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과 분배가 경제의 주축’ 영국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 인터뷰

입력
수정2018.10.11. 오후 2:27
기사원문
김유진 기자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도넛경제모델’를 만든 케이트 레이워스가 지난달 28일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19세기 후반부터 경제학은 물리학처럼 과학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데 주력했습니다. 하지만 경제의 핵심은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동학을 이해해 시스템에 개입하는 데 있어요. 이제는 성장이 아니라 재생과 분배가 경제 설계의 핵심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수요-공급 법칙, 합리적 개인 등 주류 경제학을 지탱하는 기본 전제들이 지니는 맹점들은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인간의 합리성을 맹신한 나머지 현실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준다, 시장 만능주의에 빠져있다, 금융위기 예측에 실패했다, 등의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그런데 기존 경제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많아도 새로운 경제의 방향이나 모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영국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의 ‘도넛 경제 모델’이 주목받은 이유는 간명한 그림으로 문제와 해법을 동시에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는 도넛의 바깥쪽 고리에는 기후변화 등 치명적 환경 위기를 막는 지구 생태적 한계선을, 도넛의 안쪽 고리에는 충분한 식량, 깨끗한 물, 교육·의료 접근권 등 모두가 누려야 하는 사회적 기초를 표시했다. 이에 따르면 도넛 안, 즉 “생태적으로 안전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정의로운 공간”은 인류가 지향해야 하는 균형을 의미한다.

케이트 레이워스가 고안한 ‘도넛 경제 모델’의 모습. 도넛 바깥쪽 고리는 지구 생태적 한계선을 의미하고, 도넛 안쪽 고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사회적 기초를 뜻한다. 학고재 제공

최근 국내 출간된 <도넛경제학>(학고재)을 들고 방한한 레이워스를 만났다. 그는 지난달 28일 서울 정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각국 정부가 ‘성장중독’에 빠져있는 현실을 꼬집으며 “성장에 대한 맹목을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21세기 최대 과제”라고 역설했다.

정부가 바뀌어도 수식하는 형용사만 변할 뿐, ‘성장’은 포기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문재인 정부도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포용적 성장으로 경제 목표를 규정하고 있다. 레이워스는 “소득주도성장이나 혁신 성장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며 “유럽에서는 주로 성장 앞에 스마트, 회복탄력적, 녹색 등의 단어를 쓴다”고 말했다. 그는 “다행히 최근 들어 정부나 정치인들도 성장이 낡은 이야기라는 점을 깨닫는 추세”라며 “경제의 건전성이나 균형을 중시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30여년 동안 환경 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환경과의 조화를 고려하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도 대두했다. 레이워스는 이에 대해 “한 나라가 성장 목표를 유지하는 동시에 지구 생태에 미치는 악영향을 줄일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다”며 “‘좋은 삶’을 달성하려면 성장이 아닌 재생적·분배적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금 제도 개편은 순환적 경제를 위한 첫 걸음이다. 그는 “노동에 세금을 물리는 것은 기업들에게 채용을 한다고 벌을 주는 셈이다”며 “자동화 시대에 부족한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자원이므로 비재생 자원 사용에 세금을 매겨야 한다”고 말했다.

“아직도 화석연료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 합리적이라는 기존 경제학의 가정이 잘못됐다는 단적인 증거”라고 강조한 그는 재생에너지 개발 확대를 비롯해 쓰레기 매립이나 플라스틱 사용 금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오픈소스나 코먼스, 블록체인 등 새로운 분배적 기술에 힘입어 아이디어를 글로벌하게 무료로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며 “페이스북이나 아마존 등 네트워크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그런 기술이 핵심이 되는 경제를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블록체인 등과 같은 기술의 규제가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중앙집중화된 국가 권력을 약화시키고 시민들의 역량을 키우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도넛 경제 모델은 2012년 국제구호단체 옥스팜 보고서를 통해 처음 소개된 이래, 국제 사회에서 관심을 모았다. 2015년에는 유엔이 새천년개발목표(MDGs)를 대체하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에 관한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도 비중있게 언급됐다. 그는 “실무그룹 협상 막바지에 내 그림이 ‘빅 픽처’를 상기하는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적극적으로 변화를 수용할 때만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다”며 스스로를 ‘활동가’로 불렀다.

<도넛경제학>을 쓴 영국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는 “여성과 비서구권 경제학자들이 경제학에 다양한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경제학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레이워스에게 영감을 준 경제학자들은 주로 여성이나 비서구권 학자들이다. 구체적으로는 2009년 여성으로는 처음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엘리너 오스트롬(1933~2012), ‘성장의 한계’ 보고서를 쓴 환경과학자 도넬라 메도즈(1941~2001), ‘기업가형 국가’라는 개념으로 유명한 마리아나 마추카토(서섹스대), 인도 출신 아마르티야 센(하버드대), 장하준(케임브리지대) 등이다. 그는 “경제학의 창시자라는 이들이 거의 대부분 이미 죽은 백인 남성이자 제국주의 국가 출신이다보니, 자원의 희소성이나 무임금 돌봄 경제의 중요성을 외면했다. 더 많은 여성들이 경제학 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케임브리지대 지속가능성 리더십 연구소 선임 연구원인 그는 옥스퍼드대에서 개발경제학 석사를 받은 뒤 아프리카 현지, 옥스팜 등에서 현장 경험을 쌓았다. 쌍둥이를 키우는 엄마이기도 한 그는 “엄마가 된 후 이론적으로만 알았던 노동시장의 성별분업 문제를 분명히 이해하게 됐다”며 “재생산 경제를 직접 겪은 여성 경제학자들이 좀더 통합적 관점으로 경제를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자 프로필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생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