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소녀 시절 내가 읽은 《폭풍의 언덕》은 사랑의 이야기였다. 히스클리프는 남성성의 화신이었다. 그의 거칠고 위험한 모습, 무엇보다 사랑에서 파생된 파멸에 나는 매료되었다. 그때 내가 사랑에 대해 무엇을 알았을까? 중년의 길목에서 다시 읽는 이 책은 그때의 감상과 완전히 다르다. 히스클리프는 냉혹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다. 그는 돈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모든 것을 복수의 도구로 삼으며, 타인의 감정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한다. 캐서린이 어떤 온기를 불어넣어주었다고 해도, 그것으로 그의 언 몸을 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그와 캐서린이 나눈 교감은 나르시시즘이나 소유욕에 더 가깝다. 나는 이제 이러한 자기 복제적인 감정이 사랑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만큼 나이 들었다. 한 권의 책이 시절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것은 결국 우리가 책을 통해 우리 자신을 읽는다는 뜻이다.
히스클리프의 황량한 내면은 작품 속 다른 인물들을 거울처럼 비춘다. 소설 안의 인물 중 병들지 않은 이는 없다(예외적으로는 딘 부인이 있으나 그녀는 이야기의 화자로서, 즉 모든 인물에게서 떨어져 사건을 관망하는 작가의 목소리로 기능한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개개의 인물은 고독한 운명 안에서 평안을 잃어버리고 고통과 원한에 몸부림친다. 그들은 히스클리프를 두고 괴물 같은 인간이라고 손가락질하지만, 필연적으로 그와 닮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가장 순수한 존재로 등장하는 캐서린조차 ‘내가 곧 히스클리프’라고 고백한다. “기쁨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히스클리프. 그는 비틀리고 일그러진 인간성을 대변한다. 작가는 진흙탕 같은 그 밑바닥을 가차 없이 보여준다. 인간의 내면에 손댈 수 없는 어둠이 있다는 것, 그 심연이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폭풍의 언덕》을 읽다보면 작가인 에밀리 브론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저 황야의 목사관에서 자란 어린 소녀가 어떻게 스스로를 유폐하고 오직 글쓰기에 매달렸는지, 아무런 명성도 위로도 없는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감내했는지, 소리 없이 퇴장하는 배우처럼 죽음을 맞이했는지에 대해 곱씹어보게 된다. 작가는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쓴다. 아무리 음침하고 어두운 이야기라고 해도 그 안에는 작가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아름다운 것이 들어 있기 마련이다. 이 책의 경우 그것은 물론 워더링 하이츠, 그 오래된 건물을 뒤흔드는 바람이다.
황야에서 불어오는 메마른 바람 소리는 저 오래된 비극의 배경음악처럼 이야기를 감싸고 있다. 이 소설에서 인간의 심연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자연이다. 그것은 길들여지지 않고, 측정이 불가능하며, 익숙지 않은 방식으로 생명을 이어간다. 작품 속에 반복되는 끈질긴 탄생과 맥없는 죽음이야말로 아량 없는 자연의 속성이며 허무한 인간 삶의 본질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속에 새로운 희망이 있다.
부모의 유기 속에서 야만을 습득한 헤어턴과 비극적인 운명의 희생양이 된 캐시는 언뜻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분신처럼 보이지만, 그들을 따라 파멸하는 대신 손을 잡는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삶이 다음 세대로 새롭게 이어져나감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초토화하는 폭풍이 지나갔지만, 그들은 건재하다. 그제야 모든 투지를 잃은 히스클리프는 복수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죽음이라는 안식에 접어든다.
히스클리프의 유령이 혼자가 아닌 어떤 여자와 함께 있다는 목격담을 전하는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그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책이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히스클리프에 대한 에밀리 브론테의 사랑일 것이다. 생의 시작을 지켜줄 부모도 없이 어린 시절부터 떠돌이로 짓밟히며 살아온 한 인간에 대해 쓰기 위해 황야의 집, 그 집에 사는 사람들, 한쪽 방향으로 휘어져 자라는 나무들과 히스로 뒤덮인 들판이 필요했다. 짐승처럼 울부짖고, 모든 것을 쓸어가고, 끝내 잠잠히 잦아드는 바람이 필요했다. 그곳에서 그는 영원히 혼자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