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기 있어”


‘재현’은 어느 날 죽은 아내 ‘이후’로부터 영상 편지를 받습니다. 때는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이 된 2032년. 재현은 자신이 직접 안락사 버튼을 눌렀던 아내로부터 편지를 받고 당황하지만, ‘여기 있다’는 아내의 말을 쉽게 무시하지 못합니다. 알고 보니 이건 사람의 기억을 토대로 창조된 가상공간인 ‘욘더’로부터 온 메일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그곳에서 만난 이후는 재현에게 현실을 떠나 ‘여기서 함께 살자’는 제안을 합니다. 욘더에서 사랑하는 이후와 평생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달콤한 제안은 재현을 갈등하게 하지만, 재현은 아직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이후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의 현실에서 확신할 수 있는 건 ‘이후의 죽음’이기 때문에, 재현된 이후를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NO.35]


2022년 10월 30일, 이후


2022년 11월 5일


  


<욘더>는 <동주>, <자산어보>, <사도> 등 열네 편의 장편 영화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의 첫 드라마 연출작입니다. 최근엔 주로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던 이준익 감독이 이번엔 근 미래에서 진행되는 SF 장르의 연출을 맡았습니다. 얼핏 완전히 분위기가 다른 영화일 것 같다는 예상을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시대는 시대일 뿐 결국은 인간의 필연적인 죽음과 누구나 겪는(혹은 겪을) 이별에 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믿음에 관한 생각거리를 던지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재현이 자신이 직접 죽였던 이후의 재현(再現)을 믿지 못한다는 말을 했었는데요. 재현은 실제로 이후에게 “당신은 이후가 아니야”라는 말을 할 정도로- 혼란-에 빠집니다. 방금 적은 문장은 잘못 적은 것이 아닙니다. 재현이 “당신은 이후가 아니야.”라는 ‘단정적인’ 말을 하기는 했지만, 이 말을 했다는 것이 꼭 확신에 차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생각을 말로 내뱉었다는 것이 더 혼란스러운 상태인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확신에 찬 사람은 구태여 그런 말을 하지조차 않을 테고, 애초에 이후의 메시지에 대꾸하지도 않았을 것이니까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재현의 입에선 마침내 ‘내가 나를 못 믿겠다'는 한탄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을 믿으십니까. 당신은 당신의 기억을 믿으시나요. 당신의 기억 중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명확하게 구분이 가능하신가요. 만약 당신이 정말로 ‘진짜’라고 믿는 기억의 시퀀스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그대로 재현한 하나의 세계는 과연 정말로 진짜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일까요. 애초에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요.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정말 가능하다면 그것은 진짜일까요. 가능해도 그것은 진짜가 아닐까요.



관련해 욘더의 관리자 세이렌이 재현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재현 씨가 부인이라 느꼈으면 진짜고, 못 느꼈으면 가짭니다.” 세이렌은 그것을 진짜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믿는 것이 곧 진짜’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 진짜 가짜 그게 뭐가 중요해. 너가 진짜라고 믿으면 돼.’ 이 말은 마치 종교 지도자의 논리처럼 들리기도 하는데요. 실제로 이 드라마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욘더를 ‘천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천국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증명할 수 없다는 점, 오직 믿음으로 설득한다는 점에서 욘더는 천국의 과학 기술 버전처럼 느껴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종교는 사람들을 당장 천국으로 향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함부로 죽음으로 몰지는 않습니다. ‘죽으면 천국이 있으니,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지금 당장 그곳으로 갑시다!’라고 말하는 지도자는 몇몇 극악무도한 살인마를 빼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죽어도 천국이 있다’의 영역에서, 산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 현재 종교의 역할입니다.


다시 말해 ’죽으면 천국이 있다’와 ‘죽어도 천국이 있다’는 말은, 단어 하나 차이일 뿐이지만 큰 뉘앙스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욘더>가 어느 순간 무섭게 느껴지는 순간은, ‘욘더’의 모토가 ‘죽어도 천국이 있다’가 아닌 ‘죽으면 천국이 있다’ 같다는 생각이 드는 때입니다. 이후의 욘더에서 함께 살자는 제안이 바로 그 계기인 것입니다. 욘더라는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한 기억 속에 취해 살자는 말은, 현재가 정말 견딜 수 없이 괴로운 재현의 입장에선 정말 매력적인 제안이기는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현실 속 우리의 입장에서는 ‘죽음’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그런 시선이 합당한 것일까요. 우리는 욘더로 향하는 재현을 말려야 하는 것일까요. 말린다면 그건 재현의 고통을 지속시키게 되는 것일 텐데요. 다 떠나서 말릴 권리 자체가 있는 것일까요. 심지어 <욘더> 속 세상은 안락사마저 합법화가 된 시대인데요.


<욘더>는 후반부 재현의 어떤 선택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것이 어떤 선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적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욘더>라는 이야기 속에서는 중요하지만, 거대한 질문의 답을 내리는 결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재현의 선택과 상관없이, 욘더는 그곳에 남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욘더가 남은 채,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은(혹은 잃을) 수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이후를 떠나보낸(혹은 떠나보낼) 재현들이, 계속해서 욘더의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제안을 받은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 드라마를 2022년 10월 30일 이후에 보았습니다. 이전에 보았더라면 저는 지금 당장 현생을 떠나 욘더로 향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뜯어말렸을 것입니다. 그거 다 가짜라고. 제발 정신 차리라고. 이별은 누구나 하는 거라고. 우리라도 살아야 하지 않냐고. 그런데 이후에 이후를 본 저는 정말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욘더가 진짜로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정신이 아득해졌고.. 그렇게 벌써 일주일이 지나버렸습니다.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