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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뭐 읽지]  2021-08-12 #66

책, 책방, 사람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주말의 책꽂이

photo by unsplash

단 두 페이지만으로 분명해졌다
은소홀 글/노인경 그림
문학동네 펴냄

나는 단번에 시작되는 이야기가 좋다. 바로 사건 한복판으로 데려가는 이야기. 그런 동화를 만나면 횡재를 한 것 같다. 〈5번 레인〉을 읽을 때도 그랬다. 책을 펼치자마자 나는 수영 대회 결승전 관중이 되어 있었다. 나루는 그간 열심히 훈련했고 경기에 진지하게 임했으며, 수영부 친구들의 전폭적인 응원을 받았고 최선을 다했지만 라이벌 초희에게 큰 차이로 졌다. 30초 안에 시합의 승자가 가려진 것처럼, 단 두 페이지만으로 분명해졌다. ‘나는 이 책이 좋다.’

나루는 승리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가진 어린이다. 추진력도 대단하다. 경기에 진 다음 날도 새벽같이 수영장에 간다. 나쁜 기억을 지우려 레인을 열 바퀴 돌고 생각도 물 위에 누워서 한다. 코치는 이기고 지는 게 수영의 전부는 아니라고 하지만, 나루는 “시합은 이기려고 하는 거잖아요. 저는 이기고 싶어요”라고 대꾸한다. 동화의 주인공이 현실의 어린이를 대변하듯 솔직하고 뚜렷하게 원하는 것을 말할 때 독자는 그의 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나루가 수영에서 믿을 것이라곤 자기 몸과 물뿐이다. 그래서 집중력이 중요한데, 자기보다 늦게 시작했으면서 좀처럼 1위 자리를 내놓지 않는 초희가 나루를 흔들어놓는다.

그러는 사이 나루의 마음에 또 한 사람이 파고든다. 전학생이자 수영부 신입인 태양이다. 경기 직전에 나루에게 “나도 파이팅 해줘”라며 웃는 태양이 때문에 나루는 전속력으로 레인을 왕복했을 때처럼 심장이 두근거린다. 태양이가 나루더러 인어 공주보다 돌고래가 더 어울린다고 해놓고는 “나는 인어 공주보다 돌고래가 좋아”라고 말할 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나루가 채팅 앱의 프로필을 돌고래로 바꿀 때도, 둘이 비밀 데이트를 할 때도. 치열한 경쟁과 설레는 사랑이라니. 책 읽는 속도를 늦출 수가 없다.

나루에게 위기는 한꺼번에 닥쳐온다. 태양이와의 연애 사실이 밝혀지며 수영부 안팎에서 곤란한 처지가 되는 한편, 얼결에 승리의 부적이라는 초희의 수영복을 훔친 것이 탄로 날 상황이 된 것이다. 시합을 코앞에 두고, 나루는 수영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읽는 내내 부풀어 오르던 마음은 두 여자 어린이가 초등학교에서의 마지막 대통령배 결승에서 나란히 날아오르는 순간 터질 것만 같아진다.

어떤 작품은 읽은 다음에야 내가 이런 것을 읽고 싶어 했구나, 깨닫게 된다. 나는 여자 어린이의 운동 이야기, 신중하고 섬세한 연애 이야기, 어린 시절의 한 부분을 멋지게 완성하는 이야기를 읽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실 이 책을 읽고 나와 친구들은 마치 경기장의 관중처럼 들떠서 연락을 주고받았다. 우울한 날이 많았던 2020년이지만, 우리 동화는 여기까지 왔다.

김소영(<어린이라는 세계> 저자)
*<2020 행복한 책꽂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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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기자들이 주목한 책
있지만 없는 아이들
은유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창비 펴냄

“살아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티켓 예매 사이트 회원가입을 할 수 없어서 좋아하는 아이돌 콘서트에 가지 못한다.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고 똑같이 나누어 계좌이체를 할 때 혼자만 현금을 꺼낸다. 공부를 잘해도 각종 경진대회에 나갈 수 없고, 보험 가입이 안 돼서 수학여행도 못 간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삶은 이처럼 구체적이고 낱낱이 고통스럽다. 대부분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인’으로 자라지만 사각지대에 존재해 보이지 않는다. 정확한 통계도 없다. 2만명 정도 되리라 추산된다. 국가와 부모를 골라서 태어날 수 없는 이 ‘작은 이웃’들의 평등은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까. 이들이 무사히 어른이 되도록 법과 제도의 그물을 짜는 일이야말로 사회와 국가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패권의 대이동
김대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패권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평범한 사실.”

신자유주의자들의 생각과 달리 패권국가의 역사는 모든 국가 개입이 나쁜 일이 아닐뿐더러 어떤 경우에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미국은 20세기 초까지도 강력한 보호주의 정책을 추진했고, 철도 같은 기간시설 건설에 적극 나섰다. 영국이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에 패권을 넘겨준 이유는 의회와 정부가 개입해 기술혁신이 일어나도록 독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패권국가의 조건이 영토와 인구 같은 물리적 조건에서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기업인의 혁신 정신 같은 요소로 옮아가고 있음을 증명한다. 스페인·네덜란드·영국·미국의 흥망성쇠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역사적 분기점의 본질을 이해하게끔 한다.

지금은 살림력을 키울 시간입니다
금정연 외 8인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일상이 망가져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방치하는 게 아니다. 자질구레한 일들을 방치해서 일상이 망가지는 것이다.”

어느 날 개수대에 쌓여 있는 그릇과 널어야 할 빨랫감을 보며 시시포스를 떠올렸다. ‘아, 살림이란 끊임없이 굴려야 하는 형벌 같은 걸까.’ 독립하고 나서야, 제때 닦고 소독하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곰팡이와 벌레, 쿰쿰한 냄새의 습격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살림은 늘 뒷전이었다. 언젠가는 청소 전문업체를 부를 수 있는 삶을 살아야지 생각했다. 이 책은 우리의 일상을 유지시키는 ‘살림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한다. 기름을 둘러 노릇노릇하게 두부를 굽고, 가끔은 베이킹소다를 풀어 설거지하고, 세탁조를 청소하는 일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말이다.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은 돌봄에 있다고, 그러니 방치하거나 외주 주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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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
정상훈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내가 죽음에 이끌린 이유를. 나는 죽음이 아니라 삶의 목소리에 이끌린 것이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의 의사.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저자의 인생에 우울증이 찾아왔다. 어느 순간 삶의 의미를 잃은 그에게 떠오르는 생각은 죽음뿐이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번민하던 그는 죽음을 찾아 떠나기로 한다. ‘국경없는 의사회’ 활동가가 되어 삶보다 죽음이 쉬운 세 나라, 아르메니아·레바논·시에라리온을 찾아갔다. ‘한국인 최초의 에볼라 의사’라는 이름을 얻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긴 여정에서 마주한 죽음의 맨얼굴과 그 죽음들 앞에서 찾은 자신만의 답을 책으로 내놓았다. 죽음과 고통의 불평등함, 삶의 의미와 가능성, ‘나’가 아닌 ‘우리’로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고찰을 만날 수 있다.

 
그림의 영토

<메두사 엄마> 중에서, 논장 제공

억압적인 엄마, 집착하는 엄마, 무심한 엄마, 떠나는 엄마...현대 그림책에서 이런 엄마를 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중에서 집착하는 엄마의 대표가 메두사 엄마였다. 딸은 엄마의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에 감싸여 땅에 발 닿을 새 없이 살아가는데.. │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엄마는 용기내어 싹둑 머리를 잘랐다 전체 글 보기 >>
2주간 쉬었던 [주말에 뭐 읽지]가 돌아왔습니다.
마감을 안 해도 되는 지난 2주는 얼마나 달콤하던지요. 하지만 독자들마저 ‘목요일 날 귀찮은 뉴스레터가 오지 않아 좋았다’라고 말씀하시면 뭔가 많이 서글퍼질 것 같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편집자의 딜레마랄까요😅
 
오늘은 소개해드릴 책을 고르며 자연스럽게 올림픽의 선수들을 떠올렸습니다. 사실 저는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무리하게 강행된 도쿄올림픽에 대한 거부감까지 더해져 개막식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올림픽 중계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더라고요. 웬만한 사람은 견디기 힘들 집단적 악의에 맞서 흔들림 없는 집중력을 보여준 안산 선수는 말할 것도 없고요, 처음엔 다소 뜬금없던 김제덕 선수의 “뽜이팅!” 구호까지도 나중엔 일부러 다시 찾아 들을 정도로 중독이 되었습니다. 허리 부상으로 일상 생활도 힘들었다는 신재환 선수가 도마를 짚고 몸을 비틀며 회전하는 모습, 성 소수자로 화제를 모았던 영국 다이빙 선수 토머스 데일리가 경기 도중 뜨개질을 하는 모습은 또 얼마나 경이롭던지요.
 
그러고보면 스포츠 규칙에 무지한 제 시선을 사로잡은 경기는 양궁, 체조, 역도, 수영, 스포츠클라이밍처럼 주로 단시간에 승부가 결정나는 종목들이었네요. 30초는커녕 10초 안에 승부가 결정되기도 하는 그 세계에서 선수들은 어떤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을까요? 이기고 지는 게 운동의 전부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이기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었을까요?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안산 선수는 시합에 임할 때면 “긴장보다는 집중을 하려고 한다”라고 말했던데요. 이 여름, 제가 좋아하지도 않던 스포츠에 매료된 것은 어쩌면 이런 몰입의 순간을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폐막도 얼마 안 남은 올림픽 대신 다시 책 속에서 몰입의 즐거움을 찾아보아야겠습니다.
     
 입추가 코 앞이네요. 책 읽기 좋은 계절이 곧 다시 돌아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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