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게 금기를 넘는 법
지금을 읽고 싶은 사람들의 미디어 이야기, 어거스트
안녕하세요, 오늘의 에디터 Friday입니다.

새해가 금세 열흘 넘게 지나갔습니다. 사실 저는 작년과 똑같이 삽니다. 12월 31일도, 1월 12일도 다를 것 없이 똑같은 인간입니다. 하지만 아직 달라질거란 희망은 잃지 않았습니다. 1월 안에만 다른 사람이 되면 되지 않겠어요? 저만의 새해는 2월 1일로 유예되었고, 새해엔 다짐했던대로 착한 척, 다 아는 척, 하나도 모르는 척 그만하는 인간이 되겠습니다.


오늘은 영화 <본즈 앤 올>과 금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니다. 내용 누설이 있는 점 먼저 말씀드립니다.

👋 오늘의 에디터 : Friday
다시 태어나면 티모시 샬라메의 고양이가 되고 싶어요
오늘의 이야기
1.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2. 날 사랑한다면, 뼈까지 먹어줘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출처: 출판사 쓰다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1992년 발간된 소설입니다. 주인공 강민주는 여성 문제 상담소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합니다. 그 곳에서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한탄을 들으며 남자를 증오합니다. 그러다 계획을 세웁니다. 당대 최고 인기 스타인 백승하를 납치해 그의 추악한 실태를 폭로하고, 그에게 갖고 있는 여성들의 환상을 깨뜨려 아직도 남자에 기대하는 여성들과 세상에 메세지를 던지려고 합니다. 강민주는 부하처럼 부리던 황남기의 도움으로 백승하를 납치하는 데 성공합니다. 백승하는 방에 가둬진 채 정해진 시각에 식사만 할 수 있을 뿐 자유를 완전 박탈당합니다. 강민주는 뒤틀린 신념으로 납치, 감금, 폭행, 협박까지 위험한 범죄를 저지르죠.

그럼에도 이 소설은 눈을 뗄 수 없이 흥미롭고, 주인공 강민주는 엄청나게 매력적입니다. 잘못한 것 하나 없는 사람을 납치하고 폭행하고 감금하는데 왜 들키지 않기를 바라게 될까요? 세상에 대한 그의 분노가 이해되어서? 지금보다 더 여성인권에 깜깜했던 90년대에 횃불을 들어서?

아닙니다. 금기가 아름다워지는 데 필요한 조건을 충족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하지 않은 말, 아무나 할 수 없는 말, 나는 그런 미지의 언어를 원한다.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이 세상에 새로움이란 없다’는 식의 단언이다. 나는 낡은 생각, 낡은 언어, 낡은 사랑을 혐오한다. 나의 출발점은 그 낡음을 뒤집은 자리에 있다. 장애물이 나와도 나는 그것을 뒤집어 버린다. 세상은 나의 운동장이다. 절대 그늘에 앉아 시간이나 갉아먹으며 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다.

강민주는 백승하를 납치해 그의 기만과 부패를 폭로하려 했으나 웬걸, 백승하는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로, 한 없이 부드러운 남자입니다. 그는 자신을 납치했음에도 강민주의 도도함과 강직함, 그리고 어딘가 애잔함을 느꼈습니다. 강민주 역시 백승하가 그토록 비열하길 바랬지만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되죠.


처단해야 할 상대를 사랑하게 된 것도 극적이지만, 책의 한 챕터를 시작할 때마다 등장하는 강민주의 노트는 강렬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지나칠만큼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서 반박조차 허용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극중에서 그녀를 흠모하고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있는 걸 보면 외적으로도 매력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지성과 외모, 그리고 엄청난 일을 도모할 정도로 부를 가진 여자와 세간의 마음을 훔치던 톱스타 남자의 매력은 시각적으로도 흥미롭습니다. 책인데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죠.


백승하는 강민주에게 갇혀있지만 연기 연습을 하고 싶다고 부탁하고 둘은 연극 연습을 하면서 더욱 가까워집니다. 그러다 클라이막스, 낌새를 챈 경찰이 포위망을 조여오는 긴장감 넘치는 와중에, 연극 연습을 하던 강민주는 그를 사랑한 부하 황남기가 쏜 총알을 맞고 죽음에 이릅니다. 시작도, 끝도 불행으로 끝나버린 이야기. 더 이상 독자들은 강민주의 정당성이라든가 윤리, 도덕 같은 것은 신경쓰지 않게 됩니다.


매력적인 여자가 삐뚤어진 신념으로 잘생긴 남자를 납치했다, 그 차갑디 차갑던 마음은 온기에 녹아 사랑에 빠져버렸고, 결국 죽음으로 영원히 존재하게 되었다… 영화나 드라마, 책 등 예술작품에서 금기를 다루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나 괴이하고 실험적이라는 평보다 아름다운 공감을 이끌어내려면 앞서 언급한 조건을 충족하면 됩니다. 결국엔 사랑일 것, 시각적으로 황홀할 것, 그리고 시작도 끝도 불행할 것.

🚙 날 사랑한다면, 뼈까지 먹어줘

출처: MGM/WB

<아이 엠 러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등으로 유명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신작 <본즈 앤 올>은 카미유 드 안젤리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식인종들의 사랑을 그린 영화입니다. 설정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사람을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쉽게 추천할 영화는 아닙니다. 영화 제목은 Bones and all, 말 그대로 뼈까지 씹어먹는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이 말은 ‘사랑’을 말할 때 쓰입니다. 날 모조리 먹어달라고, 사랑하는 이가 간청하는 영화입니다.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주인공 10대 소녀 매런(테일러 러셀)은 친구들과 파자마 파티를 하다 한 친구의 손가락을 먹어버립니다. 자신에 놀라 헐레벌떡 집으로 도망치고, 아빠는 옷에 묻은 피를 보고 짐작했다는듯이 옷가지만 챙겨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자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 아빠도 매런을 떠나버립니다. 지금까지 식인종 딸을 키우는게 어땠는지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 하나와 함께요.


혼자가 된 매런은 엄마를 만나러 길을 떠납니다. 그 길 위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 설리반은 멀리서부터 매런의 냄새를 맡고 왔다고, 동족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자신의 집에 초대하죠.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터(eater)는 서로를 냄새로 알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죽어가는 인간의 냄새도 맡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고, 지금까지 먹었던 인간의 머리카락을 보관하는 등 어딘가 섬뜩한 모습에 매런은 도망칩니다.

출처: MGM/WB

다른 길에서 만난 리(티모시 샬라메) 역시 식인종입니다. 그는 죽어가는 것만 먹는다는 설리와는 다르게 살인까지 합니다. 리와 매런은 훔친 트럭을 타고 매런의 엄마를 찾아 떠나고, 그 로드 트립 중에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집니다. 결국 정신병원에서 만난 엄마는 스스로 먹어 두 팔까지 없고 제 정신이 아닌 상태입니다. 그리고 편지를 통해 매런에게 경고합니다.

사랑하는 내 딸,
너의 아빠는 내가 널 임신했을때 내 정체를 알았다.
사랑의 세계에 우리 같은 괴물들은 있을 수 없어.
내가 너의 그 괴로움을 끝내줄게.
딸의 괴로움을 끝내주기 위해 엄마는 매런을 잡아먹으려 하고, 매런은 엄마에게서도, 리에서도 도망칩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나 평범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는 리와 매런. 하지만 광기어린 집착으로 매런은 쫓아 온 설리에 의해 리는 칼에 폐부를 찔리고, 울부짖는 매런에게 죽어가면서 말합니다.
날 사랑해줘… 날 먹어줘. 뼈와 내 모든 걸…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선혈이 낭자하고 살점이 뜯기는 장면이 여과 없이 전해지는 ‘멜로 영화’입니다. ‘식인’은 금기 중에서도 금기로 여겨져 왔습니다. 범죄 중에서도 최악이 아닐까요. 그런 식인종들의 사랑, 이해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
출처: Sony Pictures Classics/Photofest (The Journal)
많은 이의 동의와는 상관없이, <본즈 앤 올>은 놀랍게도 몹시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카니발리즘을 다룬 영화가 아름답다는 사실이 너무 당혹스러워서, 저는 어떤 '이해'가 선행되어야 예술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를 고민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사랑'이었습니다. 결국 사랑을 다룬다면, 용서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혼자였고 외로웠던 매런, 아버지의 학대와 폭력에 시달렸던 리가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결국 정말 '하나'가 된다는 이야기는 분명 절절한 사랑 이야기였습니다.

범죄의 경중으로만 따지면 학대와 폭력은 상처고, 먹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존이라는 전개가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영화를 끝까지 보다보면, 이 그로테스크한 행위는 하나의 은유법일뿐 감독은 완전한 '합일(合一)'을 말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뼈까지, 남김없이, 모조리 먹는다는 것은 서로 앞에 한 치의 거짓도, 오해도 없이 온전히 너를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죠. 감독이 전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부르며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는 사랑을 그렸던 것을 생각하면 확고해집니다.
출처: 티모시 샬라메 인스타그램 @tchalamet
시각적으로도 황홀합니다. 1980년대 미국 중서부의 광활한 풍경과 이를 가로지르는 트럭 위의 두 청춘이 아름답습니다. 순수하기도, 담대하기도 한 매런이 스스로의 욕망을 알아차리는 장면은 반짝거립니다. 리 역할을 맡은 티모시 샬라메는 깊은 눈으로 매런을 바라보다, 기어들어가는 "나 배고파" 한 마디에 바로 먹잇감을 사냥하는 우직한 보호자입니다. 감미로운 OST를 배경으로 한 두 사람의 키스신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하는 '죽음'이 있습니다. 카니발리즘을 다루는 보통의 영화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주로 조명합니다. 사이코패스가 범죄를 저지르고, 한번 더 그 스릴을 즐기려는 의도로 보이게 하죠.


하지만 <본즈 앤 올>은 이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 '취향' 더 나아가 '생존'의 문제와 결부시킵니다. 리와 매런은 자신의 존재 자체에 죄책감과 혐오를 느끼고 스스로를 고립시켜왔습니다. 욕망을 억제하고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그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불행했고, 결국엔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관객들은 그들의 존재 가치에 대한 혼란스러운 평가를 멈추고 숭고한 사랑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잔인하게도, 그들이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은 관객으로 하여금 안도감을 느끼게 합니다. 공감하고 응원하면서 마음 한 켠에 두고 있었던 찜찜함을 날려주는 요소가 됩니다. 거기에 더해, 지금까지 이해받지 못했던 나의 삶과 한없이 외로웠던 존재가 위로받는다는 느낌을 주죠. 금기가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출처: MGM/W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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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도면에서 최대의 사랑 Our Love  I  김오키

에디터 <Friday>의 코멘트
이번 레터를 쓰면서 사랑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사랑은 대체 뭘까... 해본 적 있나... 느낌으로는 희생, 구원 이런 것들이 떠오르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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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ed by  Zoe • 한새벽 • 구현모 • 후니 • 찬비 • 구운김 • 식스틴 • Fri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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