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베이징의 가장 핫한 미디어는?

💬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뉴스레터로 '인플루언서와 미디어'에 관한 한편을 보내드리고 있는데요. 지금으로부터 42년 전, 중국 베이징에서 가장 뜨거웠던 소셜미디어는 바로 대자보였답니다. 오늘날 거대한 쇼핑몰 거리가 된 시단 지역의 담벼락에 작은 종이 한두 장이 붙었는데, 이는 곧 대자보로 바뀌었고, 금세 담장은 저마다의 의견을 담은 대자보로 가득 뒤덮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민주벽'(Democracy Wall, 民主墙)이라고 불렀습니다.

1978년은 어떤 해였을까요? 새로 집권한 덩샤오핑의 지도 아래 중국은 본격적으로 국내 체제 개혁 및 대외 개방 정책을 시작했습니다. 마오쩌둥이 죽은 지 2년이 되었고, '모든 것을 새롭게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10여 년의 문화대혁명은 거대한 '소요'로 정리되었습니다. 마치 모든 것이 변화하는 듯했던 그 시기에 민주벽 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까요? 그리고 중국 인민들은 어디로 다시 영향을 미쳤을까요?
1978년의 정치 변화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1770만 명의 ‘지식 청년(지청, 知靑)’과 문화대혁명(문혁)으로 고통을 당했던 시민들이 참아 왔던 다양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요구를 분출하기 시작했다. ‘베이징의 봄(北京之春)’이 도래했다. 

넓게 보면 ‘베이징의 봄’은 크게 네 가지 활동을 지칭한다. 첫째는 1978년 11월부터 1979년 12월까지 일 년 동안 베이징시 시단(西單)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민주벽(民主墻) 운동’이다. 둘째는 전국적으로는 60여 종, 베이징시에만 40여 종에 달하는 민간 간행물의 출판이다. 이 발행인들이 민주벽 운동을 주도한 핵심 세력이다. 셋째는 민간 간행물의 편집 조직이 중심이 되어 만 든 민간단체의 활동이다. 넷째는 1980년과 1981년에 베이징시, 상하이시, 톈진시 등 대도시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지방인민대표대회(지방인대) 선거운동이다. 

베이징의 봄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외에도 다양한 서양 사상이 등장하여 각축을 벌였다. 특히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민주 활동가들이 공산당과 마오쩌둥 사상을 비판하는 중요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에서 이런 사상을 학습했을까? 민주 활동가의 대다수가 1960년대부터 1970년대 말까지 중고등학교나 대학교가 아니라 농촌과 오지에서 소위 ‘상산하향(上山下鄉)’* 활동을 경험한 청년 학생임을 고려할 때 이는 매우 적절한 질문이다. 

해답은 1966년 문화대혁명(문혁)이 시작되기 이전에 약 200종의 서양 고전이 이미 중국어로 번역 출판되어 청년 학생들이 이런 고전을 통해 서양 사상을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학습할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 재미있는 점은, 소련의 ‘수정주의’와 서양 부르주아계급의 사상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 당국이 많은 ‘금서(禁書)’를 중국어로 번역 출판했는데, 이런 책들이 지식청년의 손에 들어가 광범위하게 읽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번역된 서양 고전을 자양분으로 삼았던 민주운동가들은 1976년의 톈안먼 사건, 1978~1979년의 민주벽 운동, 1980년의 지방인대 선거운동, 1986~1987년의 학생운동, 그리고 1989년의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는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다. 

*상산하향: 도시의 지식인 계층 학생들을 농촌 및 낙후 지역으로 보내, 생활과 노동에 종사하며 농민과 하층에 대해 재교육을 받도록 한 일종의 정치 운동. 그 이전부터 있었으나, 문화대혁명 기간에 가장 대규모의 청년들이 농촌으로 향했다.

1978년 11월부터 베이징시 시단 교차로의 동북쪽 벽에 소자보(小字報)가 출현했다. 처음에는 작은 종이 서너 장이었는데 사람들이 모이고 관심이 증가하면서 대자보가 붙기 시작하고, 결국 300미터에 달하는 긴 벽이 종이로 뒤덮였다. 사람들은 대자보를 보면서 즉석에서 토론을 전개했다. 1978년 12월 28일에는 5000여 명이 모여 정치개혁 등 다양한 주제를 토론했다. 

대자보는 몇 가지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전국적으로 관심이 있는 정치 및 역사 문제에 대한 대자보가 가장 많았다. 1950년대의 대약진 운동과 1960년대의 문혁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대자보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마오쩌둥 개인의 오류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과 함께 마오쩌둥의 오류를 옹호하는 덩샤오핑을 비판하는 대자보도 있었다. 일부 대자보는 중국도 민주와 법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밖에도 1979년 1월 1일 미국과 중국의 공식 수교가 이루어진 이후 미국과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대자보가 증가했다. 반면 마오쩌둥과 마오쩌둥 사상을 옹호하고 문혁을 지지하는 대자보도 있었다. 이처럼 대자보는 매우 민감한 문제를 다루었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를 얻었다. 

민주벽(1978~1979)의 대자보를 읽고 있는 베이징 시민들

민주벽 운동은 20~30대의 대학생과 청년 노동자가 주도했다. 이들은 문혁 시기에 홍위병으로 참가했다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상산하향’을 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정규 교육의 기회는 잃었지만 중국의 낙후된 상황과 민중의 어려움을 잘 이해했고, 국가의 앞날을 걱정했다. 문혁 시기에 많은 내부 자료가 유출되면서 상층의 권력투쟁과 하층의 피폐함 등 문혁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청년들은 속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런 배경하에서 1977년 대학입시 제도가 부활하면서 대학에 진학한 지식 청년 출신의 일부 대학생과, 농촌에서 돌아와 도시의 국영기업에 취업한 청년 노동자들은 실망과 분노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 그들은 사회적 혼란, 경제적 낙후, 원죄·날조·오심 사건이 발생한 원인을 묻고,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방안을 탐색했다. 이런 과정에서 이들은 사상의 자유와 해방, 민주, 인권, 법치를 요구하는 민간 운동을 전개했다.  

민주벽 운동은 전국적으로 다양한 조직과 간행물을 탄생시켰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민주벽 운동을 위해 많은 조직과 간행물이 만들어졌다. 민간 조직과 간행물은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었다. 공통점은 중국이 지향할 목표로 자유, 민주, 인권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반면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 사상 기반, 다른 민중 운동과의 연계 등을 놓고 이들은 크게 ‘개량파’와 ‘혁명파’로 나뉜다. 개량파는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현실을 비판하면서 현 체제의 개혁을 추구한다. 반면 혁명파는 다양한 서양 사상을 무기로 현 체제를 뛰어넘는 대안을 추구한다. 

중국 공산당은 초기에는 민주벽 운동을 지지했을 뿐 아니라 격려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시기, 과거 마오쩌둥 집권 아래 발생했던 수천만 명에 달하는 피해자들이 사건의 재평가와 복권을 요구하는 대중 청원 운동을 시작했다. 또한 도시로 돌아온 수천만 명의 ‘지식 청년’들이 실업자가 되어 일자리를 요구하자, 당에서는 이를 대규모 불안정 사태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 요소로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대중 청원 운동과 민주벽 운동이 연합하는 현상이 베이징시와 상하이시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주요 도시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중국 공산당은 이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79년 2월, 탄압에 나선다. 

─ 조영남,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 중
1권 『개혁과 개방』, 405~417쪽

💬  1978년 이후, 중국 공산당은 개혁 개방에 국민을 동원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이전까지는 허용하지 않았던 정치 참여의 권리를 보장하였는데, 때로는 허용한 범위 밖에서도 시민 운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선거 참여 등 민간의 합법적이고 효과적인 정치 참여가 제한된 상태에서 '길거리 정치'는 본격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주벽 운동(1978~1979)은 그중 하나이며, 1989년 톈안먼 사건 역시 그렇습니다

마침 오늘 6월 3일은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 모여 민주적이고 공평한 사회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냈던 시민과 학생들에 대한 무력 진압이 시작된 날입니다. 1989년 봄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6월 4일 유혈 사태로 끝났습니다. 광장에 진입하는 탱크를 맨몸으로 막아서는 일명 탱크맨(관련 영상)의 이미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중국 내에서는 아직까지 금기와 검열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당시 아시아 각국의 민주화 운동과 톈안먼 사건을 함께 연상하며, 최근 홍콩 시민들의 시위와도 연결됩니다. 
조영남 교수는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정치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중국 베이징대학교 현대중국연구센터 객원연구원난카이대학교 정치학과 방문학자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방문학자를 역임하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중국의 엘리트 정치』,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개혁과 개방』『파벌과 투쟁』『톈안먼 사건』), 『중국의 꿈』『중국의 법치와 민주주의』『용과 춤을 추자』 등 모두 열다섯 권의 저서와 많은 학술 논문이 있다현재는 중국의 통치체제중국 현대 정치사중국의 이데올로기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번 편지가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의견을 들려주세요.

민음사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1길 62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