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 호
(통권 90호) 2023. 12. 4
🌎 열린 세미나 🌏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그리고 한반도 



12월 시사토론 세미나 주제는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그리고 한반도>입니다.
전쟁의 기운이 세계로 확정되어 가는 가운데 최근 한반도에서도 여러 조짐이 일고 있습니다. 다음은 군수기업 한화의 제주 우주센터 건립에 관한 반대서명 링크게 개제된 내용의 일부입니다. (아래 서명 링크에서 입장문 전문과 더 많은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제주의 재앙이 될 한화우주센터 건립 철회하라!

- 전쟁장사기업 한화의 우주센터 건립을 반대한다!-
- 생태계 파괴, 기후재앙 악화, 군사화 증가시키는 로켓 발사 철회하라!-

‘민간’의 외피를 쓴 전쟁무기 기업, 한화가 ‘우주 산업’이란 이름으로 제주에 들어오고 있다.

오영훈 도정은 올해 5월 페리지 에어로 스페이스 등 4개 업체와 이른바 ‘우주산업 혁신 거점 조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은 데 이어 올 해 7월 6일 한화 시스템과 업무 협약을 맺었고 그 내용은 위성을 대량 생산, 발사하는 우주센터 조성이다. 한화(한국 화약)는 현재 팔레스타인을 대량 살상하는 이스라엘에 무기를 수출하는 등 전 세계의 분쟁 및 전쟁으로 이윤을 얻는 악명 높은 무기 기업이다.

협약시 한화시스템 대표이사는 "한화시스템은 제주도에 우주산업 전초기지를 구축” 하고 “제주도가 민간 우주산업의 허브(Hub, 중심)가 될 수 있도록 협력”할 것이라 말하였다. 우리는 제주가 전쟁무기 기업의 전초 기지가 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올해의 마지막 시사토론 시간에는 이어진 전쟁상황들과 함께  한반도에 드리운 전운에 대해서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열린 세미나에는 관심 있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 일정: 12월 7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 장소: 카카오톡 <열린 세미나> 오픈채팅방
      🔮 참가방법
  • 참고자료
  
👇  지난 세미나 갈무리  👇

 
『 #가속하라 』
로빈 맥케이, 아르멘 아바네시안 엮음, 갈무리

1, 2, 3부


 11월 23일 (목) 저녁 7시 30분

 

    🕳️ 1부 → 예견
    ▶️ 칼 맑스 → 기계에 관한 단상
    ▶️ 새뮤얼 버틀러 → 기계의 책
    🕳️ 2부 → 발효
    ▶️ 자크 카마트 →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쇠퇴인가 아니면 인류의 쇠퇴인가?
    ▶️ 질 들뢰즈 + 펠릭스 과타리 → 문명 자본주의 기계
    ▶️ J. G. 밸러드 → 모든 종류의 픽션들
    🕳️ 3부 → 사이버문화
    ▶️ 닉 랜드 → 회로들
    1부 → 예견
    ▶️ 칼 맑스 → 기계에 관한 단상
    ▶️ 새뮤얼 버틀러 → 기계의 책

    ㅈ) 맑스의 기계론에서 자본이 기계류를 사용하는 세 가지 조건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세 조건은 71쪽)

    1) 노동자가 자신의 더 많은 시간을 자본을 위해 쓸 수 있게 한다.

    2) 노동자가 자기 시간의 더 많은 부분을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시간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다.

    3) 노동자가 타자를 위해 더 오래 일할 수 있게 한다.

    결국 기계 사용은 자본에게 더 많은 노동시간을 갖다 바치는 수단으로 규정됩니다.

    최근 우리는 기계화가 노동시간을 절약하여 실업을 양산하는 장치로 사용되는 것(4차산업혁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맑스의 이러한 생각이 우리 현실과 대립하는 것일까요?

     

    ㅂ) 표면적으로 보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날은 고용되지 않은 상태로 "노동자가 자신의 더 많은 시간을 자본을 위해 쓸 수" 있는 상황이라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키오스크는 종업원의 임노동을 고객의 무상노동으로 전환하는 장치. 라는 이야기를 지난 열린세미나 시간에도 했던 것 같아요.

     

    ㅈ) 비고용노동까지 고려하면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맑스가 비고용노동의 노동시간을 노동시간으로 간주했는지는 의문입니다만. 자본론에서 기계사용의 조건은 기계의 사용에 의해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을 수 있는가 노동의 사용에 의해 그럴 수 있는가가 초점이었는데 <기계에 관한 단상>에서는 기계 사용이 더 많은 노동시간의 착취와 분리되지 않고 결합된다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또 자본론에서는 기계의 채택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무력하게 만드는 투쟁수단이라는 점도 강조되는데 여기에서 그 점은 크게 부각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ㅂ) 저도 궁금해요, 맑스가 공장 밖 노동과 공장 안 노동을 동일한 차원에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노동' '노동자' 등을 언급할 때 꼭 공장 안 노동자에만 국한하지 않은 여러 맥락들이 있고, 따라서 위 구절도 광의의 노동으로 이해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ㅈ) 비고용노동, 비임금노동이 역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ㄱ) 이 책을 편집한 가속주의자들이 맑스의 글을 포함시킨 이유가 무엇일까요?

     

    ㅂ) 맑스의 글을 가속주의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 같아요, 1부의 첫 글!

     

    ㅈ) 71쪽 끝에는 자본이 어쨌건 기계화를 하게 되면 “어느 특정한 물건 한 개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이 최소한도로 줄어든다”라는 것과 이것이 “인간노동, 에너지 소비를 최소한도로 줄인다”라는 것(72)을 강조하면서 이 과정이 노동해방의 조건을 창출한다고 씁니다. 즉 기계화의 가속이 노동해방의 전제이고 조건이라는 생각에 가속주의적 사고가 들어있기 때문에 이 책의 첫머리를 맑스의 글로 시작했다고 봅니다.

     

    ㄱ) 감사합니다. 서론으로 돌아가보니 엮은이들이 맑스의 글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개인들은 새로운 기계문화에 편입되며, 그리하여 그 세계에 적절한 사유의 습관과 패턴을 갖추게 되기에 사회적 존재자로서 불가역적으로 재주체화된다" (20쪽)

     

    ㅈ) 노동을 인간의 활동으로만 보는 관점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노동의 범주를 기계노동, 동물노동 등으로 확대하는 견해가 부상하고 있는데(<임상노동>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맑스에게서는 그런 관점이 허용되지 않는 것 같고 사무엘 버틀러에게서는 그런 관점이 열려 있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ㄱ) 그런 것 같습니다. 서론에서 엮은이들도 버틀러의 '범기계주의'가 인간의 노동에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쓰고 있습니다.

    "맑스가 매료되면서도 자본의 환상이라고 비난해야 했던 인간과 기계의 통합에 부합하는 버틀러의 시각, 즉 나중에 들뢰즈와 과타리에게 영감을 제공할 범기계주의는 인간의 노동에 어떤 특별한 자연적이거나 원초적인 특권도 부여하기를 거부한다" (20쪽)

     

    ㅂ) 맑스에게서 기계노동으로 노동의 범주 확대가 가로막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ㄱ) 맑스는 범기계주의라고 할 수 있을 관점('모든 것이 기계다'일까요?)이 자본의 환상이라고 보았고 버틀러와 들뢰즈 과타리는 범기계주의를 비인간으로 확장했다는 것이 엮은이들의 해석일까요?

     

    ㅈ) 맑스 당시의 정치경제학 논쟁에서 가치생산의 원천이 무엇이냐가 계급투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했는데 맑스는 기계에서 가치원천을 찾는 산업자본가, 토지에서 가치원천을 찾는 지주 및 농업자본가와 투쟁해야 했습니다. 노동자들의 노동이 가치원천임을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그러한 견해들과 구분되는 독자적 노동가치론을 확립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부의 원천과 가치의 원천을 구별하는 문제일 텐데 맑스는 토지와 기계가 부를 생산하지만(즉 부의 원천으로 기능하지만) 가치를 생산하지는 않는다는 매우 중요한 구별을 합니다. (여기서 가치는 교환가치)

    사회를 인간사회로 상정하는 한에서 맑스의 이 구별을 비판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맑스의 시각에서 동물, 기계, 토지는 그 자체로 인간과 동등한 사회구성원이 아니며 인간과 동등한 교환관계 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각은 자본주의 사회의 시각에 대한 실증적 서술로서 맑스가 그리는 사회가 그러한 시각에 제한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교환을 통한 사회로서 인간중심적이지만 맑스가 상상하는 코뮤니즘 사회는 교환관계가 중심에 놓이지 않는 새로운 유형의 사회이고 여기서 동식물, 기계, 자연은 인간과 교환관계를 떠나 협력 관계를 맺는 것으로 위치 지워지기 때문입니다.

     

    ㅂ) 설명 감사합니다. 맑스도 기계를 주목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노동자들이 자본에 더 많은 시간을 바치게 하는 매개체, 즉 생산수단으로써의 기계를 말하는 것 같아요, 인간노동과 기계‘노동’의 차이가 맑스에게서는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노동가치론 분석은 넘어서야 할 현실(자본주의적 현실)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여기서 쟁점은 자본의 가치법칙을 얼마나 잘 밝혀내는가이고요) 현실을 넘어서는 전망과 관련해서는 노동가치론에서의 노동, 즉 인간과 기계 노동의 구분을 넘어서는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ㅈ) 노동가치론(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가치론)을 자본주의 비판의 가치론으로 한정하고 76-77쪽에 나오는 가처분시간가치론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유형의 사회의 가치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뮤얼 버틀러는 이런 다른 가치론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인간-기계 연합체론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기계 관계론이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즉 버틀러의 관점에서는 자본주의 비판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ㅂ) 네, 오히려 현실이 그렇다는 환상을 줄 수도 있고, 이는 맑스의 말처럼 경계해야 할 지점 같습니다. 기계가 자본의 기관인 한에서 인간과 기계의 통합은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또 그렇기에 인간과 기계의 통합이 자본을 넘어서는 한 방편으로 제시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ㅈ) 네. “기계 없는 인간은 멸종할 것, 반면 인간 없이 기계도 존립이 어렵다.”라는 생각이 매우 중요한 지점을 언급하고 있지만, 자본주의적 가치관계는 그보다 한층 복잡한 관계를 인간-기계 속으로 도입하며 인간을 계급화하는데 그 점은 버틀러의 관심은 아닌 것 같습니다.

    2부 → 발효
    ▶️ 자크 카마트 →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쇠퇴인가 아니면 인류의 쇠퇴인가?
    ㅈ) 카마트는 가축화라는 개념으로 자본주의 사회현상을 비판합니다. (136쪽)

     

    ㅂ) 네, 인간의 가축화를 고려하고 자본의 자율화를 분석해야 한다는 첫 문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ㅈ) 노예화, 농노화, 임금노예화라는 고전적 계보학에 비추어 볼 때 임금노예화가 가축화라는 말보다 더 설득력을 갖는지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가축화는 맑스가 노동자가 기계의 심부름꾼으로 된다고 했을 때의 심부름꾼, 인간이 기계의 기생체로 된다고 했을 때 버틀러의 기생체 등과 동일선상에서 비유적으로 노동자의 저열한 삶의 상태를 드러내는 효과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ㄱ) 카마트가 글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쇠퇴인가 아니면 인류의 쇠퇴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답을 내리고 있을까요?

     

    ㅈ) 전자를 자신의 답으로 갖고 있겠지만 이 글에서 서술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ㄱ) 네 “자본이 모든 낡은 모순을 흡수했기에 혁명 운동은 계급 사회 발전의 산물 전체를 거부해야 한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ㅈ) 그런데 카마트는 150쪽 끝에서 “계급 사회의 산물 전체를 거부해야 가축화를 극복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여 가속주의적 지향과는 반대되는 생각을 피력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인간을 동물이나 기계와 구분 지으려는 충동이 인간주의(휴머니즘)에 내재한다고 생각됩니다. 전태일의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도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입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닌데 가축이 되고 있다는 것이 가축화 개념의 문제의식 아닐까요?

     

    ㄱ) 인간중심주의를 경계하면서 자본주의 가치생산 메커니즘을 비판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ㅂ) 문득 '가축화'라는 표현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기계노동과 인간노동을 동일시하는 것이 자본 비판에 한계로 작동하듯이 인간 노동을 동물노동과 유사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가축화'라는 표현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아요.

    카마트는 생산력 발전(즉 기계의 발전)은 계급 사회 발전의 산물이 아니라고 보는 것일까요?

     

    ㅈ) 생산력 발전, 특히 그중에서도 기계적 생산력의 발전(생산력의 발전은 이보다 훨씬 광범한 개념)도 계급사회 발전의 산물인데 맑스가 생산력 발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데는 문제가 있다는 관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읽혔습니다.

    맑스는 기계발전 말고도 노동자들의 조직 정도, 분업의 발전 정도, 지식의 발전 정도 …등등을 모두 생산력 개념에 포함시킵니다.

     

    ㄱ) 좌파 가속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이루어진 과학 발전을 혁명적으로 재정향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은데 카마트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혁명적 해결책은 개인이 모순의 한 요소일 생산력의 변증법의 맥락에서 발견될 수 없다.” (149쪽)

     

    ㅈ) 이런 점에서 카마트의 생각은 원시주의와 결합될 가능성이 높은 사고방식으로 읽힙니다.

     

    ㅂ) 카마트의 "인간 종의 가축화"를 비판하는 것도 휴머니즘의 한 표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글의 제목에서 "생산양식의 쇠퇴"와 "인류의 쇠퇴"를 구별하는 것도 의미심장한데요, 인간과 동물의 구별하듯, 인간과 기계를 구별하는 경향도 읽힙니다.

    2부 → 발효
    ▶️ 질 들뢰즈 + 펠릭스 과타리 → 문명 자본주의 기계
    ㅈ) 들뢰즈 가타리는 “156: 기계들 역시 노동한다.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157: 기계잉여가치와 인간 잉여가치는 흐름의 잉여가치 전체를 구성한다.“라는 도발적인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나눴던 대화 속에서 이미 일정하게 이야기된 것인데 여기서 가치/잉여가치가 맑스가 사용한 가치/잉여가치라는 용어와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맑스는 가치와 부를 명확하게 구별하는데 들뢰즈와 과타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나는 들뢰즈 가타리의 흐름의 잉여가치 세계는 맑스가 미래로 미루어두었던 사물들, 동식물들, 인간들 사이의 코뮤니즘적 관계를 현재 속에서 읽어내려는 시도로 이해합니다.

     

    ㅂ) 들뢰즈와 과타리에게는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구별이 없다는 의미로 보아도 좋을까요?

     

    ㅈ) 구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을 자신의 이론 전개의 핵으로 삼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버틀러를 이야기하면서 자본주의 비판은 불가능하지만 인간사회 너머의 다른 사회를 사고하는 데는 도움을 준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사회 너머의 사회가, 부르주아 사회 너머의 사회가 자본주의 속에 내재한다면 버틀러나 들뢰즈와 과타리의 사고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네그리가 말해온 ”잠재적 코뮤니즘“ 혹은 ”코뮤니즘의 내재성“ 개념과도 통합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사회의 차원에서는 인간노동을 착취하지만 인간사회 너머의 사회(가령 생태사회)에서는 동식물, 미생물, 기계, 대지 등을 수탈합니다. 전자는 교환관계에 의해 규정되지만, 후자는 가치관계 밖의 것들과의 관계입니다. 맑스가 미래에 중요한 삶의 문제로 등장하리라고 보았던 코뮨 사회가 현재, 부르주아 사회 속에서 작동하고 있고 심지어 자본주의 발전의 중요한 동력으로 전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맑스주의를 혁신할 핵심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내재적 코뮤니즘에 대한 주목이 인간사회에서의 교환가치의 지배라는 현실을 간과하는 것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ㅂ) 부르주아 사회 너머의 사회가 자본주의 속에 내재한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모순을 품고 있다는 생각과 같은 아이디어로 볼 수 있을까요?

     

    ㅈ) 변증법적 모순보다는 적대의 차원을 구성하는 힘이라고 생각됩니다.

     

    ㅂ) 네, 글에서 생산과 반생산에 관한 논의가 적대의 차원을 구성하는 힘이라는 말씀과 연결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변증법적 모순과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모르겠어요.

     

    ㅈ) 들뢰즈는 (코뮤니즘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노동력 이전의 역능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포획들을 넘어서는 탈영토화를 자신의 정치철학적 이념으로 설정할 수 있었습니다. 자본은 그 역능(에너지)의 포획을 통해 발전하는데 그것은 그 에너지를 부단히 이동시키는 “전위와 변형”(188쪽)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 경과의 가속 외에 변혁의 다른 방법은 없다고 본 점에서 가속주의 슬로건과 정확히 부합하는 생각을 제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역능의 전위와 변형의 경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긴 토론 거리로 남아 있다고 해야 하겠지요.

     

    ㅂ) ‘통합에 의한 창조’와 ‘전위와 변형’의 차이로 일단 정리해 두었습니다.

     

    ㅈ) 예컨대 자본과 (자본의 것으로 포획된) 노동력(가변자본)의 관계는 모순으로 볼 수 있겠지만 자본과 삶의 관계는 모순이 아닙니다. 자본이 노동을 필요로 하듯 노동은 자본을 필요로 하지만 삶은 자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ㅂ) 설명 감사합니다. 좀 더 음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ㄱ) 갈무리에서 곧 들뢰즈의 <대담>이 출간될 예정인데요, 네그리와의 대담에서 마침 들뢰즈가 모순을 논하는 구절이 있어서 공유합니다. 들뢰즈의 답변 일부입니다.

    “『천 개의 고원』은 많은 방향을 지시하고 있지만 주요한 세 가지 방향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우선 사회는 모순에 의해서보다도 도주선들에 의해 정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회는 사방으로 도주하며, 이런저런 계기에 도주선들이 그려내는 선들을 따라가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 『천 개의 고원』에는 다른 방향이 있는데 그것은 모순보다는 도주선들을 다룰 뿐만 아니라 계급이 아닌 소수자들을 다룹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방향은 ‘전쟁기계’의 지위를 탐색하는 것인데요. 이 기계는 전쟁에 의해 정의되는 것은 전혀 아니고 시공간을 점유하거나 채우는 어떤 방식, 혹은 새로운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방식에 의해 정의되는 그런 것입니다.”

     

    ㅂ) 추가 자료 고맙습니다.

    2부 → 발효
    ▶️ J. G. 밸러드 → 모든 종류의 픽션들

    ㅈ) 밸러드의 과학소설론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과학소설은 미래의 통화이며 강한 협동의 산물이고 위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픽션이다, 등의 내용이 기억에 남습니다.

     

    ㄱ) 저는 이 대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현대 과학소설 작가들이 오늘 발명하는 것을 당신과 나는 내일 실행할 것이다." (236)

     

    ㅈ) 루카치는 소설을 부르주아 시대의 서사시라고 불렀는데 과학소설은 그 부르주아 시대에 내재하는 코뮤니즘의 서사시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학소설을 거의 읽지 못했지만^^ 밸러드의 말대로라면 그렇다는 의미입니다)

     

    ㅂ) 저도 과학소설 작가의 익명성을 논하는 부분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익명의 소설에 바치는 비평은 어떠해야 하는가도 흥미롭고 중요한 생각거리인 것 같습니다.

     

    ㅈ) 비평가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던 것 같던데요, 안 그런가요?

     

    ㅂ) 네, 과학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시대착오적 비평가들에 대한 비판이었던 것 같아요.

    3부 → 사이버문화
    ▶️ 닉 랜드 → 회로들
    ㅈ) 닉 랜드는 우파가속주의로 분류되곤 하는데, 1992년에 쓴 회로들은 오히려 아나키즘적인 느낌을 주었습니다.

     

    ㅂ) 4부에도 닉 랜드의 글이 있는데, 시기적으로 나중의 글이겠지요? 다음 시간에 비교해서 이야기해 보아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ㅈ) 사이버네틱스 개념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사용되는데 랜드가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는 좀 더 면밀하고 확대된 독서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그것이 들뢰즈와 과타리의 기계적 무의식, 기관없는 신체, 분열증 등의 개념을 나름대로 전유하여 사용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입니다.

     

    ㄱ) 저는 그 글에서 닉 랜드가 사이버네틱스라는 낱말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ㅈ) 이것(사이버네틱스 개념) 역시 오늘 이야기한 내재공통장(내재적 코뮤니즘, 잠재적 코뮤니즘 등을 이렇게 표현해 봅니다)을 “발견되어야 할 방대한 외계”(263에서 랜드는 분열증을 이렇게 표현합니다)로 파악하는 데 유익한 글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ㄱ) 최근에 랜드는 상하이에 살고 있고 근황이 이렇다고 합니다.

    "랜드는 또한 나중에 신반동주의와 그가 명명한 어둠의 계몽주의의 근거가 되는 반평등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인 생각을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합니다."

    "Land is also known for later developing the anti-egalitarian and anti-democratic ideas behind neo-reaction and the Dark Enlightenment, which he named."(위키피디아)

     

    ㅂ) '어둠의' 계몽주의라는 표현이 흥미로운데요. 이것이 어떻게 반평등과 반민주로 발전되는지 궁금해지네요.

     

    ㅈ) 그 변화의 계기들이 궁금하군요.

     

    ㅂ) 닉 랜드의 글은 다음 시간에 더 확장된 논의를 기약하며, 오늘 세미나는 이쯤에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
    진실연대자가 추천하는 책

     
    『자기생성과 인지
    살아있음의 실현』


    움베르또 R. 마뚜라나
    프란시스코 J. 바렐라
    정현주 옮김

    진실연대자 정현주 님의 번역서, 『자기생성과 인지』살아있음을 실현하는 조직의 기제로서 ‘자기생성’ 개념을 제안하는 책입니다. 다음은 [한겨레 책&생각]에 실린 서평의 일부입니다. 

    ‘닫힌 세계’, 인지의 창의성…
    그래서 혁명도 가능하다

    움베르토 마투라나(1928~2021)는 ‘자기생성’이라는 개념을 창안한 칠레 생물학자다. 마투라나의 초기 연구는 신경생물학에 집중됐는데, 이 연구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두 편의 논문이 1969년 발표한 ‘인지생물학’과 1972년 동료 생물학자 프란시스코 바렐라와 함께 쓴 ‘자기생성: 살아 있음의 조직’이다. ‘자기생성과 인지’는 이 두 편의 논문을 묶은 책이다. 
    (...)
     마투라나는 일종의 ‘도약’을 감행한다. ‘살아 있는 체계’를 열린 체계가 아닌 닫힌 체계로 본 것이다. ‘살아 있는 체계’가 외부와 신진대사를 통해 상호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은 이 체계가 ‘자기에 준거하는 폐쇄적 시스템’이라는 사실이다. 살아 있는 체계는 외부의 목적을 향해 작동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스스로 완결되는 시스템이다. 이 생명 체계의 특성을 설명하는 말로 마투라나가 창안한 것이 자기생성 곧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다. 그리스어에 기원을 둔 오토포이에시스는 ‘자기를 스스로’(auto-) ‘만들어낸다’(-poiesis)는 뜻이다. 자기가 자기를 생산하는 자기생성이야말로 세포-인체-사회를 아우르는 ‘살아 있는 체계’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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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살아 있는 체계는 자기생성 체계이며 이 자기생성 체계는 인지를 통해서 자기를 형성하고 유지한다. 자기생성 체계는 인지 과정이 있는 동안만 존재한다. 인지 없는 생명은 죽은 생명이다. 그러므로 자기생성과 인지 과정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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