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막에게. 나는 This is the Voice라는 책을 읽고 있다. 하도 띄엄띄엄 읽어서 ‘요즘에’ 읽고 있
 
007_행하는 자의 반복되는 목소리.
한아임 to 오막
2022년 10월
 
오막에게.

나는 This is the Voice라는 책을 읽고 있다. 하도 띄엄띄엄 읽어서 ‘요즘에’ 읽고 있다고 하기엔 애매하게, 읽기 시작한 지가 엄청 오래되었다. 나는 논픽션들을 이렇게 읽는 습성이 있다.

원래가 책을 여러 권 동시에 읽기도 한다만 (두 권을 동시에 펼쳐놓고 읽는 미친 천재라는 게 아니라, 하나를 읽기 시작하고, 다 끝내지 않은 채 다른 책을 시작한다는 말…) 그래도 소설은 한두 권만 동시에 읽는데, 논픽션은 그렇지 않다. 많을 때는 다섯 권 넘게 동시에 읽기도 한다. 그래서 한 권을 다 끝내는 데 오래 걸리는데, 이것 읽다 저것 읽다 우연히 연결고리가 발견되기도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무튼 그렇게, ‘요즘’은 아니고 읽기 시작한 지 오래된 This is the Voice라는 책의 초반 부분에 아기들과 소리, 특히 목소리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우리가 태어나기 몇 달 전부터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소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각각의 단어는 못 알아들을지 몰라도, 억양이란 것, 목소리의 톤이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우리는 아주 일찍부터 발달되어 있고, 태어나서 1살이 채 되기도 전에 구분할 수 있는 소리가 갈리는 편이라고 한다. 외국어 발음 같은 것을 말한다. 우리가 더 나이 들어서 특정 외국어 발음을 못 하는 이유는 단순히 혀 근육이 협조하지 않아 줘서가 아니라, 아예 귀로 발음의 차이를 구분하는 능력이 부족해서라는 것이다…!

갑자기 이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네 저번 편지를 읽고서 사람 목소리는 그 어떤 다른 소리보다 특이한 성질을 지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인간의 언어를 듣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일 때가 있다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언어를 매 순간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걸 논리적으로는 알면서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거기에 어떤 정보가 담겨 있을까 봐 자극을 처리해야 하는 기계 같다.

그래서 사람 목소리만큼 주의를 분산시키는 소리가 없다. 나는 내가 쓰는 이야기마다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그중에서는 가사 위주의 것들도 꽤 있다. 그런데 실제로 글을 쓰는 동시에 그러한 플레이리스트를 듣는 경우는 정말 정말 정말 드물다. 가장 좋은 것은 절대 고요이고, 그다음으로 좋은 것은 주변 소리를 캔슬시켜주는 소리인데, 화이트 노이즈는 너무 반복적이라 나에게 효과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Endel이라는 앱을 쓴다. 여기서 나오는 소리는 대개 지정된 비트가 없되, 일반적인 atmospheric 장르보다는 멜로디가 전면에 선다. 단, 반복되지 않는다. 그게 포인트다. 반복을 자각하는 순간, 나는 음악에 집중하게 된다.
반복과 집중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얼마 전에 읽은 또 다른 책이 있다. The Iconist라는 책이다. 이 책은 어마어마한 정보의 홍수에서 아이콘이 되려면 필요한 요소를 다룬다. 이는 마케팅 측면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분야를 막론하고 자기 것을 알리고 싶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도움이 될 만한, 너무 간결해서 어려울지도 모르는 진리(?)를 포함한다. (안타깝게도 이 책도, 앞서 말한 책도, 한국어로는 안 나온 것 같다.)
저자가 말하는 진리의 핵심은 ‘반복을 통한 집중’이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해야만 정보의 홍수 속에서 눈에 띄는 집중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반복을 한다는 걸 자각하고 있는 자는 반복하는 당사자 혼자일 확률이 무척무척무척 어마어마하게 높기 때문이다. 그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그자가 반복을 하든 말든, 관심조차 없을 확률이 너무 높다. (…ㅠㅠ…) 그러니 반복을 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데, 책에 베토벤에 대해 이런 썰이 나온다. 베토벤이 당대에 너무나 잘나가는 음악적 아이코니스트라서 (즉, 반복을 통한 집중 잘 활용해서) 당대 사람들과 비평가들에게 멜로디가 너무 “어린애스럽다”고 놀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환희의 송가”(Ode an die Freude)가 쓰인 지 수십 년이 지났을 때, 미국 음악 비평가 Philip Hale은 그 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But oh, the pages of stupid and hopelessly vulgar music! The unspeakable cheapness of the chief tune, 'Freude, Freude!’”
“하지만 오, 이 수많은 페이지의 멍청하고 가망 없이 천박한 음악이라니! 주된 튠, ‘환희, 환희!’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저렴함이라니!”
이자가 그렇게 깔본 그 반복적인 멜로디 덕분에 베토벤의 곡이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인데 말이다. 책에는 이자 외에도 ‘반복을 하지 말아라’고 주장했던 자들의 케이스가 몇 개 나오는데, 내가 느낀 건 두 가지다.

1. 직접 행하지 않는데 말로 떠드는 걸로 먹고사는 자들이 있다.
2. 그자들을 무시해야 한다.

한마디로, ‘비평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베토벤 당대에는 휴대폰은커녕 라디오도 없어서, 청중이 그 자리에서 반복되는 멜로디를 듣지 않는다면 그것이 완전히 허공에 사라져버리는 환경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더 비평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다.

이것이 ‘직업적’인 ‘비평’을 하는 자들의 맹점이다. 취향이야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다만, 취향이 취향에서 그지치 않고 업이게 되면, 대부분의 청중은 베토벤 음악의 반복 구간이 ‘멍청하고’ ‘가망 없고’ ‘천박하고’ ‘말로 형언할 수 없이 저렴하게’ 들릴 때까지 그걸 여러 번 들을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심지어, 지겨우면 그만 들으면 될 것을, 그 방법조차 까먹는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취향이 업인 자보다 업이 있어서 취향도 있는 자의 취향이 궁금하다. 
만드는 것과 그에 대해 얘기하는 것 사이에 균형을 맞출 수 있다면, 얘기하는 것이 만드는 것의 생산성을 높여주는 경우도 분명 있다. 얘기함으로써 테라피의 효과를 낼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아티스트의 창작 얘기만큼 재밌는 것도 별로 없다.

그것이 재밌는 이유는 대단한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자가 아티스트이기 때문이다. 거창한 의미의 ‘예술가’가 아니라, 뭐든 만들어내는 자를 말한다. 모든 분야가 극단까지 가면 예술이다. 요리도 그렇고, 사업도 그렇고, 스포츠도 그렇다. 최고의 음식, 어마어마한 기업, 육체의 한계까지 탐험하는 그 예술가들이—혹은 최고거나 어마어마하거나 한계까지 다다르지 않았을지라도, 그리로 가려는 자들이—그 창작의 과정에서 무엇을 겪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런 것들이 궁금한 거란 말이지.

최근에 deadmau5에 대한 유튜브 영상을 봤다. How to market Without Marketing이란 거였는데, 한마디로 deadmau5가 얼마나 자신의 창작 과정을 많이 공유하며, 그것이 팬덤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었는지에 대한 영상이었다. 완벽한 모습만 보여줄 필요가 없다. deadmau5의 창작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각종 취향이 얼마나 의미로운가, 이 말이야.
옛날 옛적에 빨래를 어마어마하게 잘 처리하는 장인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처리’라 함은, 젖은 상태에서 다림질을 하는 것부터 개는 것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그의 리듬과 템포는 정말이지 신계였다. 무아지경. 그 달인은 개어져야 할 빨래를 개며 매일 깨끗함을 생산했다.

그런 사람들의 취향이 궁금하다. 떠드는 것보다 만드는 것이 많아야 정신 건강에 이롭다.
그런 의미에서, 오막의 최근 영화 음악 작업을 축하한다.

반복은 음악에서 생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것이 영상 매체에서도 음악을 쓰는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 눈으로 보이는 영상이 화면에서 그대로 반복되면 매우 지루할 텐데, 음악 테마가 특정 느낌의 순간마다 반복되면 오히려 통일성을 준다.

드라마에서 서사의 피크 때 메인 OST가 흘러나오면, 희열이다. 그 자체가 카타르시스를 준다. 그러면 배우의 연기도, 편집도, 촬영도, 이야기도, 다 함께 두둥실 부스트를 받는다.

서사는 두루뭉술하게 머릿속에 입력되지만, 음악은 그래도 멜로디 정도는 분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기억이 소환될 때마다 서사는 곱씹어지고, 또 곱씹어지고, 다시 한번 곱씹어진다.

그리고 펀치 드렁크 러브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일단 색깔이 너무 예쁘다. 나는 왜인지 모르게 요즘 RGB라는 컨셉에 심취했다. 이것은 전혀 과학적인 심취 말고, 순전히 비유적 차원에서 어떻게 써먹을까, 그러한 심취를 말한다. 이 영화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지금 다시 보니 이것이야말로 RGB 무드였던 것. 뭔가 빛이 그렇게 갈린다는 게... 일단 예뻐. 

네 말을 듣고 펀치 드렁크 러브의 음악에 집중해 보니 음악도 좋구나. 서사에 음악을 붙일 수 있다는 건 영상 매체의 엄청난 힘 중 하나다.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글 매체로 작업하는 사람 중 가장 ‘노래한다’는 느낌이 들었던 작가는 척 팔라닉이다. 이 형님은 파이트 클럽 원작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 꼭 반드시 필히 책으로 읽으면 더욱 좋을 것…! 나는 서바이버자장가 등을 읽었는데, 한국어로도 나와 있는 것 같다.

이분 서사에는 소리가 엄청 많이 나온다. 소음도 많이 나온다. 그래서 서라운드 사운드의 느낌으로 재밌다.
근데 진짜 오막 어떻게 Four Tet 몰라?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뮤지션이기에, 이번 기회를 틈타 나도 너를 간첩 취급하겠다…!

김태준 형님의 음악도 들어봤다.

Justin Bieber - Peaches (김태준 Remix)
나는 이런 꿈세계 같은 뾰로롱 소리를 좋아하는 듯...
이 원곡 자체가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저스틴 비버 노래다. 박자를 너무 끌면 어질어질할 때가 있는데, 딱 안 그런 선에서 살짝 끌어주는 게 너무 절묘해서 '이거 누구?' 하고 봤더니 저스틴 비버더라... 역시 비버는 전문가였어. 비버의 매력을 몰랐던 내가 필립 헤일이다.

나도유명해지고싶다 - 김태준
분명 음악 외적인 것에 끌려서 클릭하게 되는 경우가 다분히 있다. 이 경우에는 제목 때문에 클릭. 띄어쓰기가 없는 것이 매력… 정말로다가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이 느껴지는 것…!

김태준 형님은 혹 음악에 관한 글을 쓸 의향이 있으신지 얘기해 봤어? 안 했으면 해보길 바란다. 만드는 것과 얘기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맞춰보자.
- 행하는 와중에만 목소리를 내고 싶은
아임이.-
이번 편지를 보낸 한아임은...
아무 데에도 아무 때에도 있었던 적 없는 세상, 그리고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하는 세상 사이의 해석자다. 원래도 괴란하고 괴이하고 괴상하며 해석함 직하다고 여기는 것도 여러모로 괴하다. 이런 성향은 번역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오리지널 스토리텔링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이러나저러나 결과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뭐 하고 사나, 뭘 쓰고 뭘 번역했나 궁금하면 여기로. https://hanaim.imaginariumk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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