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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 문제로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이 두 번 있다. 한 번은 재직 중인 회사의 사장, 한 번은 친구 때문이었다. 나는 이들의 괴롭힘으로 심각한 우울증과 알코올 의존을 겪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곤 기괴하고 고약한 성격뿐이었는데, 가까스로 해방된 후에도 오랫동안 그들의 영향력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억울하면서도 궁금했다. 나이도, 성별도, 성장 배경도 모두 다른 타인끼리 어떻게 성격 하나만 똑같을 수 있을까? 나는 왜 바보처럼 비슷한 유형의 악인에게 두 번이나 당한 것일까? 아니, 애초에 그들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기적이고, 거짓말을 잘하고, 뻔뻔하고, 공감 능력이 하나도 없다는 설명을 주절주절 늘어놓곤 했다. 그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언제나 분노가 끓고 손발이 떨렸으므로 진실해 보였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들을 한 마디로 정의할 언어가 없었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차례차례 정신과에 보내면서 본인은 절대 가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명명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악마나 사탄이라 하기엔 그들의 교묘함은 인간적이었다. 미쳤다고 하기엔 그 모습이 오히려 임기응변에 강한 리더형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술자리에서 그들에 대해 장황한 하소연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내가 더 미친 사람 같아 보였고, 떨떠름한 주변인들의 반응에 지치기도 여러 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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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명은 ‘Narcissus’, 꽃말은 자기애(自己愛)를 가진 수선화


비로소 그들의 정체를 찾은 것은 <나르시시즘의 심리학>이라는 책에서였다. 내 젊은 날을 크게 훼손하고 보상도 없이 사라진 그들은 고작 그리고 무려 ‘나르시시스트’였던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들과 있으면 통제당하고 조종당한다는 느낌을 받거나 무력감과 분노를 느끼고 감정의 롤러코스터 위에 올라탔다는 느낌에 시달리게 된다. 이들은 강력한 힘의 장(Force Field)을 생성하는데, 저항도 어렵거니와 일단 끌려들어 가면 제어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유아기에 해결하지 못했던 자기애적 취약점들, 그것이 무엇이든 이들은 바로 그 부분을 공략한다. (29p)”


널리 알려진 대로 나르시시즘은 그리스 신화 속 나르키소스 설화에서 기원한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서 다루는 나르시시즘은 단순히 자기 미모에 매혹된 거울 왕자 개념이 아니다. 한 마디로 자기애지만 본질적으론 ‘자기애의 과잉으로 일그러진 인지 상태 전반’을 의미한다. 나르시시스트 주변인들이 반드시 괴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타인을 별개의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자신의 왜곡된 환상을 지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자신만 중요하고, 우월하며, 특별하기에 자신을 제외한 군중은 사소하고 열등하며 평범한 존재로 격하한다. 따라서 그들은 당당하다. 진짜로 ‘나에게만 자격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때로는 먼저 고개를 숙이고 겸손을 떠는 듯한 위장술을 쓰기도 하지만, 어딘가 공허하고 거짓된 태도라 금방 위화감이 느껴진다. 애석한 일이지만, 아무도 그들을 바꿀 수 없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 스승은 물론 본인조차 스스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대부분 나르시시스트들이 나르시시즘에 오염되지 않은 기준과 관점을 가져본 적 자체가 없으므로.  


책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생후 2~3년 동안 정상적 발달 과정의 하나로 나르시시즘 시기를 거친다고 한다. 세상에 오로지 자신뿐이라 엄마 또한 ‘나’로 감각되는 시기, 그래서 엄마가 자신을 품에서 떼어내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시기 말이다. 아기는 엄마와 자기가 완벽한 일체라는 환상이 깨질 때 최초의 수치심을 느끼는데, 이때 양육자가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정서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 시기의 양육자에게 적절한 관심과 사랑, 피드백을 받지 못한 아이는 유년기 나르시시즘에 고착되고, 사회로 나가 파멸적 행동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유아기를 떠나보내지 못한 어른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만난 악인들의 행동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들은 분명 나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인격적 결함이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 또한 부적절한 양육 환경의 피해자일 수도 있다. 


이상하게도 이 모든 게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약간 위로가 됐다. 물론 이 책을 미리 읽었다 해도,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이 분야를 전공한다고 해도 이들을 피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나르시시스트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나르시시스트 성향을 관대하게 봐주며, 이를 ‘카리스마’의 일종으로 분류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도 낭만적이다. 나르시시즘 대신 ‘타인 착취자’ 따위의 단어를 쓴다면 아무도 이 타이틀을 탐내지 않을 거다! 경험과 지식으로 나름 무장했다지만, 나 역시 세 번째 나르시시스트를 만나 고생하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그래도 알고 당하는 것과 모르고 당하는 것은 분명히 다를 것이라 생각하며,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안녕을 바란다.



Writer 정지음
싫은 것들을 사랑하려고 글을 쓰는 1992년생. 25세에 ADHD 진단을 받은 이후 첫 번째 에세이 〈젊은 ADHD의 슬픔〉으로 제8회 브런치 북 대상을 수상했고,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첫 소설 〈언러키 스타트업〉을 펴냈다.
- <엘르> 2023년, 5월호 발췌



덕분에 신이 나요_요주의여성 #84

<일타 스캔들><길복순>으로 감히 전도연의 정점을 논하지 말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길복순>


넷플릭스 <길복순>이 처음 공개됐을 때, 배우 전도연의 첫 번째 단독 주연 액션 영화라는 설명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니, ‘대 배우 전도연’에게 이번 작품이 본인의 이름을 내건 첫 번째 액션 영화라고?    

 

전세계 많은 구독자가 즐겁게 본 이 영화, <길복순>에서 전도연은 극의 주인공이자 주제이며 장르 그 자체입니다. ‘사춘기 딸을 키우는 베테랑 킬러’라는 설정을 제 옷처럼 입고 액션, 로맨스, 엄마와 딸 사이의 감정 연기까지 극 전체를 꽉 채웠지요. 메이드 복장으로 칼을 휘두를 때도, 레드 벨벳 슈트를 입고 후배 앞에서 ‘한 실력’을 보여줄 때도 참으로 근사한 길복순. 극의 마지막, 차민규(설경구)의 목을 베는 순간 클로즈업된 길복순의 얼굴, 두 사람의 역사와 온갖 감정이 뒤섞인 듯한 그 표정은 오직 전도연 배우여서 가능했겠지요.     

 

<일타 스캔들>에서는 또 어땠고요? 1월부터 3월까지 tvN에서 방영된 이 드라마 덕분에 주말 저녁을 훈훈하게 보냈어요. 오랜만에 드라마에 출연해 청바지를 입고 일상성 묻어나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전도연을 보는 게 즐거웠지요. <일타 스캔들>과 <길복순>으로 이어진 전도연의 승승장구가 이상하게 내 일처럼 기분 좋고 신이 나요.    

2022년 7월호 커버. 전도연은 언제나 전성기다
전도연의 데뷔 20주년을 함께 축하했던 엘르


한국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 중에 전도연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엘르> 2017년 12호에 실린 전도연 배우의 데뷔 20주년 기념 인터뷰는 제가 에디터 인생을 통틀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포트폴리오 중 하나입니다. 세상에, 전도연과 마주 앉아 주구장창 영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떨리는 마음을 감추고 마주한 배우 전도연은 차분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연기 여정에 대해 들려주었지요. 당시 제가 인상적이었던 건, 그가 아직도 너무나 ‘목말라’ 한다는 점이었어요. 배우 전도연은 자신이 이룬 성취나 영광을 곱씹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20년’이란 숫자나 ‘칸의 여왕’이란 수식에 갇히길 경계하며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이끌어 줄 캐릭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죠.

 

돌아보면, 제가 만난 대부분의 여성 배우가 그러했어요. 더 크고 훌륭한 배우일수록 ‘도취’란 없었어요.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죠. 이 길이 얼마나 힘들고 매 작품 두려움과 싸워야 하는지. 그럼에도 그들은 더 많이, 다양하게 쓰이기 원하고, 도전하기 원했어요. 그들의 겸손함과 열정에 깊이 감화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어쩐지 애잔하고 씁쓸한 기분도 들었어요. 이렇게 아름답고 탁월한 여성들이 그토록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다니.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양자경은 자리에 걸 맞는 특별한 수상 소감을 남겼지요. “여성들이여, 누구도 여러분에게 당신의 전성기는 지났다고 말하게 내버려 두지 마세요.” 그리하여 <일타 스캔들>과 <길복순>의 성공을 두고 전도연의 또 다른 전성기이니 부활이라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저 몇 년 전 마주했던 그의 ‘타는 목마름’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길 바랍니다.


긴 시간 버티고 견디고 도전한 배우들 덕분에 요즘 챙겨볼 게 많아요. 김희애와 문소리의 <퀸메이커>, 엄정화의 <닥터 차정숙>, 김서형의 <종이달>도 얼른 봐야 하는데.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고 모험을 거듭해 세상이 지은 한계를 돌파한 배우들, 그네들 덕분에 영화와 드라마 속 여성의 모습은 더욱 깊고 다채로워졌으며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도 슬며시 더 크고 먼 미래를 그리게 됩니다. 일단은, 힘내서 버티고 살아남아 봐요. 인생의 정점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까요.



Writer 김아름
전 <엘르> 피처&라이프스타일 디렉터 김아름. 다양한 목소리를 전달하는 좋은 이야기의 힘을 믿으며 책과 영화, 각종 컬처 콘텐츠를 탐닉합니다.
 - <엘르> 2023년, 4월 웹기사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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