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서치 딜리버리 vol.6
*c-lab 6.0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
 2022. 10. 28. 

우리는 종종 *c-lab이 지나온 길을 '여정旅程'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여행을 통해 이전과 다른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는 것처럼, *c-lab의 다양한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이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잘 그려진 지도 위를 누비는 여행이 아닌 새로운 지도를 만들기 위한 여행이라는 점입니다. 지난 4월부터 발행된 리서치 딜리버리는 각각의 예술적 시도가 형성한 다채로운 지형을 자세히 즐길 수 있도록 새로운 지도의 안내자 역할을 해왔습니다.

 

*c-lab 6.0은 꽃이 피는 봄에 시작해, 공기가 쌀쌀해지는 가을에 그 끝을 알렸으니 장기 여행과도 같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기나긴 여행에는 든든한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길을 잃었을 때 함께 방향을 정하고, 좋은 것을 보면 바로 나눌 수 있는 그런 '동반자mate' 말입니다. *c-lab 6.0과 함께한 8명의 랩메이트는 각기 다른 연구 주제와 관심사를 가지고 약 6개월간의 여정에 동참하였습니다. 자료집에 실릴 최종 결과물에는 이들이 *c-lab 6.0을 경유하며 공진화의 가능성을 탐구한 흔적이 담겨있습니다. 이들의 리서치 조각이 어떤 형태로 완성되었을지 궁금하시다면 11월에 발행될 *c-lab 6.0 자료집을 기대해 주세요.


리서치 딜리버리가 인도한 길을 따라온 *c-lab 6.0의 여정은 어떠셨나요? 독자 여러분의 동행 덕분에 수많은 갈래로 뻗어나가는 공진화의 길을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럼, 저희는 또 다른 여정의 시작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c-lab 6.0 리서치 딜리버리의 마지막 호는 "6.0 랩메이트의 리서치"로 구성되었습니다.
최종 연구 결과물을 위해, 랩메이트가 다방면으로 펼친 자료를 만나보세요!

지구돋이 Earthrise

"오 하느님, 저 풍경 좀 봐! 지구가 떠오르고 있어, 정말 아름다워..."


1968년 12월 24일, 우주 비행사 윌리엄 앤더스William Anders가 우주선 창밖의 지구를 보며 외친 소감이다. 지구돋이Earthrise라는 이름이 붙은 이 사진은 아폴로 8호 우주선이 달 위를 선회하며 찍은 사진으로, 달에서 지구가 떠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 당시에 아폴로 우주선은 달을 10바퀴 돌아 크리스마스에 지구로 출발했고 이틀 뒤 무사히 지구로 귀환했다. 지구에서 해가 뜨는 모습은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달 위에서 떠오르는 지구의 모습은 우리의 인식 체계를 바꾸어 놓는다.


익숙한 주변으로부터 떠나, 머나먼 우주에서 푸르고 연약한 지구를 바라보는 것은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고 하나의 행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환경 사진 기자 갤런 로웰Galen Rowell은 이 사진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환경 사진"으로 설명했다. 달에서 지구를 보는 관점은 달과 지구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재설정하고, 인간이 만든 관념적인 구조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진화의 역사를 다시 쓴 과학자, 린 마굴리스 Lynn Margulis (1938-2011)

"우리는 모두 공생자 행성에 살고 있는 공생자들이다."


린 마굴리스는 우리의 진화가 '공진화'로부터 출발했음을 증명한 과학자다. 1967년, 마굴리스는 '약 15억 년 전 원핵세포가 다른 세포로 들어가 융합·공생하던 중 더 발달한 진핵세포로 진화했음'을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녀의 논문은 학계에서 15번이나 거부되었는데, 여러모로 그녀가 주변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많은 학자는 세포 내의 '핵'을 연구하는데 몰두해있었다. 핵을 중심으로 진화와 유전을 연구하는 정통 견해에 맞서, 그녀는 미토콘드리아처럼 세포에서 덜 중요해 보이는 가장자리를 연구했다. 그러던 중 비로소 세포 간의 공생으로 진화가 이뤄졌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후 등장한 후속 연구들이 마굴리스의 주장을 계속해서 입증하면서, '공생'은 진화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녀의 연구는 "진화가 경쟁이 아닌 공생을 통해 이루어진다"라는 시각을 일깨워주었다. 마굴리스는 평생 '공생 발생' 개념을 토대로, 살아있는 지구를 입증하고자 노력했다. 그녀가 본 지구는 1,000만 종이 넘는 생물이 서로 연결된 채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는 가이아Gaia*이자 행성 생명이었다.


* 가이아 이론: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이 주장한 가설로, 지구를 하나의 복합적인 체계로 바라보는 이론이다. "대기의 화학적 이상을 감지하여 항상성을 유지하는 시스템"으로서 지구, 즉 가이아는 하나의 생물이 아닌 메타 생명 체계다.

『객체들의 민주주의』의 핵심 주장은 존재가 오직 객체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객체들은 각기 다른 역능과 역량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존재자가 동등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동등하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전제다. 책에서는 '객체'라는 용어 대신 '기계'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객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반사적으로 '주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를 생각하는 데 방해가 된다. 저자 레비 R. 브라이언트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객체를 '기계'로 명명하면서 새로운 존재자론을 펼친다. 기계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무언가를 단순 반복하는 존재가 아닌,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입력물에 따라 다양한 출력물을 내는 존재다.


저자는 기계를 '잠재적 고유 존재', '국소적 표현' 두 부분으로 설명한다. 먼저 '잠재적 고유 존재'로서의 기계는 유일한 본질을 갖는 것이 아니라 관계 맺고 있는 상호작용 환경에서 '잠재적인 역능'을 발휘한다. 이러한 역능은 특정한 조건에서 현실화되는데, 이것이 그가 말하는 '국소적 표현'이다. 예를 들어 성냥은 불이 붙을 수 있는 '잠재적 고유 존재'로서 열기를 만들거나 그을리게 만드는 '국소적 표현'이 가능하다. 기계들의 소통과 접속은 '세계'를 구성한다. 이때 '세계'는 특정한 요소로 환원하거나 전체화될 수 없고, 형성을 위한 특정한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 세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접속된 기계들이 느슨하게 결합한 생태ecology를 이룬다.

율리 체 Juli Zeh, 『잠수 한계 시간』 (2014)

독일 작가 율리 체의 소설 『잠수 한계 시간』은 잠수라는 은유를 통하여, 인간의 삶을 조망한다. 독일어 "Nullzeit"라는 단어가 있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무감압 잠수 한계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해를 입지 않으면서 특정 수심에서 잠수할 수 있는 시간을 뜻한다.
위 은유를 풀어 읽으며 공진화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를 찾아보자. 인간에게 '잠수'는 홀로 직립하는 단어가 아닌, 한계와 동행하는 단어이다. 인간은 잠수하되 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는 특정 수심까지만 잠수해야 하며, 이내 다시 물 위로 올라와야 한다.
최근 우리는 너무 많은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서 힘을 받기보다는 버거움을 느끼는 순간으로 이루어진 세계. 그런 세계 속에서 공진화라는 말이 희망에만 차 있는 단어라고 오해할 수 있다. 공진화는 희망이라기보다 마지막 자세이다. 공진화와 함께 소개하는 이 소설의 내용은 아름답지 않고 오히려 운명의 잔혹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이런 지리멸렬한 세계에서 취할 수 있는 마지막 태도로 잠수를 선택하지 않기를 권한다. 잠수해도 좋지만, 해를 입지 않으며 천천히 물 밖으로 나와야 한다고 읊조리고 있다. 섣불리 생이라는 것은 혼자 살아내는 거라 선언하지 말자. 운명은 잔혹하고, 타자와의 연결이 우리를 어떤 미래로 이끌지 모르지만 물 밖에 나오기를 권한다. 우리 너무 오래 잠수하지 말아요, 라는 서늘한 고백으로 당신에게 공진화를 전한다.

'앎'을 뛰어 넘는 '감각함'

*c-lab 6.0 x 안가영, 《우주 감각: 미래 인류를 위한 XR 시뮬레이션》(2022), VR 내 영상 캡처

재해와 사고, 전쟁 등 인류의 비극적인 역사를 되짚어보기 위해 그와 관련한 장소를 관광하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 주목받고 있다. 단순히 과거의 사건들에 대해 학습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 공간에 머물며 신체적으로 감각함으로써 교훈을 얻는 것이 이 여행의 요체이다. 대표적 장소로는 유대인 학살 현장인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 뉴욕 9.11 테러가 행해진 그라운드 제로, 제주 4.3사건이 벌어졌던 제주 섬 일대 등이 있다. XR 기술을 활용해 우주를 유영하면서 인간의 욕심으로 황폐화 된 지구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감각할 수 있었던 안가영의 《우주 감각: 미래 인류를 위한 XR 시뮬레이션》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부정하고 싶은 인류의 과오가 새겨진 현장으로 향해야만 하는가? 우선, 그곳에 새겨진 감각들이 두터운 연대를 형성하여 잔혹한 역사의 반복을 방지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다수가 희생자의 아픔을 감각하고 원통한 감정에 공감할 수 있다면, 그들은 '피해자'의 위치에서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선형적으로 흐르는 시간에서, 다크 투어리즘은 과거의 관점에서는 치유의 기회를, 현재에는 강한 교훈을 남기는 계기가 되고 이로써 미래의 변화를 논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c-lab 6.0 X 조예은 『핑거팁 메모리』의 주인공, 소라로부터 편지가 한 통 도착했습니다.

그녀가 손끝으로 읽어낸 기억을 만나보세요.

소라게 고물상이 생기기 몇 년 전, 안양을 산책하다 마주친 두 개의 기억을 전해보아요.


A씨는 사라졌습니다. 그는 자리했던 곳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나쁜 공기를 맑은 것으로 바꿔주는 조각이라고 설명되었던 그는 명명된 기능을 아주 짧게 수행한 뒤 떠났습니다. 어두운 밤에 홀로 빛을 내뿜으며 자리를 지키는 게 무척 곤욕스러웠다고,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내성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이지요. 


점점 더 우거지는 수풀 사이에서 자라나는 줄기와 들끓는 벌레에게 양해를 구해가며 겨우 자리를 지키던 B씨도 그곳에 머물 힘이 없다고 느꼈다고 해요. 그래서 제초 작업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도록 수풀과 하나가 되기로 결심했죠. 그런데 비극적이게도 그다음 날 온종일 풀 깎는 소리가 공원을 가득 메웠고, B씨는 다시 그곳에 어색하게 모습을 내보이고 서 있습니다. 우연히 그들을 만난다면, 고물상에서 잠자고 있는 저 대신 안부를 전해주세요. 내가 당신들을 기억하고 있다고.


* 이 글은 *c-lab 6.0 프로젝트로 공개된 『핑거팁 메모리』를 읽고, 상상하여 작성한 내용입니다.

* 조각의 이름은 하단 이미지 출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방법


치열한 일상이 지속되면 지치기 마련이다. 생존을 지속하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진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은 커지고, '나'의 역할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자아 탐색의 방향성은 곧 사회로 향한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나,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결국 '생존'의 근원적 의미를 고찰하는 데에 이르고, 생존을 위한 '공진화'의 필연성을 깨닫는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그러한 삶의 지속을 위해 필요한 공진화는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기적인 자세를 버리긴 어렵다. 전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 문제에 유난히 냉소적인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다.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연결된 네트워크를 인지할 필요가 있다. 쳇바퀴 굴러가듯 바쁜 일상 속에서는 이를 알기 힘들 터, 개인에게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 예술적 체험을 통해 연관성을 탐색해 보자. '나'의 생존을 넘어,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 읽기 자료: 신상규, 「포스트휴먼과 포스트휴머니즘, 그리고 삶의 재발명」, 2020 (링크)

사회-문화적 공진화와 '참여적 미술관'


공진화는 생존에 유리한 유전자 발현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경험을 구성하는 집단의 행동 양식을 설명하는 데에도 활용된다. 특히 오늘날 다양한 주체들이 상호작용하는 미술관 프로그램은 사회-문화적 공진화를 예술적 경험을 통해 사유하도록 한다. 


코리아나미술관 *c-lab은 랩메이트를 모집해 미술관이 설정한 주제를 함께 연구하고, 연간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외에도 시민 큐레이터, 공공미술시민발굴단, 시민 참여 아카이빙적극적으로 참여를 요구하는 미술관 프로그램은 연결과 소통을 위한 구실점이 되고 있다. 커뮤니티 예술을 연구한 니나 사이먼Nina Simon은 자신의 책 『참여적 박물관』에서 미술관과 관람객 그리고 지역 사회와의 문화적 소통을 활성화하는 경험 주체의 참여와 상호작용 증진의 중요성을 짚는다.


미술관의 참여적 프로그램은 관람객 개인이 형성하는 의미와 학습에 중점을 둔 관람객 중심의 담론을 넘어 소통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는 사회-문화적 공진화를 유도해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공고히 하고 있다. 


* 읽기 자료: 니나 사이먼, 『참여적 박물관』, 이홍관, 안대웅 옮김, 연암서가, 2015 (링크)

💎 : 나와 세상 사이의 절대적인 단절은 없다는 감각의 위로.

🦉 : 균형을 이루기 위해 향하게 될 모든 에너지의 방향.

🌏 :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

🍀 :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수단, 생존의 방식.

🌝 :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함께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해나가는 것.

🎁 : 모든 사물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서로 연결되고 감각되고 있는 변화.

🌊 : 공생으로 나아갈 것만 같지만, 공멸로 치닫을지도 모르는 것. 

👻 : 예견된 미래로 가기 위한 준비 운동.

  이미지 출처 👀 


① 윌리엄 앤더스, "AS8-14-2383HR", 미국 항공 우주국 홈페이지 (링크)
② 린 마굴리스가 설명한 생물학 5계 체제 이미지: 린 마굴리스, 공생자 행성』(2007) 참고
③ 레비 R. 브라이언트, 『객체들의 민주주의』 표지 이미지, 알라딘 홈페이지: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65584129
④ 율리 체, 『잠수 한계 시간』 표지 이미지, 알라딘 홈페이지: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3240080
⑤ *c-lab 6.0 x 안가영, 《우주 감각: 미래 인류를 위한 XR 시뮬레이션》 VR 내 영상 캡처

 편지 속 사진 출처 📷 

▶ A씨의 사진: 단 로세하르데, <스모그 프리 타워>(2019),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홈페이지 (링크)
▶ B씨의 사진: 이불, <벙커-엠. 바흐친>(2007),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홈페이지 (링크)
*c-lab 6.0 리서치 딜리버리, 잘 읽으셨나요? 🙂
*c-lab이 더 좋은 자료를 전달할 수 있도록 소중한 의견 부탁드립니다!

코리아나미술관 &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06024 서울시 강남구 언주로 827
T. 02.547.9177│E. info@spacec.co.kr
본 메일은 회원님의 수신동의 여부를 확인한 결과 회원님께서 수신동의를 하셨기에 발송되었습니다. 
메일 수신을 원치 않으시면 [수신거부]를 클릭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