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을 찾아-미세먼지 해외견문록](3)가난할수록 나쁜 공기 마셔…‘약한 고리’에 더 큰 관심 기울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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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10.09. 오후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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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5일 오후 미국 로스앤젤레스 남쪽의 작은 마을 윌밍턴에서 바라본 항구의 모습. 미 서부 최대 무역항인 롱비치와 인접해 있어 해안선이 컨테이너선과 크레인 등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항구와 내륙을 잇는 도로를 차량들이 지나고 있다.


“환경정의(Environmental Justice). 가장 큰 걱정거리예요.” ‘요즘 가장 우려하는 문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전 캘리포니아 남부연안대기질관리국(SCAQMD) 국장인 배리 월러스턴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환경정의는 “소수인종과 저소득층 주민들을 개발로 인해 야기되는 부정적 영향으로부터 보호하는 개념”이다. 주정부는 다른 계층보다 수질·대기오염 등으로 더 많은 피해를 입는 지역을 ‘환경정의(EJ) 커뮤니티’로 지정해 집중 관리하고 있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공장은 부와 번영의 상징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돈이 많으면 절대로 공장 바로 근처에 살지 않죠.”

공장·항만시설 등 오염원 근처엔

대부분 주민이 소수인종·저소득층

흑인, 미세먼지에 더 많이 노출돼

심혈관 질환·사망 위험 45% 높아

취약계층 보호에 정책 초점 맞춰야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남쪽 롱비치 지역에 자리 잡은 작은 동네 윌밍턴. 서울 서초구 정도 넓이에 인구 5만명이 모여 사는 이 작은 마을은 주정부가 주시하는 여러 EJ 커뮤니티 가운데 하나다. 대부분 주민은 멕시코, 과테말라 출신의 유색인종이며, 2000년 기준 성인 100명 중 5명만 4년제 대학을 나왔을 정도로 교육 수준은 열악하다.

지난 5일 오후, 차에서 내리자마자 얼굴과 눈이 따끔거렸다. 낮은 주택이 늘어선 거리에는 드물게 차가 지나다닐 뿐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남쪽 항만 쪽으로 다가가니 풍경이 갑자기 달라졌다. 컨테이너선과 크레인, 창고 등으로 가득 채워져 수평선이 보이지 않았다. 항구에 면한 작은 공원에서는 어린이들이 그네를 타고 있었고 엄마들은 곁에서 담소를 나눴다. 뒤편에 솟은 정유공장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윌밍턴은 온갖 오염원으로 둘러싸인 섬 같은 곳이다. LA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들어오는 수입물품의 입구다. 수많은 컨테이너선이 드나드는 항구 바로 옆에 윌밍턴이 자리 잡고 있다. 선박에 쓰이는 벙커C유는 황 함유량이 가솔린·디젤에 비해 훨씬 더 높다. 컨테이너선 1척이 트럭 50만대분의 배출가스를 내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윌밍턴의 양옆으로는 LA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소위 ‘주차장 같은’ 110번, 710번 고속도로가 있다. 항만에서 상품을 가득 실은 대형 트럭들은 일반 승용차보다 더 많은 질소산화물을 뿜어내며 이 도로를 달린다. 인근 정유시설에서 발생하는 배출가스도 상당하다.

‘환경정의 커뮤니티’ 지정했지만

공기질 일일이 들여다보긴 힘들어

시민 참여로 대기 측정 센서 설치

미세먼지 농도 갑자기 치솟으면

소셜미디어 올리거나 직접 알람


정부기관이 이런 EJ 커뮤니티의 공기질을 일일이 들여다보는 것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그래서 시민들의 참여가 중요하다. 배리 월러스턴은 “캘리포니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 환경기관의 화두는 가성비 높은 공기질 측정장비를 공급하는 것”이라며 “관측 장비의 소형화로 이런 일이 쉬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6일 시민단체 청정대기연합(CCA)의 조지프 류 대표가 캘리포니아 대기오염과 관련한 시민운동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위). 이곳에서 보급하는 소형 공기측정센서를 관계자가 들어보이고 있다(아래).


캘리포니아의 환경단체 중 가장 큰 청정대기연합(Coalition for Clean Air·CCA)은 ‘시민 참여’를 적극 실천하고 있는 곳이다. 독자적인 대기질 모니터링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6일 방문한 CCA 사무실 한쪽에서는 활동가가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주 전역에 설치된 대기 측정 센서들이 각각 초록색 혹은 노란색 점으로 표시돼 있었다.

“간단해요. 우리가 보내준 이 센서를 벽에 붙인 다음 와이파이에 연결하면 돼요. 그러면 네트워크에 등록되는 거죠.” CCA 대표 조지프 류가 말했다. 이곳에서 감시 중인 센서는 캘리포니아 전역에 걸쳐 140개, 모두 현지 주민이 자발적으로 설치한 것들이다. 주정부가 설치한 측정 기기가 272개인 것과 비교하면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주로 학교나 병원 등 어린이·노약자가 모여있는 장소에 설치돼 초미세먼지나 오존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지 않는지 감시한다.

측정 기기는 밥공기 정도로 작았다. ‘이것으로 정확한 측정을 할 수 있나’라는 물음에 “들어간 센서는 정부기관에서 쓰는 것과 똑같다”고 했다. 그는 “실제로 이 작은 기계로 정부기관도 감지하지 못한 정유공장 배출가스의 급격한 증량을 잡아낸 적이 있다”며 “최근 캘리포니아는 산불로 홍역을 치렀다. 화재로 인해 미세먼지(PM) 농도가 치솟는 경우 소셜미디어에 올리거나 사람들에게 직접 알람을 보내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건강한 일반인이라면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이들이 우려하는 것은 취약계층의 건강이다. 류는 “천식이나 폐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정보”라고 덧붙였다.

신체적으로 약한 집단뿐만 아니라 경제적 취약계층의 건강도 고려해야 한다. 경제적 취약계층이 환경오염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새 화력발전소를 유치하려 할 때, 부유한 지역 주민들은 교육 수준이 높고 정보량도 많기 때문에 훨씬 발빠르게 반대 여론을 규합할 수 있죠. 돈을 모아 실력있는 변호사를 고용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소득·유색인종 커뮤니티는 정보에 어둡거나 법률비용에 대한 부담 때문에 대응하기 훨씬 어렵습니다.”

캘리포니아 환경건강유해성평가국(OEHHA)이 발간한 올해 EJ 커뮤니티 지도를 보면, 윌밍턴 같은 EJ 커뮤니티의 위험도는 ‘빨간불’이다. 반면 윌밍턴에서 고작 10㎞도 떨어지지 않은 팔로스 베르데스는 아름다운 해변이 펼쳐진 부자 동네로, 대저택이 늘어선 부촌 베벌리힐스와 함께 환경 위험도는 초록색(좋음)으로 표시돼 있다. 흑인이 백인에 비해 평균적으로 더 많은 미세먼지에 노출돼 심혈관 질환과 사망 위험이 45% 더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유색인종이 백인에 비해 고속도로처럼 오염이 심한 시설 가까이 사는 경우가 많으며, 이것이 미세먼지에 노출돼 심혈관 질환과 사망의 위험을 더 높이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설명이다.

배리 월러스턴은 가장 ‘약한 고리’에 관심을 기울이라는 조언을 덧붙였다. “건강한 보통 사람을 보호할 것인지, 어린이·노약자·저소득층을 보호할 것인지는 정책 결정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했다. 어느 그룹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규제의 강도와 범위는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끔 손녀를 데리고 축구장에 가면 (천식 때문에) 흡입기를 쓰는 아이들을 보곤 하죠. 저희 어머니도 폐기종이 있으셔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합니다. 이런 사람들까지 모두 걱정 없이 숨 쉴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 특별취재팀

김기범·임아영(산업부), 배문규(정책사회부), 김상범(뉴콘텐츠팀), 최미랑(모바일팀)

■ 취재 지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로스앤젤레스(미국) | 글·사진 김상범 기자 ksb123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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