어떤 콘텐츠를 생각하고 있는지 살짝 알려주실 수 있나요?
 
<자기만족을 위한 11그림>이에요어떻게 '내 그림'을 그려내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해요. 저에게는 일상적인 것이라 부담되지 않는 콘텐츠예요. 도구만 있다면 어디서든 할 수 있고요.
 
또 하나는 <세계 최고의 고모>라고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콘텐츠예요.
제 첫 조카가 올해 여덟 살이에요. 저는 조카에게 "몇 세 추천!" 이런 제한을 두지 않고 디자이너의 시각에서 봤을 때 창의성을 키워주는 책, 시야를 넓혀주는 책, 그리고 디즈니처럼 쓸데없는 편견을 심지 않는 책을 골라 선물해왔어요. 어릴 때 생각의 폭을 틔워줘야 하니까요. 자랄수록 생각이 점점 닫히잖아요? 상상이 무한대로 열릴 수 있을 때 더 많은 기회를 주어야지요<세계 최고의 고모>가 되고 싶은 탐욕을 가진 고모로서 말이에요!
 

도전을 앞둔 사람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

도전하기 전에 얼마든지 소심하게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 온갖 걱정 인형으로 살아도 괜찮아요그렇지만 일단 도전을 시작했다면주저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아요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예상치 못한 '빡셈'이 있더라도 제대로 그 맛을 보시길 바라요길을 잘 모르겠다면 앞서간 사람에게 묻는 것도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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