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을 건너뛰고 10월, 세번째 편지

10월의 비평 주제
해설과 비평?

안녕하세요. 장은정입니다. 9월을 건너뛰고 10월 15일에 세번째 뉴스레터를 띄웁니다. 원래 9월에 발송하려 했던 주제인 '해설'을 다뤄보려고 해요. 덕분에 제가 썼던 해설들만 모두 모아서 정리를 해봤는데요. 단행본에 들어가는 해설 지면 이외에도 수상작 뒤에 따라 붙는 짧은 해설들까지 모두 합치니까 총 14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소개할 만한, 해설의 기능과 비평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볼 만한 편수는 많지 않았어요. 너무 오래전에 쓴 글은 지금의 저도 동의하기가 어렵구요. 그래서 딱 네 편을 골라 소개합니다. 

*이번 호는 내용이 많아서 모바일보다는 PC에서 더 가독성이 좋도록 구성했습니다. 참조해주세요.

안태운, 『감은 눈이 내 얼굴을』(민음사, 2016)

이 시집부터 시작해야겠군요. 제 35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이었던 안태운 시인의 『감은 눈이 내 얼굴을』(민음사, 2016) 시집의 해설을 썼습니다. 사실 평론가에게 있어서 수상작 해설 지면을 얻는 일은 매우 기쁜 일이지요. 어떤 작품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문학상에서 그 가치를 제가 직접 설명할 수 있는 기회이니까요. 

그런데 2016년 12월에 출간된 시집이라는 점을 기억해주세요. 문학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아시는 분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년도일 겁니다. 2016년 10월에 문학출판계 성폭력 말하기 운동이 일어났거든요. 당시 저는 '페미라이터'라는 이름 하에서 일꾼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기록 및 아카이빙 부서에 속해있어서 홈페이지를 만들고,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하고, 우리가 하는 일들, 기사들을 순차적으로 모집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 활동을 병행하면서 이 시집에 대한 해설을 써야 했지요.  
그런데 해설을 쓰면서 굉장한 혼란을 느꼈습니다. 피해자들이 SNS에 자살을 예고하는 일이 잦았고, 그때마다 피해생존자 부서에 속한 일꾼들과 연대자들은 119를 부르고 경찰을 찾아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집 주소를 찾아야했습니다. 저는 그 소식들을 실시간으로 공유받으면서 계속 트위터의 타임라인을 새로고침하고, 새 폭로가 이어지면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데이터로 확보하고 보관하는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과 시집 해설 쓰기를 동시에 진행한다?

저는 해설을 쓰기 위해 안태운 시인의 시를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문학상 수상작의 해설을 쓰면서 비평가로서의 커리어를 쌓는 일과 페미라이터 일꾼으로서 활동가로 활동을 함께 하는 것이 양립될 수 있는가?" 왜냐하면 안태운의 시는 그로테스크한 미적 속성이 뛰어난 시였고, 제가 페라에서 활동하는 일은 현실의 폭력을 마주하는 일이었으니까요. 

혼란스러웠습니다. 문단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전까지만 해도 저는 아름답고 미묘한 것들에게서 시적인 것들을 발견해왔고, 그래서 평소 안태운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있었던 폭력의 사례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그로테스크한 미적 미묘함의 문학적 가치를 설명하는 일이 어쩐지 상반된다고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 같아요. 그 혼란 속에서 내린 마지막 문단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도저히… 아름답다고 쓸 수는 없었습니다.

"이를 시의 증오라고 써야겠다. 인간이 분열에 의해 쪼개진 존재에 불과하며 시 역시 그 조건에 의해 제약되어야만 겨우 기만하지 않고 시적 진실일 수 있다면, 시는 이런 자신을 증오하는 방식으로만 분열 이후의 삶을 사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바타유가 “오로지 증오만이 진정한 시에 도달한다”고 썼던 이유가 시가 모든 것에 저항하면서도 “시는, 결국, 시를 용인하고야” 마는 역설에게까지 저항하기 위해서였듯이, 꿈과 현실 모두의 한계를 직시함으로써 저항하기 위해서는 시가 자신을 증오하는 방법이 전부일 것이다. 이 증오는 우리의 감은 눈을 끝내 찢고 그동안 알면서도 모른 척해왔던 것을 남김없이 보게 만든다. 이 잔혹한 예속조차 시의 자유일 것이다." 
제 비평을 꾸준히 따라 읽어온 사람이라면 제가 쓴 이 글이 그동안의 글들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무언가 큰 갈등 속에서 써내려간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던 모양입니다. 박상수 평론가가 저의 이 글을 두고, 장은정이 평소 문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확고하고도 선량한 믿음이 산산히 깨진 후 쓴 글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건 사실이었고, 저는 정말 이 글 이후로 다시는 이전처럼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강성은, 『Lo-fi』(문학과지성사, 2018)

다들 아시다시피 시는 대중적 장르가 아닙니다. 매우 매니악한 장르죠. 소수의 독자들이 '섭렵'하다시피 깊이 파고드는 장르이고, 소설의 독자들과는 차이가 좀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보통 시집 해설은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 쓰기보다 이미 어느 정도 시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있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이 시집이 갖는 문학사적 위치를 설명해주는 역할을 하곤 했습니다. 이전의 시들과 어떻게 다른가? 이 시집은 문학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시집의 개성과 문학사의 위치에 답하는 지면이었죠.

2017년 중순 쯤, 페미라이터가 해체되고 저는 잠시 여행을 다녔어요.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이 직업을 물어보면 문학평론가라고 대답했고, 그러면 꼭 이어지는 요청이 있습니다. 시집을 추천해달라는 것이지요. 대부분 시에 있어 문외한인 사람들입니다. 당신이라면 시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어떤 시집을 추천하시겠어요? 
저는 시에 입문하기에 적합한 시집은 다음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일상어를 사용하면서도 시적인 방식으로 언어를 운용해야 한다. 둘째, 일상어로 되어 있어 술술 읽히지만 무언가 미해결된 채로 기억에 강렬히 남아야 한다. 그래야 다른 시집으로 시 읽기가 이어지리라는 짐작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시인이 저에겐 강성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강성은의 두 번째 시집인『단지 조금 이상한』을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했지요.  

그러니 강성은 시인의 세 번째 시집 『Lo-fi』의 해설 의뢰가 들어왔을 때, 얼마나 기뻤을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가장 많이 추천한 시인의 시를 직접 설명할 수 있는 기회니까요. 그런데 시집 원고를 받아 읽은 후 원고를 쓰기 위해 빈 지면 앞에 앉았을 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시라고는 고등학생 때 언어영역의 시험 대상으로서만 경험해본 것이 전부인, 시에 대한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추천한 시인인데, 정작 제가 이 시집에 대한 해설을 쓸 때는 문학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춘 사람들을 대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매우 모순적으로 느껴졌죠.

제가 추천한 사람들을 기억나는대로 떠올려보았습니다. 집을 짓는 사람도 있었고, 법을 다루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보험회사에서 하루종일 숫자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고, 공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에게 시집을 추천했는데 그로 인해 강성은이라는 시인을 알게 된 사람들이 여전히 이 추천받은 시인을 기억해서 세번째 시집을 찾아 읽는다면, 어? 그때 그 추천해준 친구가 직접 해설을 썼네? 알아차린다면, 그런데 사실 자신을 향해서가 아니라 시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이미 갖춘 사람들을 향해 쓴 글을 읽는다면, 어쩐지 배신감을 느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시를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독자를 대상으로 해설을 쓰자.' 부끄러운 고백입니다만, 비평가가 된 후 해설 지면에서 이런 결심은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작가나 문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향해 글을 써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각 잡고 쓰는 전문 비평이 아니라 완전히 에세이에 가까운 글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문학과 무관한 삶을 사는 사람의 삶과도 맞닿는 지점이 있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가 처음이었기에 글은 좀처럼 진도가 나가질 않았어요. 늘 쓰던대로 자꾸 써졌고, 저는 쓰고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제 목표는 단순했습니다. 첫째, 가독성이 좋아야 한다. 둘째, 일상어를 주로 사용해서 모르는 용어가 거의 없어야 한다. 셋째, 이 시집에 대한 정답을 명료하게 내려서 비밀을 없애면 안 된다. 넷째, 이 시집이 가진 모호함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다섯째, '이 시는 무슨 뜻이지?' 질문하기보다는 '이 시는 내게 어떤 의미지?' 독자가 시를 통해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 다섯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쓰고 또 썼지만 정말 어려웠습니다. 아마 제가 쓴 글 중 가장 쓰기 어려운 글이었고, 저는 이 글을 완성한 후 처참하게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섯 가지 목표 중 몇 가지를 이뤘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로서는 단 한가지도 달성하지 못한 느낌이었죠. 산책을 하면 막힌 부분이 풀릴까 싶어 잠시 노트북을 끄고 나왔는데 답답함과 짜증, 자신에 대한 분노 때문에 골목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글을 너무 못 써서요. 어쩜 이렇게 못쓰지? 저의 무능 때문에 저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신인 내내 누군가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는데, 이 해설을 쓸 때는 동료나 선배, 문학을 즐기는 어느 누구도 떠올리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제가 추천해준 사람들을 떠올렸고 전 제가 무능한 평론가라는 생각 밖엔 들지 않았어요. 제도 내에서 통용되는 문법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그 문법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못쓰는 멍청한 평론가가 되었다는 자조를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강성은의 시집을 추천한 사람들 한명 한명을 떠올렸고 그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그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다니. 다음의 글은 제가 마감을 하고 가장 처참한 기분을 느낀 글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저들은 아주 행복해 보였고/그것은 오래전의 먼 일이었으나”와 같은 구절을 참조한다면 첫 연은 과거의 일이다. 그러나 이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가 말한다는 것은 기묘하다. 태어나지 않은 이에게도 기억이 있다는 것일까? 지나간 시간 이후에 현재가 놓이고 이후에 미래가 다가오는 방식으로 시간이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 자들에게 이 시의 발화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시간이 무엇인지 앞질러 이해하기 전에 우선 “아,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구나”라는 구절을 반복해서 따라 읽어보자. 사실은 시를 읽고 있는 바로 ‘지금’의 순간이야말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불가해한 순간이 아닌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태어난 사람들인가? 당신은 당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무슨 근거로 믿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이소호, 『캣콜링』(민음사, 2018)

2018년 경, 저는 침울했습니다. 소설 장르에서는 페미니즘 담론이 비평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반면, 시 장르에서는 그런 담론이 형성되질 않았거든요. 할말이 목끝까지 차 있는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게 해주는 시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문학성과 역사성이 함께 맞물리는 시를 읽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작품을 찾기가 어려웠고 저는 점차 시 읽기의 즐거움을 잃어갔습니다. 

이런 시들은 페미니즘 리부트 이전의 시들과 뭐가 달라? 그런 냉소적인 눈으로 신간들을 바라보던 바로 그 시각, 이소호의 캣콜링이 김수영 문학상을 받았을 때, 그리고 그 해설 지면이 제게 주어졌을 때, 저는 정말로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혼란스러웠으나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독법을 바꿔보았고, 마침내 '이거구나' 와닿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비평을 쓸 때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죠. 독법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고 시를 통해 독법을 바꾸는 순간, 세상도 달리 보이니까요.
이 글에서는 두 가지 토끼를 모두 잡고 싶었습니다. 이 시집이 문학사에서 갖는 위치를 설명하는 동시에, 시를 한번도 접한 적 없는 독자에게도 이 시집이 유의미한 질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 글은 쓰는 내내 즐거웠고 짜릿했고 잘 풀리지 않는 순간에도 행복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이소호 시인에게 고마웠습니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쓰면서야 저 자신과 타인, 세상에 대해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 글을 보고 엉망이라고 해도 상관없었습니다. 왜냐면 제 마음에 들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시간, 이 해설을 쓰던 그 시간에만 쓸 수 있는 것을 썼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평가가 두렵지 않았고, 저는 그저 즐겁고 짜릿했을 뿐입니다. 비평가로서 이소호 시인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아직도 합니다. 이 시집의 해설 마지막 문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튼튼한 철제 상자를 하나 구해 미래의 자신에게 쓴 편지를 넣어 땅에 묻어본 적이 있는가? 20년 후, 같은 날짜에 모여 상자를 열어보기로 한 친구들이 끝내 나타나지 않아서 혼자 그 상자를 열었을 때, 흙이 묻은 손으로 당신이 읽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내가 이 글에 무엇이라고 쓰든 간에 그것은 마치 오래도록 땅에 묻을 문장들을 써내려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지금’을 살아간다는 것이 대체 무슨 뜻인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깜깜한 무지 속에서 시를 읽고 무언가 써내려가기를 택했고, 지금 쓸 수 있는 것들을 지금 써야 한다는 동어반복적인 의무감 속에서 읽은 것들에 대해 썼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시간은 언제인가? 당신은 이 시집과 이 글에서 무엇을 읽어낼지 궁금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읽어낸 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의 진실을 보여준다고 믿는다."
김경인,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문학동네, 2020)

처음 원고를 받았을 때를 기억합니다. 첫 시를 읽고, 두번째 시를 읽고, 세번째 시를 읽고, 그렇게 연달아 다섯편을 읽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완.벽.하.다." 이소호 시인의 캣콜링이 첫 시집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도발성을 가지고 있다면 김경인의 이 시집은 오래 시를 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끈기와 집념으로 덜어낼 단어가 하나도 없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저는 원고를 읽고 생각했어요. 제대로 써야 한다. 게다가 이 시집은 현실에서의 죽음들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세월호에 대해, 용산참사에 대해, 백남기 농민의 죽음에 대해. 이들의 죽음이 갖는 무게에 걸맞는 언어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제가 그동안 글을 써오면서 느낀 중압감 중에서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타인의 죽음에 대해 쓴다는 것. 누구나 쓰기 어려운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김경인 시인의 시들은 그 무게를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걱정이 됐습니다. 사람들이 이 시집을 '휴식거리'로 삼을까봐. 와, 시 너무 좋다. 감격한 후,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까봐. 이 시들의 비유를 정말로 그냥 비유로만 받아들일까봐. 뭐든지 해야한다. 이 시들이 갖는 무게를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그 무게를 짊어져야 했습니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쓰기 위해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밝히려 했던 수많은 책들을 모두 읽었고, 수많은 논문들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아직 저의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공부'한 것이었지, 제 언어가 되지 않고 계속해서 겉돌았습니다. 

저는 이 해설에서 해설에 요구되는 모든 문법을 무시했습니다. 아니, '해설'이라고 붙어있으나 저는 서문에서부터 해설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저는 이 시들을 '사건'으로 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세월호 사건의 연대기를 아주 상세히 나열하고 제가 보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대에 시들을 위치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시들이 비유가 아니라 연대기의 사건으로서 무게를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에만 국한되는 것 역시 원하지 않았습니다. 세월호가 제주를 향하다가 중간에 침몰했으므로, 제주에서 잊힌 것 역시 연대기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2020년에서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2014년으로, 제주 4.3사건이 있었던 1948년까지 거슬러가며 시를 사이사이에 넣었습니다. 

이 시들을 단지 문학사 내에서 봐서는 안되며, 한국근현대사의 맥락 내에서 읽히길 원했습니다. 이 시들은 '역사'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이 글을 쓰는데 1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정말 감사하게도, 김경인 시인께서는 담당 편집자 선생님께 저에게 독촉을 하지 말라는 부탁을 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그 말에 의지해 공부한 언어가 제 언어가 될 때까지 쓰고 지우고를 반복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그 글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꿈꾼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시집을 읽고 또 읽으며 알게 되었다. 마음을 가진 자들만이 꿈꿀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피로 젖은 흙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 참혹한 고통과 죽음들을 딛고 서서 감히 아름다움에 대해 비유로 쉽게 노래할 수 있겠는가. 그저 ‘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되물으며 피로 젖은 흙 속을 파고들 때에만 겨우내 꿈이 자라난다고 말하는 것이 내가 쓸 수 있는 최선이다. 그러니 “올여름은 내내 꿈꾸는 일”이란 단지 멈춰 선 애도가 아니라 우리를 한발자국 겨우 나아가게 하는 것. 어쩌면 시를 읽고 쓴다는 것, 비유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일어난 일들, 겪어야만 했던 시간 속을 파고들면서 생긴 마음으로 꿈꾸는 일을 계속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는 이제 시집 해설을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저는 이제 작품론보다 한국문학이 처해 있는 사회적 조건이나 문학이 문학으로서 성립되게 만드는 제도, 문학이 어떻게 문학이 되는지, 한국사회에서 문학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런 메타적인 작업을 해나갈 예정입니다. 출간되는 신간들을 최대한 열심히 업데이트하며 따라잡겠지만 직접 해설을 쓰고 어떤 작품의 가치를 주장하는 일을 최대한 줄이려고 합니다. 이런 일을 저보다 잘할 수 있는 비평가들이 아주 많고, 비평가의 역할은 다양하며,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요. 

라고, 그렇게 말하고 다녔는데, '아, 이 시집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다. 너무 말하고 싶다' 싶은 시인을 알게 됐습니다. 처음 이 시인을 알게 된 것은 유후팀에서 기획한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이라는 엔솔로지 시집이었습니다.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이라는 수식어 뒤에 빈칸을 두고 각자 빈칸을 채워 묶은 시집이었죠. 거기서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살상 레이저」라는 시를 발견했습니다. 아무 해도 끼치지 않으니 다들 무해한 이미지를 가진 단어를 골랐는데 이 시인은 '살상 레이저'라니, 가장 해롭게 여겨지는 단어를 골랐더군요. 그래서 그 시부터 펼쳐 읽었습니다. 등장인물이 있었고 서사가 있었으므로 열심히 몰두하며 읽었는데 다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낚였다" 완전히 당한 기분이 들었어요. 이 시인 누구야? 하고 보는데 필명일 것이 분명한 장난스러운 이름 "김누누"라고 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소개를 '팀유후'로 삼행시로 했더군요. 

그후로 독립문예지들을 볼때마다 심심치 않게 김누누라는 이름을 발견했고 그 이름이 보일 때마다 찾아읽었으며 매번 당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소개는 언제나… 자신에게 청탁을 준 출판사나 팀, 잡지명으로 삼행시, 이행시를 꾸준히 하고 있었습니다. 약간 뭐랄까, 어이가 없다고 해야하나, 뭐 이런 시인이 다 있나,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 왜 저는 계속 찾아 읽어다녔을까요? 그리고 마침내 김누누 시인을 찾아내서 제가 표4를 쓰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원고를 검토하고 있다고 하니 곧 신간이 나올 예정입니다. 저의 추천사를 먼저 공개합니다. 비독 여러분, 모두 이 시집을 꼭 사서 다들 읽으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저만 낚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심입니다.

김누누, 『착각물』(파란, 2020)
 “이름이 누누야?” 
 “응. 2014년에 이 이름을 만들었대. 그 전까진 주민등록증에 적힌 이름을 썼겠지?” 
 “아, 필명이구나. 이 시집 재밌어?” 
  “응, 재밌어. 그런데 조심해야 해.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어떤 일들이 생기거든.” 
 “어떤 일?” 
 “사소한 거야. 예를 들면, 마트에 진열된 오렌지를 보면 저절로 레몬을 함께 떠올리게 돼. 음, 그리고 새 화장품을 구입하기 전 이 제품이 동물실험을 했는지 살펴보다 말고 ‘지옥풀’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될 걸? 아니면 숲에 갔다가 쓰러진 나무를 발견했을 때, 그 나무 밑에 사실은 구해내야 하는 무언가가 깔려 있다는 것을 너만 알아챌 수 있겠지. 누군가가 한 사람을 손가락질하면서 “야, 쟤는 합제네, 합제.” 이럴 때, 너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어서 크게 웃음을 터트릴 거야. 친구와 커다란 미술관에 갔는데 눕고 싶다는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갑자기 전시실 정중앙에 누워 버릴지도 몰라. 그때 같이 있던 친구가 당황해서 뭐하는 짓이냐고 물으면 너는 누워서 웃으며 대답하겠지. “너는 김누누의 시집을 아직 안 읽었구나?” 이런 일들. 별거 아니지?” 
 “아, 그렇게 위험한 일들은 아니구나. 다행이다.”  
 그런데 나는 망설인다. 여기서 이야기를 마쳐도 될까. 사실은 아직 다 말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이걸 미리 알려주지 않아도 될까? 나는 아주 오래 망설이다가 겨우 용기를 낸다. 
  “네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어.”  
 나의 낮은 목소리와 엄숙한 눈빛은 너를 긴장시킨다. 
  “음, 이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생기는 일이 하나 더 있긴 한데, 그게 시집을 읽어서는 아니고, 음, 그러니까, 시집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라고 여기면 그만인데…….” 
 여기까지 말하자 너는 왜 이렇게 뜸을 들이냐며 나를 타박한다. 나는 망설이다가 천천히 대답한다. 
 “그런데 은수야. 너 내가 한 이 말들 진짜 다 믿는 건 아니지?”

장은정 문학평론가
(김누누, 『착각물』 추천사 전문)
장은정의 비평독자 프로젝트
2020년 10월 15일자 발행

11월 호에서는 비독 여러분의 질문으로 구성해볼까 합니다. 제게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riyunion@naver.com 으로 보내주세요. 그 중에서 다 같이 나누고 싶은 질문을 골라 답하려고 합니다. 기한은 2020년 10월 15일부터 11월 10일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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