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렸을 때 다닌 영어학원은 이름이 ‘ENGLISH 2020’이었어요. 2020년의 주역이 될 아이들을 위한 학원이다 뭐 이런 뜻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어린 나이에 2020년은 모든 게 바뀌어 있을 것 같은 시간처럼 느껴졌고, 서른 살의 나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만 같았답니다. 2020년은 정말 세상이 바뀐 것처럼 느껴지는 한 해인데, 늘 세상이 바뀌길 바랐지만 실제로는 예상하지도 바라지도 않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한 달, 두 달이면 지나가리라고 생각한 문제가 도통 끝날 것 같지 않고, 이제 정말 우리의 일상이 바뀌었음을 인정해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에 우울합니다. 

그래도 지난 주말은 하지+부분일식 이벤트로 모두들 들뜨는 하루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는 1년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날이기도 한데요. 올해는 마감에 치여 해가 뜨는지 지는지도 모르고 책상에 앉아있었습니다. 한숨 돌리려고 6시쯤 SNS에 들어가보니 부분일식 파티는 이미 끝났고 저는 많은 분들이 올려주신 사진을 보면서 기분 전환을 했습니다. 

오늘부터 함께해줄 친구B는 동시대 연극을 소개합니다. 저도 대학생 때는 종종 소극장이나 예술극장 연극을 보기도 했는데, 이제는 극장에 안 간지 꽤 오래 된 것도 같습니다. 요즘에는 어떤 연극이 있는지, 코로나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공연계는 어떻게 공연을 지속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 연극에는 간단한 규칙이 있습니다. 락 페스티벌처럼 종이 팔찌를 차고 입장한 관객들은 막과 막 사이마다 자유롭게 무대와 관객석을 드나들며 공연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배우의 연기는 무대 위 구석구석 설치된 모니터로 생중계됩니다. 공연 중에 화장실에 가도 되고, 무대 구석에 마련된 매점에서 주전부리를 사 먹을 수도 있습니다. 연기하는 배우들을 마음껏 촬영해도 되고, SNS에 실시간으로 찍어 올려도 상관없습니다. 대기실의 경계도 없어서 무대 왼쪽에서는 곧 등장을 앞둔 배우들이 분주하게 분장을 하고, 대기 중에도 자기 캐릭터를 지키며 무대를 어슬렁거리는 관객들과 장난을 주고받습니다. 

이처럼 관객이 극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형태의 공연을 '이머시브 시어터(Immersive theater)'라고 합니다. 브로드웨이의 연극 〈슬립 노 모어〉가 가장 유명한데요. 이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형태의 무언가는 너무나 다양하고 많아서, 인스타그래머블하고 텐저블한 오프라인 경험에 거는 사람들의 기대치가 점점 높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이 작품은 그런 기대를 한 번에 충족시킬 수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무대는 뉴스 스튜디오 또는 거실처럼 꾸며져 있습니다. 정장을 입은 로마 정치인들이 전쟁을 일으키거나,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거나,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주거나, 추악한 사생활을 폭로 당할 때, 무대 위 수많은 스크린에서는 쉼 없이 현장의 뉴스 속보, 인터뷰, TV 토론이 쏟아져 나옵니다. 때로 스크린 위에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의 죽음이 사진처럼 박제되어 확정되면, 관객들은 일제히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고 플래시를 터뜨립니다. (몇몇 죽음 앞에서 저 역시 열심히 사진도 찍고, 핫도그🌭도 사 먹었습니다.) 슬픔이 폭소로 바뀌는 순간에도, 소란한 순간에도, 소멸의 순간에도 사람들은 사진 찍어 올리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건의 목격자이면서 뜻밖에 방관자가 되는 아이러니한 경험이었는데요. 몰입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철저히 개인의 선택이었습니다. 비극은 본래 고결한 자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현대 사회의 비극은 철저히 가십의 영역에 놓인 것 같았달까요.

연극을 향한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연극은 평면인가? 둘째, 고전은 유의미한가? 셋째, 무대는 관객 불가침의 영역인가? 〈로마 비극〉은 셰익스피어의 시대에 존재했을 법한 원형 극장을 현대 극장에 옮겨, 막과 막 사이를 분절적으로 구획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동하는 관객을 통해 유기적으로 흐르게 하면서 연극을 입체적인 광장으로 바꾸는 작품이었습니다. 

과거의 정치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법과 민주주의는 비합리적이고, 국가는 폭력적이며 대중은 쉽게 분노하고 잊어버립니다. 다만 〈로마 비극〉은 오늘날 정치를 이처럼 쉽게 단정 짓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리 두기를 통해 미디어로 필터링한 사건을 보여주면서 현실 정치의 의제를 관객이 직접 선택하도록 전환합니다. 동시에 원작의 몇몇 남성 영웅 배역을 여성 배우가 연기하게 함으로써 고전의 한계를 극복하고 현대 연극이 가 닿을 수 있는 다채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로마 비극〉의 막이 내림과 동시에 스크린에 정치에 관한 질문이 연이어 상영되었는데요. 그중 짧고 강렬한 한 가지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정치는 전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