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아〉(감독 곽민승)
독립영화 큐레이션 레터 by. 인디스페이스
vol.123 〈말아〉
9월 7일 오늘의 큐 💡   
Q. 제대로 말아본 적, 있나요? 🍙
이번 레터를 준비하면서 '말아'라는 말이 이렇게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어요. 헤어롤을 머리에 말아! 밥을 국에 말아! 그럴거면 하지 말아라! 아주 말아먹었다! 어라, 갈수록 무서운 말이 되어가는 듯 한데요...?!😬 님은 오늘 레터의 제목을 보고 어떤 뜻을 먼저 생각하셨나요?
영화 <말아>의 주인공 주리는 무엇을 말아버렸을까요. 일단, 취업은 말아먹었고요. 연애도 관두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분기점에서 인생이 제대로 말린 기분이 들어요. 돈도 없고, 할일 없고, 의욕도 없지만 시간이 많았던 주리는 엄마의 협박 같은 제안에도 말려들고 맙니다. 엄마가 할머니 간호를 위해 지방에 가있는 동안 분식집 영업을 맡아 생전 처음 김밥을 제대로 말아보게 된 건데요🍙

김밥, 남이 싸주면 한 입에 쏙쏙 먹을 수 있는 빠르고 간편한 음식이지만 직접 해본 적 있다면 아실 거예요. 재료 준비부터 돌돌 예쁘게 마는 것까지 쉬운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음식이라는 걸요. 무조건 시간을 들여서 몇 차례 연습을 거쳐야만 비로소 평소에 먹는 '흔한 김밥'을 말 수 있죠. 편하고 익숙한 순간을 위해서는 그렇게 부단한 단련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붕 떠있는 듯한 주리 역시 시간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죠. 오늘은 제대로 말아볼 시간을 주는 영화, <말아>를 소개합니다. 청춘이라고 모두 같은 모습은 아니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주리와는 조금 다른 모습의 청년들을 위로하는 엄태화 감독의 첫 장편영화 <잉투기>도 곁들여보았어요.

이번 주 금요일부터 추석 연휴인데요. 님은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인디즈는 이번 주말 명절을 맞아 푹 쉬고 다음 주 레터를 한 주 쉬어가려고 해요. 하지만! 아쉬워하실 필욘 없답니다. 연휴가 시작되는 금요일, 인디즈 큐!레이션 레터로 임오정 감독의 2009년 작품 <거짓말>이 찾아갈 예정이거든요😙 한주간 이 영화를 곱씹다보면 시간이 금방 갈 거예요. 그럼 님의 한 주가 보름달처럼 밝고 동그란 시간들로 채워지길 바랄게요🌝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저는요. 속 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말아〉

 

"김밥은 믿음직스러워요.

재료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예상 밖의 식감이나 맛에 놀랄 일이 없습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는 위와 같은 대사가 나온다. 대사를 읊는 인물이 자폐 스펙트럼을 가졌기에 캐릭터의 성향 (혹은 자폐 스펙트럼의 특성)에 관해 설명하는 대사이기도 하지만 문득 내가 김밥의 단면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지, 김밥 속 재료들이 얼마나 ‘예상 가능한’ 조화였는지 헤아리게 되었다.

이렇게 ‘믿음직’스럽고 ‘예상되는’ 음식인 김밥은 별다른 소개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무척 익숙하고 일상적인 음식이다. 분식점은 물론 편의점에도 각양각색의 김밥이 있고, 김밥 전문점이 아닌 식당에서도 곁들이 음식으로 김밥을 판매하는 경우가 잦다. 봉지에 든 빵이나 샌드위치가 아니라 ‘밥심’이 필요할 때 선택하는 한 끼 식사이자 포일이나 포장을 뜯어 잘 잘린 김밥을 하나씩 먹기만 하면 되는 간편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밥을 직접 싸보고자 마음먹었을 때, 기존에 느끼던 익숙함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소박하고 정감 있는 이미지와는 달리 생각보다 많은 재료와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김밥이 신뢰를 갖는 과정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말아〉의 주리 역시 몰랐을 것이다. 직접 김밥을 ‘말아’보기 전까지는.

 

할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엄마가 시골로 내려가 있는 기간 동안 주리는 ‘집’을 담보로 엄마와 계약한다. 주리가 지내고 있던 집을 내놓지 않는 대신 엄마의 김밥가게를 대신 맡는 조건이다. 별다른 직장이나 경제활동을 가지지 않고 생활하던 주리는 이 조건을 내켜 하지 않지만, 끈질긴 엄마의 설득에 넘어가고 만다. 주리는 메뉴를 대폭 줄이고, 멸치를 볶을 때 물엿을 넣었다가 다시 빼고, 서툰 김밥 말기를 계속하며 가게를 운영해 나간다. 게임과 담배, 김밥 꽁다리와 맥주가 전부였던 주리의 일상에 새로운 존재들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영화는 그렇게 흐른다. 주리의 멸치가 알맞은 간을 찾아가는 동안, 단체주문을 완료할 정도로 김밥 마는 실력이 늘어가는 동안 생긴 몇 가지 사건사고도 큰 탈 없이 지나간다. 〈말아〉를 보면서 가장 편안했던 지점은 모든 인물이 마치 김밥 같다는 것이다.

(...) 

주리에게 빼앗길 것이 생길 때마다, 주리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가게 밖을 나설 때마다, 혼자 퇴근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을 졸였다. 이원이 밴드를 놓고 갔을 때도, 시험에 늦었다며 부탁할 때도, 춘자 이모가 이것저것 챙겨 주리를 찾아올 때도, 안면도 없는 손님이 정신없이 단체 주문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이 잔잔한 일상을 망가뜨릴까 염려했고 겨우 남아있는 것마저 빼앗아 갈까 긴장했다. 그들은 김밥 같은, 숨긴 것이 없어 보이는 그대로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는 영화가 다 끝나고서야 깨달았다.

 

점점 더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나와 세상 모두. 폭력적인 것, 선정적인 것, 거침없이 나아가 뒤돌아보지 않기를 요구받는다. 그에 응하기 위해 애쓰고, 내 그릇에 맞지 않는 폭력과 거침없음이 드러날까 봐 숨기고 또 숨긴다. 어떤 것들이 나를 이루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아무리 파헤쳐도 도대체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지경이다. 그래서 〈말아〉 속 인물들을 한 번에 믿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창문 같은, 매캐한 가운데 환기가 되어주는 존재가 이제는 제법 낯설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극적인 것이라도 김밥 속 재료로 들어가면 그 맛이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던데 내가 가진 것들도 그렇게 어울릴 수 있을까. 피해야 할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독특한 맛과 필요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속 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믿음직스럽고 담백한 사람, 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훤히 보여서 무심코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일이 없는 사람, 내게 맞지 않는 걸 욕심껏 가지고 있더라도 어울리며 조화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신나라 김밥을 찾았던 김밥 같은 사람들처럼.

 

인디즈 이예본

<말아> 감독 곽민승|76분|드라마|12세이상관람가 


전염병 유행으로 집에만 콕 박혀 있는 청년 백수 ‘주리’. 배고픔도 실연의 아픔도 모두 집에서 해결한다

어느 날 자취방을 부동산에 내놓았다는 연락과 함께 엄마의 김밥집을 운영하라는 미션이 주어지는데…
 
인생도 김밥처럼 요령껏 말 수 없나?
스물다섯 주리의 명랑한 자력갱생이 시작된다

단일하지 않은 청춘의 세계 🥊

닮은 듯 다른 어조로 청년들을 위로하다

〈잉투기〉

 

영화 <말아 청년 백수 주리는 묘하게 낙천적이면서도 수줍은 미 사이 청춘의 불안함을 지니고 있다표정과 눈빛행동 하나하나에서 섬세하지만 진실된 청춘의 감성이 뭍어난다이렇게 영화 <말아> 불안하게 흔들리는 청춘들과 인생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잔잔하고 포근한 위로를 건넨다

영화 <잉투기>에는 주리와 비슷한 또래의 청년 태식이 등장한다태식은 '잉여인간'으로 표현된다. 주리를 수식하 '청년 백수' 묘하게 닮은  다르다. '잉여'. 나머지라는 하지만 단순한 나머지가 아니다쓰고   남은 나머지불필요하고 쓸모없음의 이미지가 부각된다

하지만 제목에서 유추할  있듯태식은 투기한다맞붙어 싸운다자신을 잉여인간이라고 정의 내리는 세상에 맞서그리고 스스로를 잉여인간으로 자조하는 스스로에 맞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놈이 자존은 안되는데자의식만  놈들이야."

영화 <잉투기> 영화 <말아>와는 다른 어조로 청춘들을 위로한다격투기의 격렬하고도  튀기는 치열함이 청춘의 잔상을 생생하게 그린다그리고 마지막까지 영화는 말한다잉여인간들이여투기하라. 그것은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인디즈 김정연

<잉투기> 감독 엄태화|99분|드라마|15세이상관람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칡콩팥’으로 활동하는 ‘잉여인간’ 태식은 같은 커뮤니티에서 사사건건 팽팽하게 대립하는 ‘젖존슨’에게 속아 급습을 당한다.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모습이 고스란히 찍힌 영상은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퍼져나가는데… 치욕감과 분노로 ‘젖존슨’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태식, ‘젖존슨’을 이기기 위해 절친 ‘희준’과 종합격투기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격투소녀 ‘영자’를 만난다.
뚜렷한 목표 하나 없이 살아가는 잉여 청춘 ‘태식’과 욕구 불만을 먹방으로 해소하는 특이한 격투소녀 ‘영자’ 그리고 겉보기엔 부족함이 없지만 텅 빈 속을 채우고 싶은 부유한 잉여 ‘희준’까지, 이 셋이 모여 화산처럼 청춘을 폭발시킨다!
ING+투기 = 우리는 싸우고 있다

추억까지 꾹꾹 담아 말았어요 👩‍🍳  
<말아>의 개봉 첫 날, 주리와 이원이 극장에 나타났어요! 팬데믹 시대를 정면으로 가로지르는 청춘들의 이야기는 영화에 출연한 심달기, 우효원 배우에게도 시기적절한 위로가 되었던 것 같아요. 곽민승 감독과 두 배우가 함께한 슴슴하고 행복한 김밥 같은 시간을 담았습니다 🍘
"이런 것이 사실 우리 세대 사람들한테 되게 만연한 일들이지만 만연하다고 해서 아프지는 않은 건 아니잖아요. 다들 주리 정도의 우울감과 무기력함은 다들 공감을 하실 거라고 생각하고요. 뭔가 주리한테는 코로나가 핑계였던 것 같아요. 자기가 다 꾸려놓은 방 안에서 나오지 않을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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