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tter from London

A Letter from London
Letter#9
2020.6.27

도로를 굴러다니던 호랑이 모양의 무언가
쓰고 난 다음 날 부엌에서 이 글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때 물을 마시러 들어온 플랫메이트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자존감이 높은데 동시에 자존감이 너무 낮아, 나는 나를 정말 믿는데 또 전혀 못 믿겠어. 이게 말이 되니? 플랫메이트는 완전 말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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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진을 했다. 여태 승진이란 걸 해본 적이 없어서 무려 생애 첫 승진이다. 드라마에서는 이럴 때 축하를 받고 한턱을 쏘고 그러던데 나는 울며 겨자를 씹어 삼키는 기분이다. 월급 인상도 직무 변화도 없는, 이름표만 바뀐 이유를 모를 ‘승진’의 의미는 무엇일까 눈치를 살펴야 한다. 

십 대 때는 꼬박꼬박 출석하고 과제를 빼먹지만 않으면 다음 학년으로 승급을 한다. 나는 특별히 몸이 아프지도 유급을 할 불우한 사정이 있지도 않았으니 한국에서는 3월 외국에서는 9월이 되면 좋든 싫든 마지막 계단에서 발을 떼고 동료들과 친구들과 모두 함께 다음 층으로 올라간다. 1월 1일이 되면 해를 나타내는 숫자가 하나 올라가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때는 그 속도가 지루하고 느리고 답답했다. 학생 딱지를 떼고 사회로 배출되었을 때 나는 더는 느려터진 계단이 아니라 멈추지 않는 에스컬레이터위를 뛰어 힘차게 위로만 올라갈 것이라는 철딱서니 없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학교 밖의 세상에서는 에스컬레이터가 있기는커녕 계단을 이용해 어디론가 가는 것 조차 힘들었다. 호그와트의 마법에 걸린 계단처럼 종잡을 수 없이 움직이는 사회의 계단은 누군가가 밟고 올라가기를 최선을 다해 거부하는 것 같았다. 해리 포터를 연기한 다니엘 래드클리프가 움직이는 계단을 토끼 눈을 뜨고 바라보는 장면이 영화에 3초 정도 나온다. 영화 밖에 사는 나는 그것을 능숙하게 타고 오르는 이들을 멍하니 보는 것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쩌다 용기를 내어 절묘한 타이밍에 계단을 오르기라도 하면 금세 내리막길로 바뀌어 버리기도, 그러다 밑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해리 포터의 금수저 핏줄도, 타고난 마력(?)도 없는 나는 마법의 계단을 타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순간 나는 포기란 것을 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은 오기로 바뀌었다. 자존감과 자존심이 모두 센 내가 방어본능으로 만들어낸 이상 혹은 망상일지도 모르지만, 오르지 못할 계단을 올라보겠다고 버둥거리는 것보다 나만의 계단을 지어버리겠다는 각오였다. 하지만 듣기에는 낭만적이고 호기로운, ‘나만의’라는 말이 들어가는 거의 모든 결심은 구질구질한 버티기와 끊임없는 자괴감을 동반한다. 

버티기가 필요한 이유는 사회인으로 생존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계단에 올라타 적당히 버티며 틈틈이 그곳에서 내려와 내 것을 쌓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받는 만큼만 일하고 책임지는, 언제든지 폴짝 내려가거나 설사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 정도의 위치에서 버텨야 한다. 자괴감은 버티기를 위해 하는 일이 다른 누군가의 계단을 짓는 일을 해야 할 때 발생한다. 어리고 흐릿하지만 꿈틀대는 에너지로 가득한 꿈속으로 걸어 들어가 마치 나의 것인 양 그것을 현실로 만들고 나면 타임 오버. 나의 흔적을 지우고 현실로 돌아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매니저’의 일이다. 당신의 세계를 경험하고 그것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어 뜻깊었습니다. 당신의 행보가 기대되고 모든 일에 행운이 깃들기 바랍니다. 전시를 마친 작가들에게 보내는 응원과 감사의 메일을 쓸 때마다 언제가 나도 이런 이메일을 받아볼 수 있을까 상상해본다. 방치된 나의 꿈이 그제야 생각나고 얼굴은 울상이 되어 전송 버튼을 누른다. 황폐해져만 가는 것이 나의 꿈이고 짓다 만 계단이다. 

사실 승진을 한 것은 두 달 전이다. 그날은 나의 중간 보스를 뽑는 면접 날이었다. 디렉터는 나를 이제 매니저로 승진시킬 것이니 주말 동안 ‘나는 매니저’라고 수시로 말하라고 했다. 마치 이름 바꾼 사람에게 하는 조언처럼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직함 외에 달라지는 것이 없어 별 생각없이 알았다고 했지만, 매니저라는 말이 너무 싫었다. 적당히 버티려는 나의 전략이 들통났거나 내가 일에 너무 소극적이라 책임감을 심어주려는 속셈이라고 제멋대로 해석했지만, 나의 직감이 맞을 것이다. 두 달 동안 새 직함을 내뱉지도, 이메일 서명도 바꾸지 않았는데 얼마 전 월급 영수증에 새 직함이 적혀있어 마지못해 이메일 서명도 수정했다. 돈이 이런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매니저라는 새 이름표는 생각보다 아주 강력한 힘이 있었다. 무엇 하나가 잘못되어도 내 책임인 것 같고 모든 관련 업무에 총대를 메야 할 것 같았으며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척척 해내는 능숙한 매니저가 되어야 할 것 같았다. 하루아침에 말이다. 나는 그럴 능력 혹은 마력이 없음으로 글을 쓰고 책을 읽던 출근 전 새벽 시간은 하루 업무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것으로 다급하게 보내버리고 창작과 사유를 하던 퇴근 후 저녁 시간은 그날 하루 쌓였던 스트레스와 실수를 만회하려고 리서치를 하는 것으로, 주말은 밀린 집안일과 사이드 프로젝트를 해내는 것으로 채워진다. 

서명까지 바꾸고 몇 차례 진행한 온라인 토크쇼에서 스스로 매니저라고 소개해 버렸으니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이름, 직함 그게 뭐라고. 라고 생각하던 인간이 나였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주인공인 치히로가 센 이라는 이름으로 목욕탕 일을 하다 본명인 치히로를 잊어가는 것이 우스웠다. 자기 이름을 왜 몰라? 근데 내 이름이 진짜 뭐더라? 가끔 잊고 산다. 여러 개의 이름과 자아를 얻기도 하고 잃어버리고도 하면서 그 영화는 나에게 동화가 아니라 실화가 되었다. 이제는 나도 알지 못했던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얼마나 강렬한 일인지 그리고 불리지 않는 이름과 그것의 자아가 얼마나 쉽게 잊히는 지 안다. 

지금 일터에서 일을 시작한 지 석 달 쯤 되는 날 오프닝 행사가 있었다. 상사가 나를 사람들에게 소개했고 내 포지션은 육아 휴직으로 자리를 비운 사람을 포함해 여러 인물이 거쳐 갔기 때문에 썬이 새로운 모이라, 테가, 페르난도라고 농담을 했다. 그중에 누군가가 받아쳤다. 썬은 그냥 썬이야. 집에 가스불을 켜두고 온 것이 갑자기 생각났을 때처럼 현기증이 났다. 현기증을 꾹 눌러 삼키고 활짝 웃었다. 그래, 맞아. 우리 모두 함께 즐겁게 웃었다. 나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해준 그 말만 그날의 기억에서 싹둑 잘라 머리속 깊숙이 박아 두었다.  
지난 편지에 사진으로 첨부한 Arthur Jafa Love is the Message, The Message is Death 15개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이틀간 동시에 온라인으로 상영합니다. 2 런던에서 작품을 친구들과 관람했을 엄청난 힘에 압도당해 간신히 걸어 나왔던 것을 기억합니다. 세상을 바꾸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작품 앞에서 우리가 고민하고 만들고 있는 모든 것이 하찮고 비루하게 여겨졌습니다.  

[Live] 박상영 작가 라이브! 오늘 밤은 굶지 않는 야식 상담소 
글이 써지지 않아 유튜브에서 박상영 작가와 김하나 작가의 고민 상담 토크쇼를 봤습니다. 말이 청산유수로 나오는 작가는 고민 상담을 해주는 같지만 결국 본인들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임을 있습니다.

Ogmios School of Zen Motoring Ep 2 - Street Parties | ASMR DASHCAM |
데쉬캠을 달아놓고 런던은 운전하는 영상입니다. 길거리에서 목격한 황당한 상황에 고요하게 반응합니다. 매우 피로했던 어느 날 친구에서 소개받은 이 영상은 십 분 만에 모든 스트레스를 풀어주었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The 100 Years Show at Lisson Gallery
카르멘 헤레라는 105세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리손 갤러리에서 공개한 작업실에서 스케치를 하는 105세의 헤레라를 보면 말을 이해합니다. 100세를 기념해 제작된 다큐멘터리를  리손에서 공개했는데 아직 보지는 못했습니다

총알을 삼켜라, 노재윤
노재윤 작가의 영화 총알을 삼켜라 입니다. 플래시를 설치해야 해서 작품을 없어질 같습니다. 플래시 서비스를 중단한다고 들었기 때문인데 사실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사라지기 전에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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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명곡 일곱 번째
어느덧 서울의 낮 기온이 30도인 날씨입니다. 올 여름은 대체 얼마나 더우려고 벌써 이럴까요. 여러분들은 여름이면 생각나는 추억의 노래는 무엇인가요? 쿨? 듀스? 저는 왠지 이 노래가 더위를 식혀주는 것 같아요.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것 같거든요. (우리나라 명반으로 손꼽히는 이 앨범을 다 들어보세요!) 


 From. DJ 나경.. 

A Letter from London Archive 에서 지난 편지를 볼 수 있습니다. 

박선주
sunpark.spac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