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과 비슷한 옷을 입고 앉아 대화를 하노라면.

1주일에 최소 3일 이상은 바지 수트를 입는다. 
여기에 대개 운동화를 신는다. 특별히 격식을 차려야 할 땐 스틸레토 힐을 꺼낸다. 신발이 무엇이든, 수트를 입은 날은 조금 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걷게 된다.
신입 기자 시절에는 청바지에 야상 점퍼, 운동화를 교복처럼 입었다. ‘어디든 출동하겠습니다!’ 라는 마음을 옷으로 표현한 셈이다. 출입처가 생기면서 조금씩 일반 직장인과 비슷한 옷을 입었다. 정장 원피스도 1주일에 두어 번은 꼭 입었는데, 바쁘고 피곤한 아침에 대충 몸을 집어넣고 지퍼만 올리면 되는 편리한 구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점은 아주 잠깐, 입을 때뿐이었으니. 오후가 될수록 퉁퉁 부어가는 종아리와 불룩 튀어나온 살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다. 
의아했다. 학창시절, 내가 동경했던 이른바 ‘커리어 우먼’의 이미지란 무릇 타이트한 원피스에 스틸레토 힐을 신고 여유만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 아니었던가? 그러나 현실의 원피스와 하이힐은 급속한 체력 저하와 끝없는 자신감 하락의 길로 나를 이끌 뿐이었다.

바지 수트에 관심을 가진 건 2017년 <킹스맨 : 골든 서클>를 보고 난 뒤다. 
슈퍼히어로들이 쫄쫄이를 입고 지구를 구하듯, 콜린 퍼스는 맞춤 정장을 차려입고 악당을 응징한다. 그럴 때마다 낮게 읊조리는 문장.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품격 있으면서 동시에 상대방을 압도하는 아우라를 주는 그것을 나도 갖고 싶었다. 그래서 입어보니 전에는 몰랐던 세상이 열렸다. 
첫째, 온전히 일에만 집중할 수 있다. 적당한 여유를 두고 온몸을 천이 감싸고 있기 때문에, 남이 내 체형을 어떻게 볼지 아무 신경도 쓰지 않게 된다. 
둘째,  ‘오늘 뭐 입지’ 고민 없이 출근 준비를 신속하게 마치게 된다. 어차피 색감도 디자인도 그게 그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이지만 정말 중요한 것, 빨래가 쉽다. 주말이면 1주일 동안 입은 정장 상하의를 몽땅 중성세제와 함께 세탁기 ‘섬세 모드’로 돌린다. 물론 나 자신이 옷감 손상과 변형에 예민하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여기에 이너 웨어로 입을 셔츠·블라우스·티셔츠 등만 따로 한 번 더 돌려주면 1주일 출근 준비는 완성이다!

정서적인 장점은 더 크다. 직업 특성상 우리 사회 주요 직책에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잦은데, 체감상 80~90%가 남자다 (그나마 문재인 정부 들어 여성 비율이 눈에 띄게 많이 늘어 ‘80’이라는 수치를 적을 수 있다). 그들의 95%쯤은 비슷한 차림새다. 하얀 셔츠와 어두운 색의 정장. 나 역시 그들과 비슷한 옷을 입고 앉아 대화를 하노라면, 묘하게 동질감이랄까 소속감이랄까 대등한 지위에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자유로웠다. 
정장을 입어보고 이런 기분을 느낀 건 나뿐이 아니었다. ‘비즈니스 정장을 입은 여성은 자신이 임원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낄 가능성이 1.5배 더 높고, 남성에게 권위를 도전받을 가능성이 3분의 1 낮다’는 연구 결과가 1970년대 미국에서 이미 나왔다. 이 책이 수년간 화제를 모으면서 1980~1987년 미국 여성 정장의 연간 판매가 약 600만 벌 늘어났다. 하지만 드레스 판매는 2900만 벌 줄어들었고, 고작 6억 달러의 정장 수익과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맞바꾸고 싶지 않았던 패션계는 정장 생산을 대폭 줄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각종 언론과 대중 매체를 동원해 정장은 여성을 ‘유사 남성’으로 보이게 한다고 비판했다고 수전 루시디는 저서 <백래시>에서 말한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정말이지 가슴을 붕대로 꽁꽁 동여맨 남장 여자가 아니고서야, 바지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여성을 대중 매체에서 본 기억이 드물었다. 
굳이 <섹스 앤 더 시티>까지 가지 않아도 내가 자라면서 본 많은 직장인 여성 캐릭터들은 화려하고 섹시하게만 묘사돼 왔으니까. 그런 의에서 2019년 방송됐던 tvN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는 참신하고 반가웠다. 포털 업체 임원급인 세 주인공들은 일하는 장면 대부분에서 바지 정장을 입고 있었고, 팽팽하게 대립하는 날에 ‘똑’ 떨어지는 수트가 한층 강조됐다. 노출이 심한 의상 일색이었던 걸그룹의 무대에서도, 이제는 바지수트 뿐 아니라 헐렁한 트레이닝 복장도 심심치않게 볼 수 있게 됐다. 
여성들이 더이상 예쁘게 전시되는 대상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퍼포먼스를 내기에 가장 효율적인 의상들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형태가 무엇이 됐든, 저마다 근무 환경에 최적화된 각자의 전투복을 하나씩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정글과도 같은, 치열한 오늘의 한국 사회를 살아 나가기 위해서. 
그리고 바지 정장은 내게 꽤 잘 맞는 전투복이다. 

Writer 심수미
제48회 한국기자상 대상, 제14회 여기자상을 받은 언론의 최전방에 서 있는 JTBC 기자. 30여 년 간 인권의 사각지대를 취재한 수 로이드 로버츠의 <여자 전쟁>을 번역하기도 했다. 더 많은 여성 동료들이 함께 일하며 버텨내길 바란다.

당신의 전투복은 무엇입니까 _ 엘르> 2019년, 12월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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