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총총레터가 30호에 이르렀습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신 구독자 분들께 감사드려요. 다른 매체나 플랫폼을 거치지 않고 독자 여러분과 직접 만나고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하게 생각하며 쓰고 있어요. 

여러분은 바닐라 맛 좋아하세요? 저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초코나 딸기, 민트 같은 맛은 너무 강하게 느껴져서 늘 밋밋한 바닐라 맛을 제일 좋아해요. 대학생 때는 노르웨이로 교환학생을 갔었는데, 거기서 처음 바닐라 맛 요거트를 먹어보고 너무 심하게 빠져서 매일 사먹었던 기억이 있어요(추억에 빠져 TMI대방출..). 하여튼 저는 바닐라 맛을 정말 좋아하는데, 영어에서는 '바닐라'라는 표현이 '별 특징없는, 밋밋한, 평범한'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고 해요. 

홍기하 개인전 《바닐라》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요즘 조각이 너무 밋밋하고 재미없는 것 아니냐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합니다. 조각다운 조각은 점점 보기 어려워지고, 크고 무겁고 단단한 조각 대신, 스티로폼이나 아이소핑크 같은 가벼운 재료를 사용한 조각이 늘어나는 상황을 '바닐라'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거죠. 속된 말로 하자면, "와 진짜 세다" 싶은 조각을 보기 어려운 시절에, 작가는 그런 조각을 시도하려고 한 것 같았어요. 조각의 본질에 집중하여, 더 조각다운 조각을 만들기 위한 고된 시도의 결과물이라는 게 한 눈에 보였어요.  하나의 조각 안에서 거친 표면과 매끄러운 표면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부피가 풍성한 부분과 가는 부분을 동시에 표현하면서 조각의 여러 표현 가능성을 실험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늘날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신체와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보조 의료기구와 같은 장비는 신체의 장애를 보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동화된 로봇과 기계가 신체 노동을 대신하여 일자리를 줄어들게 하기도 합니다. 신체와 노동, 장애와 기술의 문제를 다뤄온 이은희 작가는 지난해 개인전 《회생비용》에 이어서 이번 전시 《디딤기와 흔듦기》를 통해 이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듭니다. 

전시 제목과 동명의 작업 〈디딤기와 흔듦기〉는 다양한 각도에서 노동하는 신체와 그와 관련하여 발전한 기술 산업에 접근합니다. 기술이 점차 발달하면서, 장애를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재활 기계들이 개발되고 있지만, 과연 그러한 발전이 올바른가를 다룹니다. 그러한 기계 개발이 과연 장애에 대해 윤리적으로 접근하고 있는지, 사회 시스템이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개인의 차원에서 각자의 장애를 다루도록 책임을 전가하고 있지는 않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영상 안에는 산업 현장에서 사고를 당해 장애를 갖게 된 노동자가 그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도록 산업 현장을 체험하게 해주는 VR 재활 치료 장치가 등장합니다. VR을 통해 공사장에서 이동하고 물건을 나르는 활동을 체험함으로써 공사장에서 사고를 당한 노동자가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식입니다. 이러한 장치는 실제로 누군가가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측면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산업 현장의 안전 문제를 해소하는 대신에 사고와 장애 이후의 삶을 지속하는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를 포함하여 작가는 장애와 노동, 기술의 복잡한 관계를 다양한 사례로 접근합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의 주장을 강하게 하지 않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여러 의견을 가질 수 있도록 제안하기도 하고요. 무척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례에서 출발해서 넓은 논의의 문제로 나아가 여러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작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