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김철오] 가을의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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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태평양 수온 높아져 가을 태풍 자주 발생… 지구온난화가 만든 슈퍼 태풍이 생존 위협


루사는 우리나라에서 최악의 태풍으로 기억되는 이름이다. 2002년 8월 31일 제주도로 상륙해 9월 1일 강원도 속초에서 소멸됐다. 213명이 사망하고 33명이 실종됐다. 재산피해액은 5조1479억원. 지금까지 최대 기록이다. 인명피해 규모는 기상관측 사상 10번째로 컸다. 21세기 들어 수백명 사망자를 낸 재난은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사망 192명)와 2014년 세월호 참사(사망 304명)를 제외하면 루사 정도밖에 없다.

대통령령 특별재해지역 제도는 루사를 계기로 도입됐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루사에 휩쓸린 경남·강원을 특별재해지역으로 선포하고 4조1000억원의 추경예산을 편성해 이재민을 지원했다. 아시아·태평양지역 14개국으로 구성된 태풍위원회는 회원국 한국의 피해 상황을 감안해 태풍 명칭에서 루사를 퇴출했다. 이제 루사는 태풍의 이름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루사는 그야말로 가을의 악몽이었다. 16년 전의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가을은 ‘슈퍼 태풍’의 계절이 됐다. 태풍은 연간 25개 안팎으로 발생하는데 절반가량은 여름인 6∼8월에 발생한다. 가을 태풍은 5개 정도로 숫자는 적지만 위력에서 여름 태풍을 능가한다. 1904년 현대식 기상관측이래 114년간 하루 500㎜ 이상의 강우를 내린 태풍은 루사(870.5㎜), 1981년 아그네스(547.4㎜), 1998년 예니(516.4㎜)뿐이다. 모두 9월에 한반도를 지나갔다.

올해 슈퍼 가을 태풍의 시작은 지난달 4일 일본 오사카를 강타한 21호 태풍 제비였다. 제비는 초속 44m 이상의 강풍을 몰아치며 일본에 상륙했다. 이정도의 풍속은 매우 강한 태풍에 속한다. 일본에 매우 강한 태풍이 상륙한 것은 1993년 이후 25년 만에 제비가 처음이었다.

후속주자인 22호 태풍 망쿳은 지난달 7일부터 열흘간 북태평양을 서쪽으로 횡단해 괌 필리핀 홍콩을 차례로 타격했다. 망쿳의 중심기압은 한때 910hPa(헥토파스칼)까지 내려갔다. 중심부에서 930hPa 이하의 기압이 관측돼도 매우 강한 태풍으로 평가된다. 당시 망쿳이 일으킨 바람은 초속 56m로 몰아쳤다. 바람이 초속 35m로만 불어도 사람을 넘어뜨리고 기차를 탈선시킬 수 있다.

태풍은 올여름 내내 한반도를 외면하더니 가을이 돼서야 가장 크게 몸집을 불리면서 찾아왔다. 25호 태풍 콩레이는 지난 6일 제주도로 상륙해 부산을 할퀴고 울릉도 북쪽 해상으로 지나갔다. 반나절 동안 3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470명을 이재민으로 만들었다. 경북 포항에서 하천 범람을 피하다 미끄러져 급류에 휩쓸린 70대 남성은 엿새 만인 12일에 발견됐다.

콩레이는 한반도로 다가오면서 초속 53m의 바람을 반경 430㎞에 몰아쳤다. 한때 중심기압은 920hPa까지 내려갔다. 그 위력이 망쿳에 버금갔다. 그나마 중국 동남부에서 한반도로 방향을 틀 때 위력이 약해진 것은 행운이었다. 콩레이가 원래의 힘을 갖고 한반도로 상륙했으면 인명피해 규모는 사망자 3명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가을 태풍이 강한 원인은 북태평양의 수온이 8월 말부터 9월 초 사이에 가장 높아지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태풍은 따뜻한 바닷물을 먹고 자란다. 바다의 온도가 태풍의 힘을 결정한다. 북태평양의 지난달 수온은 29도였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강석구 박사는 “매우 높은 온도”라고 했다.



수온 상승을 지구온난화의 결과로 보는 분석도 있다. 미국 해양대기청(NOAA) 국가환경정보센터의 세계 열대저기압 분석에서 태풍 힘이 가장 강력한 지점은 1982년만 해도 적도 인근이었지만 30년 뒤 160㎞가량 북상했다. 적도만큼 따뜻한 바닷물이 북위 2도까지 확대됐다는 뜻이다. 그렇게 식지 않은 바닷물은 가을 태풍의 힘을 키우는 양분이 된다.

가을의 슈퍼 태풍은 인위적으로 발생한 ‘괴물’일 수도 있다. 이 괴물과의 싸움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지구온난화를 경계하는 관점에서 보면, 자원을 소각해 대기와 해양의 온도를 끌어올리는 인류의 파괴적 소비가 계속되는 한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인간에 의해 파괴된 환경은 인간의 적절한 대응을 허용하지 않은 채 늘 점령지를 장악한 뒤에야 실체를 드러내곤 한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때 원전 파괴로 후쿠시마를 오염시킨 방사능, 매년 봄마다 한반도를 뒤덮고 있는 미세먼지가 그랬다. 슈퍼 태풍은 앞으로 우리의 가을 일상이 될지도 모른다. 생존이 걸린 문제다.

김철오 온라인뉴스부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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