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의사나 소방관 판사, 검사, 변호사, 용접공, 환경미화원, 요양보호사,은행원, 미용사 등등 월급을 받아 일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있다고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직업이 아닌 그림작가는 어떻게 세상에 이바지 할 수 있을까하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교육과정에서도 늘 예체능은 벌책부록같은 느낌이나 꿔다놓은 보릿자루같은 역할로 존재했었다. 적어도 대학에서 예체능을 전공할 예정인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내 세상의 전부였던 미술은 기초교육 과정에서 그냥 ‘고명’같은 존재였고 교육과정의 메인인 국영수에 관심이 없던 예체능 지망 학생들은 대학입시 합격율에 골칫거리가 되어 대학이나 갈 수 있으려나하는 담임들의 걱정 중 일부분이었다. 


내게는 미술이 언제나 메인이었다. 삶의 중심이 그림이었고, 옛 화가들이었으며 관련된 역사를 아는 것이 제일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다. 20대 초반 영어 회화 수업을 들으러간 문화원에서도 다른 주제로는 영어로 대화할 수 없어도 예술과 관련된 주제에서는 청산유수로 말할 수 있었다. 나에게 예술은 그정도로 힘을 주는 존재이다. 그럼 이제, 나에게 힘을 주는 존재를 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힘이 되는 그런 역할을 내 그림이 할 수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해야한다. 


시각 매체는 힘이 세다. 중세시대에 종교 전파를 위해 가장 우선순위에서 쓰인 매체가 그림이었던 점을 들면, 그림이 활자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을 떠올려보면 시각 매체를 해석하는 일에는 개개인의 상당한 지적수준을 필요로하며 문화적 이해가 꼭 바탕에 깔려있어야한다는 지점에 꽤 중요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다른 문화권에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 될 있다는 말이기도하고 그만큼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에 신중해야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상업 이미지 작가로 활동하면서 느낀점은 인간은 대체로 나보다 나은 상태의 환상의 인물이 그림에 나오는 것을 선호하며 그 가상의 인물에 대한 호감도가 상품의 구매로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경험을 예로 들면,최근에 진행했던 출판표지 작업의 경우 주관적인 해석으로 개성 강하게 그려낸 소녀의 이미지가 비호감이어서 호감이 느껴지는 예쁜 얼굴의 소녀로 다시 그려야했던 일이 있었다. 나는 이부분에서 불안감을 느꼈다. 책의 예상독자는 10대의 학생들이었고 표지의 주인공은 10대 여자아이였다. 그렇다면 외모에 대한 과한 관심과 강박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에게 나의 표지가 도움이 될지에 관한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책 표지가 갖는 호감을 제외하고 내 작업물이 외모강박을 부추기는 일에 이바지를 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비용을 받으며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을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다.


상업 작가의 숙명을 숙명으로 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여러 방식으로 다양한 인물을 표현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거의 개인작업 위주로 진행하고 있지만, 노인과 어린이,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모습, 유아차를 밀고가는 아버지의 모습등 언젠가 상업이미지에 쓰일 날을 기대하며 만들어내고 있다.


작업 전에 질문을 꼭 넣으려고한다. 


  1. 이 상황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은 왜 없는가
  2. 사람의 신체를 묘사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한 고민을 할 것
  3. 특정 그룹의 선입견을 강화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양할 것
  4. 트럭을 운전하는 나이든 여성은 없는가
  5. 남성성이 강한 직종은 여성으로 표현되면 안되는가
  6. 무의식적으로 지운 존재가 있는가
  7. 정상성은 무엇인가
  8. 여성과 남성의 성비가 그림에서 적절하게 이루어졌는가
  9. 특정 분야의 편견을 강화하는 이미지를 만들었는가
  10. 묘사 전에 충분히 자료를 찾았는가

일단은 열가지로 추린 질문이지만 더 많이 하기도 하고  지키지 못할 때도 있다. 인간의 본능이 내 상황보다 더 좋아보이는 이미지에 끌리기 때문인지 작업을 하는 나조차도 힘들다. 물론 수려한 외모의 여성과 남성이라던가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젊은 나이의 사람들, 이쁘고 잘 손질 된 털의 반려동물들은 의식을 놓으면 관습적으로 그리게 되는 이미지이다. 다시 말하면 지겹게 그렸고 실제로도 질리는 이미지이다.


세상을 살면서 보고싶은 것만 볼 수 없다. 특정 사람들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살 수 없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삶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부분에서 작업의 폭이 넓어진다고 생각한다. 


돈을 벌기 위해 상업적인 이미지를 그렸다면 그 수에 비례해서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개인작업을 하거나 비영리단체의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


늘 이미지가 가진 힘을 염두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