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라는 ‘지옥’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이 공전의 인기를 구가하는 중이다. 지옥에 열광하는 세태를 보며 생각이 깊어진다. 세계적인 인기몰이를 하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기 때문이다. ‘지옥’이 그리고 있는 세상과 세상이 그려내는 종교의 모습에 공감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시대착오적인 스토리에 이토록 찬사가 쏟아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 이 시대에 ‘지옥’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정말 지옥이 무서워 신(神)의 뜻을 찾고 그의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이가 있기나 할까? 백번 양보해서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괴물이나 저승사자가 직접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몰라도, 이 시대에 지옥을 무기삼아 공포를 조장한다고 두려움에 싸여 종교를 신봉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싶다. 그럼에도 실체를 알 수 없는 우주적 공포가 우리 안에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시대의 공포는 분명히 다른 모습으로 잠재해 있다. 그토록 오랜 역사에서 종교가 조장하고,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난무하는 세계에서, 지금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가난일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생존하기 위해 끝 모를 길을 질주하면서도, 언제든 패배하여 사회의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 두려움과 공포 앞에 군림하고 있는 신(神), 그는 다름 아닌 ‘소유’이며, 그를 섬기는 종교는 ‘소유를 위한 권리의 자유’이다. 지금의 종교는 사유재산의 신성함을 신봉한다. 그런 믿음 아래에서 인간이 누려야 할 자유는 사유재산을 축적하고 수호하는데서 빛을 발한다. 사유재산이라는 하늘이 내려준 신성한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믿음에 위배되는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의 종교가 이야기하는 정의 사회의 모습이다. 이야기가 길었다. 얼마 전 우리 사회 한 구석에서 “어린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았다”라는 이유로 감금을 당하고 쫓겨났다. 죄목은 너무나 거창하게도 사유재산 침범이다. 그 자그마한, 아무것도 아닌, 그래서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사건을 가지고 웬 호들갑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한번 잘 살펴보시라. 어느 한구석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공동체의 붕괴가 어쩌구 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놓은 세상의 모습이다. 세상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우리가 만들어 놓은 지옥이다. 천편일률적으로 쌓아 올린 가장 비인간적 건물을 철옹성 삼아 부를 증식하고, 이 공간을 수호하고자 이전투구하며 담합하고, 그리고 놀이터에서 동네 아이가 놀았다는 이유로 ‘주거침입, 사유재산권 침해’를 죄목으로 쫓아냈다. 아파트 앞에 선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알량한 사유재산을 지키고자 아귀다툼하는 모습을 보며 흡사 넷플릭스의 지옥을 보는 줄 알았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쫓겨났다.” 우리 안에 있는 우주적 공포와 두려움이 스미듯 차오른다. 늘 그렇듯 우리의 의도를 정확히 실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허나 독자들께서 판단해 주시리라 믿는다. <사건과 신학 편집팀>
나와 그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 / 이혜영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걸까? 우리는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갑질과
차별에 분노하지만 ‘나와 그들’로 경계와 구분을 짓는 것
역시 그와 같은 갑질과 차별의 일종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 더 걱정되는 문제는 이러한 어른들의
삐뚤어진 관점과 편견을 아이들이 그대로 답습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결과 중심의 성적표의 숫자가 중요하고, 타인보다 더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이 중요하고, 더 좋은 아파트에
사는 것이 성공의 척도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아이들은 과연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 경험할 수 있을까? [더 보기] 아파트를 넘어서는 신앙 / 황푸하 대학 강단에서 은퇴한 어느 교수님에게 그림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쉬는 시간에 그 교수님과 아파트 베란다에서 경치를 구경하고 있었다. 경치라고 할 것도 없이 다른 아파트 동들을 보고 있었다. “자네, 저기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겠나?” 내가 말했다. “아니요. 회색 아파트들뿐인걸요.”, “아닐세. 저 회색 아파트에도 햇빛이 반사되어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주님께서 주시는 빛으로 모든 것 안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네.” 그 말을 듣고 침묵 속에서 한참을 생각했다. 아니올시다. 아무리 아름다운 천상의 그림이 걸릴지라도 단순히 저 아파트들은 투기 자본의 산물, 산과 하늘을 가리는 오만한 바벨탑일 뿐이다. [더 보기]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 / 박흥순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사는 ‘곳’이 사고파는 ‘것’이 된 세상에서 ‘공존’이나 ‘상생’이란 말을 외친들 무슨 영향이 있을지 회의가 든다.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고 외치는 사람들 목소리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귀를 기울이고, 반성하고 성찰할지 마음이 우울하다. 하나님을 믿고 성서 말씀을 따르는 기독교인과 다음 말씀을 주목해서 함께 나눈다. -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레위기서 25:23). [더 보기] 소유가 아닌 존재의 의미 / 김한나 우리의 정체성을 소유가 아닌 존재 그 자체에 둘 때 타인을 향한 시선과 태도는 변화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뜻에 기인한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존재만으로도 고귀하고 아름답다. 비록, 우리의 마음이 죄로 인해 어두워졌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를 덮기에 충분하다. 인간의 삶 속에서 영원하신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은 그 어떠한 물질적 소유를 능가한다. 우리 존재의 가치를 하느님께 두는 삶, 교회가 그러한 삶의 본보기를 통해 참된 윤리를 전한다면 소유가 중심이 되는 세상에 빛을 비출 것이다. 더불어, 이웃의 갈등과 다툼에 무관심하지 않고 교회가 평화의 도구가 되어 윤리적 중재의 역할의 회복하는 것도 중요하다. [더 보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사건과신학 www.kncc.or.kr / nccktheology2019.tistory.com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기독교회관 706호 T. 02-744-3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