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아미래”
정말? 엄마가 암이라는데 저 친구는 왜 웃지? 알고 보니 ‘아미’란 방탄소년단 팬클럽 ‘ARMY’를 말하는 것이란다. 그 이야기에 애들과 같이 웃던 내가 어느 날 암환자가 되었다. 아. 나도 이제 아미다! 암 선고에 밤새워 고민했다. 온갖 인터넷 정보를 찾고 카페커뮤니티를 들락거렸다. 그곳에서 난 위안과 불안을 얻었다. 치료가 끝난 지금도 매일 습관처럼 카페커뮤니티에 들른다. 오늘도 수많은 환자들이 생겼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원망하고, 고통스러워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말한다. “힘내세요! 시간은 금방 흐릅니다.” 내 주변에도 이전에 비해 유방암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내가 먼저 투병했기에 그들의 연락을 직접 받기도 하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기도 한다. 나는 이참에 암 선고를 받은 이후의 과정들을 글로 쓰면서 내가 알고 있는 팁들을 친구들과 나누고 싶다.
작년 1월 나는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았다. 그간 건강검진을 잘 받지 않았던 나는 누구를 원망할 겨를도 없이 온전히 책임을 져야했다. 솔직히 유방암은 내가 걱정하던 병은 아니었다. 난 아이들에게 모유수유도 짧게나마 하였고, 하루 8시간 이상 브레지어를 하면 유방암에 걸린다고 하길래 브레지어를 즐겨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는 갱년기에 필수라고 하는 호르몬약도 먹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유방암 가족력이 없었다. 왜 걸렸을까? 언제 걸렸을까? 그러나 책자 곳곳에서 암의 원인이라고 하는 음주, 비만, 운동부족,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나는 다 해당되었다! 내가 왜 걸렸냐고 울고불고, 원망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렇게 순전히 ‘내 탓이다’ 하는 자책도 문제다. 암에 걸리는 것은 그냥 교통사고 같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원망과 자책하는 시간은 짧게! 책과 자료를 찾으며 치유 방법을 찾는 게 낫다.
유방엑스레이를 찍는 것은 모든 여성들에게 힘든 경험이다. 가슴의 살을 집어 짜내서 두 철판 사이에 집어넣고 누르면 비명이 절로 나온다. 이것이 유방암 검사의 최대 적이 아닐까? 난 여의사가 있는 믿음직한 유방외과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갑자기 가슴에서 커다란 몽우리가 잡혔어요’ 의사는 어쩜 저렇게 둔할까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럴 리가 없다고, 적어도 2년은 넘었을 거라고 했다. 전조증상이 있었나 생각해봤다. 축제에서 신나게 팔을 흔들어 댄 후에 쇄골뼈가 몇 달 동안 아팠고, 주기적으로 심한 이석증이 왔으며, 모임에서 술을 먹고 뻗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으로 돌아오면 잠시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온 몸이 피곤했다. 그러나 내가 암이 아닐 거라고 은근 믿고 있었던 것은 몸무게가 전혀 줄지 않았다는 것이다. 암환자라면 모름지기 살이 쪽 빠져야 하지 않는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
소식을 전해들은 친구들은 주변에 유방암 걸리고도 완치되어 30년간 잘 살고 있는 지인들을 얘기하며 나를 위로했다. 심지어 누군가는 나의 사주를 얘기하며 ‘너처럼 센 사주는 쉽게 죽지 않는다’ 라고 했다. 그런 말들이 내게는 다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홀로 있는 밤이 되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났다. 남겨지게 될 가족들이 제일 걱정이었다. 세 딸들은 결혼을 안 한다고 했으니 특별히 친정엄마 노릇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철딱서니 없는 남편은 어쩌나, 늙으신 부모님은 어쩌나. 밤새 눈물이 났다. 항암에 들어가기 전에 주변을 정리하고 싶었다. 먼저, 쌓아놨던 짐을 버리기 시작했다. 내가 없을 때 이 짐들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온갖 책을 읽어도 변하지 않던 나의 생활이 암 선고에 지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버리자! 소박해지자! (그 때 다 버리고, 난 지금 다시 사고 있다 ㅠㅠ)
남편은 처음엔 암일지도 모르겠다는 내 말을 안 믿었다. 그러다 진단받고 큰 병원으로 옮기자 실감하기 시작했다. 밤새 등 돌리고 누워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던 그의 뒷모습이 생각난다. 그는 논문이건 기사건 몽땅 찾아 읽었다. 코로나로 바쁘지 않게 된 회사 사정이 그를 늘 병원에 동행하게 했다. 이 모든 과정을 남편과 함께 겪을 것이기에 좀 든든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이 엄청난 사실을 어찌 알리나 고민이었다. 난 입시를 막 마친 막내 아이에게 이 소식을 전해 아이의 해방감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검사의 검사를 거듭하고 있을 즈음 둘째 아이가 수술은 언제 하냐고 물었다. 갑자기 훅 들어 온 질문에 얼떨결에 “6월에”라고 얘기했다. 간호사 친구를 둔 둘째는 수술을 하면 위험한 상황은 아닌 거라 나를 위로했다. 그 때부터 아이들은 서로 당번을 짜서 집안 살림을 맡았다. 거실 청소와 빨래, 자기들 음식을 아이들이, 나의 음식과 빨래는 남편이 맡았다. 다 키웠다!
여기까지가 암 진단을 받고 항암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나의 이야기이다. 다음 달에는 가장 힘들다는 항암산을 넘는 이야기를 적으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