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레즈비언 모임을 찾아가 보았다> 제작 노트

PD NOTE
닷페피플 님, 반가워요! 
닷페피플에게만 살짝 보내드리는 제작 노트. 닷페이스 소현 PD의 <70대 레즈비언 모임을 찾아가 보았다> 콘텐츠의 제작 노트를 공개합니다. 

#1 기획의 시작
"서울 명동에만 있진 않았을텐데... 
다른 지역에도 레즈비언들이 자주 찾던 공간들이 있지 않았을까?"

올해 여름, 70년대 한국 레즈비언의 역사를 '명동'을 중심으로 풀어보는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영상에 반응해주셔서 내심 놀라고 기뻤고, 일종의 '확장판'을 기획 하게 되었습니다. 

#2 사전 탐색
처음에 생각한 제목은 '전국의 그때 그시절 레즈비언을 찾아서'였습니다. 과정이 쉽진 않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만약 기록에 실패한다면 그 실패의 과정까지 담자.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가 또 있겠지' 하는 호기로운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로드 다큐의 형식을 빌리면 이 방향과도 잘 맞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호기로운 마음도 잠시. 예상보다 더 막막했어요. 제작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고, 제보 설문에 대한 응답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의욕만 앞서 어려운 기획을 그냥 질러버린 건 아닌가'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사무실 구석에서 시들시들 말라가고 있을 무렵, 레즈비언 커뮤니티 역사를 조명하는 <레즈비언!>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작정 전시장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무실에 처박혀 머리 싸매고 있는 걸 멈추고, 일단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니 길이 보이더라고요. 

전시를 보고, 전시를 준비한 기획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꾸준히 레즈비언 커뮤니티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구나. 어쩌면 그 세대 레즈비언의 목소리만큼이나 한국 레즈비언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중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저는 기존 기획에서 한 가지를 버리고 한 가지를 추가하게 되었습니다.

🙅‍♀️ 그 세대 레즈비언을 추적하거나 단순히 드러내는 일 X. 로드다큐 형식도 버리자. 
🙆‍♀️ 그 세대 레즈비언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게 되면, '찾았다!'는 식으로 내놓지 말고, 역사와 기록의 맥락 안에서 설명을 해보자. 기록하는 사람들도 함께 담아보자. 


버려야할 것들을 정했고, 기획 방향을 수정했습니다. 생각이 조금씩 명료해졌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러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얼마 지나지 않아 윤김명우 선생님에게 조만간 60~70대 레즈비언 모임이 있을 거란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소현 PD가 밑줄 그은 자료 
"동성애자가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한들, 그 시절에도 동성애자는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 어떤 동성애자들은 그것들을 용케 “사뿐히" 뛰어넘고 살았을 수도 있고,  어떤 동성애자들은 그런 보이지 않는 처지를 역이용하며 살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 어쨌든 섹슈얼리티는 결국 사적인 것이기도 하겠기에, 그 시절 굳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동성애자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여 그 시절 ‘보이지 말아야’ 했던, 그리고 스스로도 기억되길 바라지 않았을 일군의 동성애자들을 여기서 굳이 까발려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런 방식의 삶을 택했던 그들을 존중합니다. 그들에게는 잊혀질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두에 암시했듯이, 우리는 아마도 당시 동성애자들의 전모를 끝내 알 수 없을지 모릅니다. 본래 기억된 역사는, 그렇게 기억되고 싶지 않았던 영혼들의 자욱한 침묵의 공동 위에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 [칼럼] 시간 사이의 터울: 5-60년대 언론에 소개된 동성애, 친구사이, 2015년 3월 소식지 (링크)
그리고 생각에 도움을 받은 감사한 자료들 
📌 너는 왜 레즈비언이니, 박김수진 (2014) (링크) 
📌 여섯빛깔 무지개, 임근준 (2015) (링크)
📌퀴어와 공간의 관계 재구성, 배성민,정희성, 2018 (링크)
📌불완전한 몸의 질곡을 넘어 : 50대 레즈비언 생애 이야기, 성정숙 (2012) (링크)
#3 제작
제작을 하면서 가장 고민이 되었던 지점은 화면이었습니다. '얼굴을 촬영하지 않은 인터뷰로 어떻게 화면을 구성해야 할까?'  

대전에서 살고 계시는 명수(가명) 선생님을 포함한 네 분의 선생님들은 이야기는 들려줄 수 있지만, 얼굴이 나오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거든요. 

그 시절 보이지 말아야했던, 하지만 분명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이 분들을 '벤치'라는 장치로 표현해보면 어떨까 싶었죠. 그래서 비어있는 벤치들을 먼저 보여준 뒤 그 벤치가 서서히 인터뷰이들로 채워지는 화면으로 오프닝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영상들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4 제작 회고
닷페이스에서 영상을 만들다보면 필연적으로 내 안의 편견도 하나씩 부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영상을 하나 완성하고 나면, 제가 바라보는 세상도 함께 재편된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게 저의 일하는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이번 영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고민과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쉬움이 더 많이 남는 것일지도요. 언니네트워크 활동가분이 지적하신 것처럼, 저도 모르게 갖고 있었던 '노년의 레즈비언'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은 제 고민과 질문을 여러분과 공유하는 구성이기도 했습니다. 영상 두 편의 첫 챕터가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 덧붙이는 소식
얼마 전, 윤김명우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뭐해? 쉬고 있어? 나 12월 중순에 가게 새로 오픈해. 다시 한번 해보려고. 공사 때문에 요즘 정신이 없어. (웃음) 오픈하면 놀러 와'  
가게 공사 때문에 정신 없고 바쁘다고 툴툴대셨지만, 목소리는 밝았습니다. 12월 중순, 이태원에서 '레스보스'바가 다시 열립니다. 

박소현, 닷페이스 PD
"사람과 공간, 시간과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so@dotface.kr
닷페피플에게만 공개하는 PD 노트, 이번에 새로운 형식을 시도해봤어요! 님의 마음에 드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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