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보내는 열여덟 번째 흄세레터
《그녀와 그》의 후기를 찾아보다가 웃음이 터졌어요. 한 독자님이 책 본문을 찍어 올렸는데, 연필로 이렇게 적어두셨더라고요. "제발 헤어져..." 어쩐지 글씨체에서도 지긋지긋함이 느껴져서 더 웃겼달까요. 
오늘 레터에서는 '제발 헤어져!' 소리가 절로 나오는 《그녀와 그》의 본문 일부를 발췌해 보내드려요. 달달한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이 사랑 이야기에서 편집자 '흄'과 '세'는 특히 어떤 부분에 꽂혔을까요? 함께하면 좋을 콘텐츠도 준비했으니 마지막까지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그녀와 그》 미리보기 1


이제 정말 지긋지긋합니다. 우리 서로에게 솔직해집시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아요. 서로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요! 서로를 속여왔던 겁니다. 당신은 그저 연인이 있었으면 했던 거고, 아마 당신에게 저는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아무것도 아니었을 테지요! 당신에게 필요했던 건 하인이나 노예였다고요. 불행한 저의 성격, 제가 진 빚, 저의 권태, 무분별한 생활에서 느끼는 저의 무기력함, 진정한 사랑에 대한 저의 환상이 저를 당신의 재량에 맡기게 될 거라고, 제가 다시는 정신을 차릴 일이 없을 거라고 믿게 만든 겁니다. 이렇게 위험한 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려면 조금 더 행복한 성격, 더 큰 인내심, 더 많은 융통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많은 재능이 당신에게 필요했을 겁니다. 테레즈, 당신을 모욕하려는 건 아니지만, 당신은 재능 같은 건 전혀 갖고 있지 않아요. 당신은 하나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전체처럼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단조로우며, 고집이 세고, 당신이 그렇게나 주장해온 절제를 남용하면서 자만에 빠지는 사람입니다. 근시안에다가 우둔한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의 철학에 지나지 않는 그런 절제 말입니다. 저에 대해 말해볼까요? 그래요, 저는 미쳤고, 불안정하며, 배은망덕한 놈, 그러니까 당신이 원한다면 어떻게 불러도 될 그런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는 솔직합니다. 계산하지 않습니다. 뒷생각 없이 저를 그냥 맡깁니다. 이런 까닭에 저는 똑같은 방식으로 다시 정신을 차립니다. 저의 정신적인 자유는 신성한 것이고, 그래서 제 허락 없이 누구도 제게서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자유를 당신에게 맡긴 것이지, 드린 게 아닙니다. 이 자유를 잘 사용해서 저를 행복하게 할 방법을 찾아내어야 했던 건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오! 당신이 저를 원하지 않았었다고 제게 말하려 하지 마세요! 저는 여자들의 이런 변화와 겸손 뒤에 숨어 있는 속셈이 뭔지 알고 있습니다.(159∼160쪽)

흄's pick

로랑, 이 못난 사람…… 자기 재능이 더 뛰어나다고, 자기는 여자들의 모든 속셈을 다 알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당신은 못난 사람……😥

《그녀와 그》 미리보기 2


로랑의 고집 탓에 두 사람은 숲에서 길을 잃었고, 네 시간을 걷다가 동틀 무렵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숲의 잘고 갑갑한 모래 속을 걷는 것은 아주 힘들다. 발을 질질 끌던 테레즈는 더 이상 걸어갈 수 없었고, 모래 속 과격한 움직임으로 활기를 되찾은 로랑은, 이런 그녀를 위해 발걸음을 늦추어주는 것에는 조금도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옳은 길을 찾고 말겠다고 계속 고집을 부리면서, 또 이따금 그녀가 지쳤는지 물어보면서, 그리고 그녀가 ‘아니’라고 대답하며 그가 이 봉변의 원인이라는 자책감을 갖지 않기를 바랐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그는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다음 날, 로랑은 전날 일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중략)

심각한 병에 걸린 로랑을 보게 될까 걱정하면서 그녀는 잠을 자지 못했었다. 그러나 로랑은 목욕을 했고, 다시 산책할 수 있을 정도로 거뜬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밀월여행이 무색할 정도로 전날 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는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서글픈 느낌은 테레즈에게서 빠르게 지워져갔다. 파리로 돌아온 그녀는 둘 사이에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로랑은, 자신은 놀라 얼빠진 얼굴을 하고, 테레즈는 옷이 찢어지고 온몸이 피곤으로 부서진 채 숲속 저 달빛 아래 헤매고 다녔다며 테레즈와 자신을 풍자했다. 예술가들은 서로를 풍자하는 데 너무도 익숙한 사람들이었고, 테레즈 역시 자신을 풍자하는 걸 재미있어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쉽사리, 마음먹은 대로 펜 끝을 놀릴 수 있었음에도 테레즈는 절대로 로랑을 풍자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녀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그날 밤의 장면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스케치하고 있는 로랑을 보면서 슬픔에 잠겼다. 영혼의 어떤 고통은 그녀에게는 절대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가질 수 없는 것으로 비쳤다.

로랑은 이런 테레즈를 이해하기는커녕 더욱더 빈정거리며 사태를 악화시켰다. 그는 자신의 얼굴 밑에는 “숲속에서, 그리고 제 연인의 영혼 속에서 길을 잃은 자”라고, 테레즈의 얼굴 밑에는 “옷과 매한가지로 찢어진 마음”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작품에는 ‘묘지에서 보낸 밀월여행’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테레즈는 미소를 지어보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는 우스꽝스러웠음에도 대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이 데생을 칭찬했고, 슬픔이라는 주제가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녀가 잘못 생각했다. 그의 유쾌함을 잘못된 방향으로 내달리게 놔두지 말아야 한다고 처음부터 로랑에게 요구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더 나았을 것이었다. 그가 다시 아프지는 않을까, 그가 우울한 농담을 하는 와중에 혹여 착란에 사로잡히지는 않을까 겁이 나서, 그녀는 자신을 짓밟고 가도록 로랑을 그냥 놔두고 말았다.(129~131쪽)

세's pick

우리 희생 말고 배려까지만 하기로 해요. 

👀편집자 흄&세의 추천 콘텐츠👍

오지은, (3) 🎹
앨범명이 (3)이에요. 이 앨범의 소개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지긋지긋한 사랑들에게 들려주는 오지은의 축가." 딱이지 않나요?
수록곡 모두 좋지만, 《그녀와 그》와 가장 닮은 곡은 타이틀곡 〈고작〉이에요.
"난 아직 너를 노래해/ 이렇게 지긋지긋하게/ 수많은 색이 뒤섞여/ 엉망이 된 물감처럼/ 내가 네게 부르는 마지막 사랑노래는/ 이토록 추하고 탁하기만 해"

(공지) 📸 #흄세사진대회 곧 마감! 🔔 
흄세사진대회가 곧 마감돼요. 사진첩을 뒤적이며 어떤 사진을 자랑할까 고민하다보면 지난 여행의 추억이 되살아날 거예요.
-참여 방법: 시즌 2 작품에 등장하는 나라(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일본, 영국, 미국 등등)에서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고 해시태그를 달면 끝! #휴머니스트세계문학 #흄세 #흄세사진대회
-참여 기간: 7월 4일~7월 27일(수요일)
-선물: 문화상품권 5만 원(4명), 스타벅스 아이스 아메리카노 기프티콘(10명) 
자세한 내용은 여기보실 수 있어요
4개월마다 만나는
하나의 테마, 다섯 편의 클래식
📚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 2. 이국의 사랑
006 베네치아에서의 죽음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 | 김인순 옮김

007 그녀와 그

조르주 상드 | 조재룡 옮김

008 녹색의 장원

윌리엄 허드슨 | 김선형 옮김

009 폴과 비르지니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 | 김현준 옮김

010 도즈워스

싱클레어 루이스 | 이나경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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