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말하는 것'만으로 삶이 바뀔 수 있어요" 성폭력 상담가 조은희씨가 본 '미투 운동'

최미랑 기자
조은희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가 22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조은희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가 22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상담 활동가로 일하는 조은희씨(52)가 성폭력 피해자들을 돕기 시작한 것은 2003년부터다. 상담소에서 교육을 받고 10년 가까이 자원활동가로 일하다 2015년부터 상근 활동가로 채용됐다. 최근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조씨는 “말 그대로 수화기를 놓을 틈이 없다”고 했다.

지난 22일 서울 마포구의 상담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인터뷰 직전까지도 상담 전화를 받다가 나왔다. 전화나 면담으로 성폭력 피해자들 얘기를 들으며 문제를 풀 방법을 함께 의논하고, 의료나 법률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고 안내하는 게 그의 주된 업무다. 성폭력 수사와 재판 과정까지 피해자를 도와 함께할 때도 있다.

미투 운동 이후 ‘과거 일이 생각나서 너무 아프다’며 상담소에 연락해오는 사람은 크게 늘었다.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지’ ‘괜히 얘기했다가 나만 피해를 보는 것 아닐까’ 하며 애써 묻어둔 일이 다시 떠올라 너무 괴롭다는 것이다. 아무 말도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자신이 입을 다물었기에 다른 이들도 피해를 봤다는 자책감이 동시에 이들을 괴롭힌다. 조씨는 이들에게 “지금이라도 그 속상한 일을 꺼내기 시작한 것은 정말 중요하고 또 좋은 일”이라고 말하곤 한다.

나아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도 굉장히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인다고 했다. 가해자의 사과를 받아내거나 법적 처벌을 받게 하지 못하더라도, 일단 ‘말하기’ 시작한 피해자는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면 사람이 억울하고 무기력해지잖아요. 이런 정서가 삶의 모든 부분에 계속 영향을 미칠 수 있거든요. 내 잘못이다, 내가 바보같다는 생각에 빠져들게 되고요. 억울하다고 소리라도 치고 나면 ‘나는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하며 일어설 수 있어요.”

그동안 활동가들은 ‘성폭력은 피해자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라고 목이 터져라 외쳐왔다. 전에 없이 많은 피해자들이 용기를 낸 미투 운동은 이 메시지가 우리 사회에 닿고 있다는 신호라고 조씨는 생각한다. 발뺌만 하던 가해자가 ‘내가 정말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는 것도 봤다. “사람들 시선이 확 달라지니 가해자도 압박을 느낀 거죠. 전에는 누군가 잘못된 행동을 짚어도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면서 피해자를 탓하는 경우가 많았잖아요. 사람들이 이제 어느 정도나마 ‘아, 이게 현실이구나, 수많은 피해자들이 그렇게 살아왔구나’ 하고 이해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상담소의 문조차 두드리지 못한채 혼자 앓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특히 친족 간 성폭력은 공개적으로 입을 열기 쉽지 않다. 어린 시절 당한 성폭력을 중년이 돼서야 털어놓는 사람도 있다. 여성보다 숫자는 훨씬 적겠지만, 성폭력 피해를 당하고 말 못하는 남성도 많을 거라고 조씨는 짐작한다. 며칠 전 한 남성 피해자가 상담소에 전화해 군대에서 겪은 일을 털어놨다. 그런 일을 당하는 게 어떤 것인지 아느냐며 거친 말로 하소연하던 남성은 ‘이제 두 딸의 아빠인데 딸들이 자라면 어떻게 세상에 내보내야 할지 막막하다’며 전화를 끊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조씨이지만 피해자들이 무고로 역고소를 당해 오히려 죄인이 되는 걸 볼 때에는 “정말 속이 상한다”고 했다. 특히 지난해 상담소가 지원하던 피해자가 국민참여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을 때는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판사가 통념에 맞춰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질문을 계속했어요. 그게 영향을 많이 미쳤던 것 같아요.” 회식 후 술취한 상사를 택시에 태워 보내려다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에게 판사는 “왜 늦은 시간까지 같이 다녔느냐”, “왜 그렇게 오래 함께 술을 마셨느냐”고 캐물었다. 피해자는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다.

상담소가 지난해 진행한 상담은 2000건 정도다. 상담팀의 상근 활동가는 조씨를 포함해 두 명, 여기에 무보수 자원활동가 세 명이 번갈아 나와서 전화상담을 돕는다. 성폭력상담소는 그나마 이름이 알려진 큰 조직이고 시민후원도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지만 인력부족은 고질적인 문제다. 성폭력 피해자 상담은 열정 없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한편으론 자신을 잘 돌봐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보고들으면서 함께 마음을 다칠 수도 있다. 상담사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심리상담을 받으러 가는 경우도 있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주부로 살던 그가 성폭력 상담을 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좋은 일도 많은데 왜 하필 성폭력을 다루려고 하느냐’고 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요즘 활동가들은 매일 아침마다 사회 분위기가 달라져가는 것을 보며 “꿈이 아닐까” 서로 묻는다. 온 힘을 쏟아온 일이 사회의 중심 이슈가 된 만큼 부담도 크다. 미투 운동이 성폭력을 줄이고 성평등 사회로 가는 디딤돌이 되게끔 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어깨가 무겁지만, 조씨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열정을 가지고 일하는 게 행복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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