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스릴러 #박서련 #장혜영

[주말에 뭐 읽지]  2021-01-29 #42

책, 책방, 사람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주말의 책꽂이

photo by pixabay  
 
K-여성과 고딕 스릴러가 만났을 때
강화길, 손보미, 임솔아 외 5명 지음 
은행나무 펴냄  

격월간 문예지 〈악스트〉에서 기획 연재물로 ‘여성 서사-고딕 스릴러’를 선보인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기대감보다는 의아함이 더 컸음을 고백해야겠다. 후일 이 기획이 단행본으로 나왔을 때, 제목이 ‘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인 것을 알고 역시 그렇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아는 한, 모든 여성 서사가 스릴러적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즉 여성 서사라는 대분류 안에 있는 작품들 전반에 불안과 고통이 이미 드리워 있는데, 거기에 고딕 스릴러라는 구체적 장르를 더하는 것은 단순한 동어반복이 되지 않는가. 이것이 나의 의구심이었다.  

그럼에도 역시 읽기로 한 것은 이 테마 앤솔러지에 참여한 작가들 다수에게 품고 있던 강한 신뢰 때문이었다. 작품을 읽어가는 동안 내 의구심이 틀렸음을, 아니 그보다는, 내 편견을 고쳐 써야 한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게 되었다. 고딕 스릴러라는 장르에 K-여성 서사보다 ‘잘 붙는’ 다른 대분류를 상상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고딕 스릴러는 공간의 역할이 인물보다 중요한, 거의 유일한 장르다. 소설에도 엔딩크레디트나 스태프 롤을 쓴다면 주인공 명단에 집의 이름도 올라가야 할 정도로. 오래되어 역사가 생긴 지붕 아래에는 단수의 인간이 차마 헤아릴 수 없도록 어두운 정념이 쌓이고 이 정념은 인간을 미치게 만든다. 오래된 건물은 대를 이어 전해져온 전근대성을 말한다. 상징이나 비유가 아니라 그 자체가 된다. 이 서사적 특징의 무대를 한국으로 옮겨온다면, 주인공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여성이라야 한다. 오래된 집이 사람을 지켜주는 보금자리가 아니라 묶어 가둔 우리인 것을 여성들은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공기 중에 은은히 떠다니는 선대와 후대 사이, 현지인과 이방인 사이 미묘한 긴장과 반목을 여자들은 체로 떠내듯 건져낼 수 있다. 긴 세월 축적된 정념이 운명을 가장하여 발목을 잡으려 할 때 비명을 지르는 것 또한 여성 화자의 몫이다. 

어쩌면 모든 K-여성이 고딕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책을 여는 독자는 어느덧 이야기와 일상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을 체험할 수도 있다. 물론 이 책은 싸움을 위한 지침서도 아니고 운명이라 이름 지어진 전근대성의 희생자 사례집도 아니다. 최소한의 장르적 약속을 남겨둔 채 각 작품이 뻗어가는 상상력은 놀랍도록 분방하다.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사라지는 건 언제나 여자들뿐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 사라진다는 말에는 ‘여기에서 거기로 간다’는 뜻도 있다. 보이지 않게 된 여자들은 단지, ‘여기’에 없을 뿐이기를 바란다. 여기에 있어야 할 운명을 거슬러 이긴 것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이렇게도 읽을 수 있다. 저항하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 

박서련(작가, <체공녀 강주룡> <더 셜리 클럽> 등을 집필했다)
시사IN 기자들이 추천하는 책
BTS 길 위에서
홍석경 지음, 어크로스 펴냄 

“BTS는 세계 속으로,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가고 있다.”  

BTS는 이제 케이팝 대표선수를 넘어 팝음악의 선두 주자로 떠오르고 있다. 대체 지난 몇 년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한류 연구자’인 저자는 팬덤 밖에 있는 이들이 품을 법한 궁금증에 답변하는 책을 내놓았다. BTS는 동아시아 아이돌 문화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어떻게 세계적 팬덤 ‘아미’를 구축하게 됐는지부터 출발한다. 팬덤 중심인 청년 세대의 특질과 그들이 놓여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BTS의 음악이 어떤 구실을 했는지도 분석한다. 특히 흥미로운 논의는 인종과 젠더 부문이다. 동양인 아이돌이 국제적 아이콘이 되면서 타 인종·문화권과 빚어진 마찰을 다룬다. BTS식 ‘새로운 남성성’이 새로운 젠더 정체성을 제시한다고도 썼다.  
 
 
다른 의료는 가능하다
백영경 지음, 창비 펴냄  

“한국의 의료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나 하는 현실 직시는 드물었다.” 

코로나19부터 전공의 집단휴진 사태까지 2020년은 의료계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높아진 관심만큼 의료 공공성에 대한 논의도 한층 깊어졌냐 물으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에게 달렸던 무수한 ‘좋아요’는 파업을 나선 의사들에게 ‘싫어요’ 버튼이 되어 쏟아졌고, 정부는 비대면 의료 산업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공공의료 확충을 위한 예산은 없었다. 저자는 감정적인 비난과 현실성 없는 발상이 공론장을 뒤덮으면서 한국 의료의 ‘커먼즈’를 논의할 기회를 잃었다고 말한다. 왜 의료 공공성이 시민들에게 구체적 의제로 다가서지 못하고 있는가. 의료와 돌봄 연구자들의 대담을 통해 의료의 존재 이유를 묻는다.  

추월의 시대
김시우·백승호·양승훈·임경빈· 하헌기·한윤형 지음, 메디치 펴냄 

“본인들이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나 선진국에 진입했음을 명확하게 인지한 마지막 세대.” 

김경수 경남도지사, 김세연 전 국회의원 등이 추천사를 썼다. 하헌기 새로운소통연구소장 등 유튜브 채널 ‘헬마우스’ 제작에 관여하는 이들과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저자인 양승훈 경남대 교수(사회학)가 함께 쓴 ‘새 한국사회론’이다. 저자들은 한국이 이미 선진국들을 ‘추격’하는 게 아니라 ‘추월’해가고 있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분석과 대안이 필요하다고 짚는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이전 세대의 성과로 남겨두고, 보수와 진보의 해법 모두로부터 거리를 둔 새 해법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 공동체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1980년대생들의 다소 거친 ‘낙관론’에 귀 기울일 만하다.
 
 책 자세히 보기 >>  
하루 쓰기 공부
브라이언 로빈슨 지음, 박명숙 옮김, 
유유 펴냄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성취한 것이 아닌 자신이 극복한 것으로 규정된다.”  

비뚜름한 자세로 대충 훑어 넘기다가 똑바로 고쳐 앉았다. 글쓰기의 기술을 알려주는 책은 많고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도움을 얻지 못했다. 이 책도 글쓰기의 요령을 알려주겠거니 생각했다. 제목과는 달리(?) 성공한 작가가 되는 데 필요한 글쓰기의 회복탄력성에 관한 안내가 담겼다. ‘글쓰기가 너무 힘들다 보니 이 세상에서 이미 지옥을 맛본 작가는 죽어서 벌 받을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첫 구절에서 바로 공감의 탄식이 터졌다. 나만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구나. 명상, 몸과 마음의 연결, 스트레스 다루는 법을 글쓰기 책에서 만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다양한 작가와 예술가, 심리학자, 저널리스트 등이 건네는 명언을 듣다 보면, 폐허 같은 심신이 조금 안정되는 효과를 맛볼 수 있다.  
 
 책 자세히 보기 >>  

뉴스의 맥락을 읽으면 나와 세상이 연결됩니다. 팬데믹 시대 더 신뢰받는 저널리즘으로 자리잡은 <시사IN>이 2021년에도 믿을 만한 뉴스, 맥락 있는 뉴스로 독자 곁을 찾아갑니다.

💎'13월의 보너스'로 읽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2021년 1월1일부터 〈시사IN〉을 정기구독하면 문화비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전자책 제외). 

📅 지금<시사IN> 캠페인 페이지에서 종이책 정기구독(재구독)을 신청해주신 ‘읽는 당신’에게는 〈시사IN〉이 정성껏 만든 달력을 감사 선물로 보내드립니다(준비 물량 소진시까지)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오늘의 뉴스레터 제목은 노래 제목입니다. 저는 집에 기타를 장식물로 모셔두고 사는 사람인데요. 이런 저조차도 코드를 두세 개만 알면 연주할 수 있다며 기타 선생님이 알려주신 노래가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였습니다. 저는 이 노래를 처음 듣자마자 매력을 느꼈는데요. 간단한 멜로디, 중독성 있는 후렴구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노래에 담긴 가사가 첫 구절부터 파격적이더군요.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굶어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은 장혜영. 네, 지금 뉴스의 중심에 서 있는 바로 그 장혜영 의원입니다. 정치에 뛰어들기 전 장의원이 다큐 영화 <어른이 되면>을 찍으면서 영화 삽입곡으로 작사·작곡한 노래죠. <어른이 되면>은 그녀가 중증 발달장애인 동생과 시설 밖에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요(관련기사 참조). 시설에서 발생한 인권 침해 사건으로 온갖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고, 이제는 시설 밖에서 홀로 서야 하는 동생의 사연을 알고 나면 이 노래가 결코 예사롭게 다가오지 않죠.   

그런데 이 노래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사건이 2021년 벽두에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현직 국회의원이라는 사실은 결코 제가 피해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라는 장혜영 의원의 토로는 “어쩌면 모든 K-여성이 고딕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오늘의 문장에 자연스럽게 겹쳐집니다. 어쩌다 K-여성들은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라는 문장에 격하게 공감하며 살게 된 것일까요.   

그나마 ‘저항하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라고 오늘 소개해드린 책의 제목을 바꿔 읽어낸 박서련 작가의 통찰에 희망을 걸어봅니다.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저항에 나선 여성들이 언젠가는 웃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모든 낡은 관행이 외계의 별처럼 바뀔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의 마지막 가사에서처럼요.   

언젠가 정말 할머니가 된다면 
역시 할머니가 됐을 네 손을 잡고서 
우리가 좋아한 그 가게에 앉아 
오늘 처음 이 별에 온 외계인들처럼 웃을 거야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가난 사파리>를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시사IN이 추천하는 책 기대할게요."
"기자들과 뉴스레터 편집자에게 응원의 마음 전하고 싶어 사연 남깁니다."
지난주 뉴스레터를 받아본 독자들이 남겨주신 사연입니다💌
편집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언제든 아래 버튼을 누르고 의견을 남겨주세요.
더 나은 뉴스레터를 만드는 데 귀한 참조가 될 것입니다.
 

💌<시사IN>이 전국의 동네책방🏡 38곳과 함께 진행중인 책 읽는 독앤독🐶(독립언론×독립서점) 콜라보 프로젝트 페이지를 클릭해보세요. 다양한 책과 책방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주식회사 동네서점에서 만든 전국 동네책방 지도도 참조하세요. '내 위치로 검색하기'를 통해 가까운 동네책방, 도서관 등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 

<시사IN> 뉴스레터를 아직 구독하기 전이라면 여기

💬 받은 이메일이 스팸으로 가지 않도록 이메일 주소록에 book@sisain.kr 등록해주세요.  
수신거부 원한다면 여기를 눌러주세요 

(주)참언론
webmaster@sisain.co.kr
카톨릭출판사 빌딩 신관3층 02-3700-3200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