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 풀어봤's UP/ 국제개발과 표준(1): 국제개발협력에 관심이 있다면 꼭 알아야 할 표준 이야기
  
• NGO는 아니지만 국제개발협력합니다/ 3화: 머쉬앤 정지현
• 국제개발협력 ON-AIR 
• 나의 문화 답사기/ [다큐] 카우스피라시

오늘은 5월 20일 세계 측정의 날(World Metrology Day)를 앞두고,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많은 분들에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표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표준, 과학기술과 일상생활의 '공공 기준’

먼저 이 글에서 말하는 표준은 언어, 전통, 관습 등의 인문사회적 표준이 아니라 과학기술계 표준임을 밝힙니다. 과학기술계 표준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정확성, 합리성 및 국제성을 높이기 위하여 사용하는 과학적·기술적인 공공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 국가표준기본법)

표준은 주로 길이, 질량, 시간 등과 같은 국제단위계와 표준물질 등에 해당하는 측정표준(measurement standards)과, 이를 사회 각 분야에 적용하기 위해 문서화한 기준, 규격 및 지침에 해당하는 성문표준(documentary standards)으로 나뉘는데요. 측정표준은 과학기술 연구의 영역, 성문표준은 행정과 산업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울 거예요. 수강신청이나 티켓팅 등을 위해 다운받아 사용하는 한국표준시 동기화 프로그램(UTCk)이 시간에 대한 측정표준의 산물이라면,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KS(한국산업표준) 등의 인증과 A4용지, 220V 등의 규격은 성문표준의 예시라고 할 수 있죠.

국제 무역의 진짜 공용어, 표준

이러한 표준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국제무역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19세기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식민지 개척과 국제무역이 활발해지면서 통일된 단위체계를 사용하는 것이 무역에 유리하다는 인식이 퍼졌는데요. 이를 바탕으로 1875년 5월 20일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17개국이 길이의 단위로 미터법을 따르기로 합의하면서 미터협약(Metre Convention)을 체결하고, 측정표준 국제기구인 국제도량형국(BIPM)을 설립했습니다. 길이의 미터(m) 외에도 질량의 킬로그램(kg), 시간의 초(s) 등 기본 물리 단위들을 종합해 국제단위계(International System of Units)를 만든 것이 국제 측정표준의 시작이 되었고, 미터협약을 체결했던 5월 20일을 세계 측정의 날로 기념하게 됐습니다. 미터협약의 회원국은 2022년 현재 100개국 이상에 달합니다. (정회원 63개국, 준회원 38개국)

한편 성문표준의 개발·보급을 담당하는 기구인 국제표준화기구(ISO)는 1947년 탄생했는데요. 2차 대전 후 경제 재건을 위해 국가 간 교류·협력의 공용어 역할을 할 국제표준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영국 런던에서 25개국 대표가 모인 것이 그 시작이었지만 2022년 현재는 167개국이 ISO 회원국이 됐습니다

2022년 세계 측정의 날 포스터

(출처: BIPM)

산업경쟁력의 발판이 되는 국가표준체계

그렇다면 표준은 구체적으로 무역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요? A국가가 1 kg짜리 제품을 만들어서 수출한다고 가정해봅시다. A국가의 수출품이 정확히 1 kg이라는 것을 다른 국가들도 신뢰하고 상호 인정할 수 있어야겠죠. 그러기 위해서 A국가는 kg에 대한 국가표준, 즉 기준으로 삼을 정확한 1 kg을 국제표준과 동등한 수준으로 측정하고 구현할 수 있는 기술적 역량을 갖춰야 합니다. 또한 공장에서 균일하게 1 kg의 제품을 대량생산하려면 문서화된 표준 규정 및 절차에 따라 제품을 생산하고 품질을 관리해야 하고요. 생산된 제품과 공정이 거기에 부합했는지 시험, 검사 등도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영역을 통틀어 국가표준체계(National Standards System) 혹은 국가품질인프라(National Quality Infrastructure)라고 부릅니다. 세계무역기구(WTO)는 국가별 표준제도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무역 장애요소를 무역기술장벽(Technical Barriers to Trade, TBT)으로 지칭하고, 각국의 표준을 국제표준에 조화시킴으로써 무역기술장벽을 해소하도록 조율하고 있습니다. 즉, 한 나라의 산업체가 제품의 생산, 유통에 사용한 국가표준이 국제표준과 동등함을 입증할 수 있어야 원활하게 무역에 참여할 수 있으므로, 국가표준체계의 발전수준이 곧 산업경쟁력과 직결되는 셈이죠. 

개도국 경제 성장의 필수조건, 표준 원조

국가표준체계 운영에 100여년 이상의 역사를 보유하고 있는 선진국들은 일찍부터 각종 국제표준을 자국에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경쟁에 참여해왔습니다. 반면 과학기술 및 거버넌스 수준, 다시 말해 국가표준체계의 발전수준이 낮은 개발도상국들은 국제무역에서 출발선부터 뒤처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는 개도국 기업이 수출을 위해 만든 제품이 길이, 무게 등의 기본적인 규격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를 그 예로 들 수 있는데요. 그 외에 수입국에서 요구하는 환경, 안전, 보건 등과 관련한 국제표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도 수출의 걸림돌이 됩니다. 

1995년 WTO 설립과 함께 체결된 무역기술장벽협정(Agreement on Technical Barriers to Trade)에도 이러한 문제의식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에 따라 협정서 내에 수출회원국 중 개도국에게는 수입회원국의 기술규정 요건에 적응할 시간을 허용하며, 개도국 내 특수한 기술적, 사회경제적 조건을 고려해 고유의 표준 채택을 인정하는 등 특별대우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도국 회원의 요청 시 기술원조 및 자문을 제공하되 특히 최빈국에게 우선권을 부여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래 그림과 같이 WTO에 따르면 무역기술장벽 통보 건수는 매 5년마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데요. 최빈국과 신흥국을 포함한 개도국 통보 건수의 가파른 증가가 그 원인입니다. 산업의 발전과 다변화, 그리고 소비자들의 요구로 계속해서 새로운 표준이 개발됨에 따라, 글로벌 시장에 참여하려는 개도국이 넘어야 할 산도 더 많아졌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개도국의 무역기술장벽 통보 추이

(출처: WTO)

이처럼 늘어나는 수요에 부응해, 표준분야 국제기구와 각국 표준기관들은 개도국 대상 협력활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국제도량형국(BIPM)에서는 개도국 표준기관의 역량을 키우고 선진 표준기관의 지식을 전수하기 위한 CBKT(Capacity Building & Knowledge Transfer)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며, 국제표준화기구(ISO) 역시 기술지원 및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개도국의 국가표준체계 강화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표준 원조 수원국에서 공여국이 되기까지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룩한 우리나라의 표준 역량은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요? 흔히 한국의 발전을 설명할 때 초고속 성장으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었다고 표현하는데요. 산업 발전 및 경제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표준 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한국전쟁 후 산업발전이 시급했던 한국의 상황에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국가표준체계를 갖추는 것이었습니다. 1960년대 한국을 방문한 미국 존슨대통령이 기증한 것이 다름 아닌 표준기였다는 사실은 표준 역량 강화가 개도국의 성장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를 계기로 미국 국제개발처(USAid)와 미 표준국, 아시아개발은행의 지원을 받아 1975년 우리나라의 측정표준 대표기관인 한국표준연구소(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이 설립됐고, 이후 미국, 독일 등의 선진 표준기관들의 인력양성 및 기술 지원에 힘입어 한국의 표준 역량은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표준 원조의 계기가 된 1966년 미국 존슨 대통령 방한

(출처: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미국 존슨 대통령이 한국에 기증한 질량, 길이 표준기

(출처: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한국이 수출을 발판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는 사실은, 명실상부한 표준강국으로 거듭났다는 증명이기도 합니다. 특허청에 따르면 한국은 2020년까지 3대 국제표준화기구(ISO, IEC, ITU)에 신고한 선언 표준특허가 3,344건으로 세계 1위를 차지했습니다. 표준특허는 LTE, 5G, WiFi, 블루투스 등과 같은 표준기술을 사용하는 제품을 생산, 판매하기 위해 반드시 사용해야만 하는 특허를 말합니다. 

한국의 표준분야 발전경험을 개도국에 전수하기 위한 사업도 1980년대에 시작돼 2010년대 들어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UNIDO(유엔공업개발기구)와 연계해 개도국의 관련 인력을 양성하는 초청연수사업이 꾸준히 실시되었고, 개도국에 우리나라의 국가표준체계 발전 경험을 전수하는 자문 프로그램도 지속적으로 시행 중입니다.

포스트 팬데믹 시대의 표준, 경쟁도 협력도 전보다 강화

전세계가 코로나19 팬데믹을 경험한 현재, 개도국들은 한층 더 치열해진 국제표준 경쟁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WTO에 따르면 지난해 무역기술장벽 건수는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는데요.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각국이 자국 산업 보호와 첨단산업 주도권 확보에 기술규제 등의 표준을 전략적 도구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1995-2021년 무역기술장벽(TBT) 통보 건수

(출처: WTO)

하지만 역설적으로, 각국이 산업경쟁력을 키우는 데에만 골몰했던 20세기와 달리, 21세기 들어 표준은 지속가능한 개발을 달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협력의 도구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산업이 한층 복잡해지고 다변화함에 따라 표준은 여전히,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경쟁의 무기로 쓰이고 있지만, 그 발전의 여파로 발생한 글로벌 위기 대응을 위해 표준 협력의 필요성도 더 커진 겁니다. 팬데믹, 기후위기, 에너지 등 어느 한 국가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전 지구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 간 과학기술협력은 더욱 절실해졌고, 산업활동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 새로운 산업표준을 만들어내고 보급할 필요가 생겨났습니다.

이 때문에 표준분야 국제기구들은 미래 변화에 대응하고 기후변화, 의료, 에너지, 안전 등 공통의 이슈를 해결하기 위한 표준 개발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한 WTO의 무역기술장벽위원회도 매 3년마다 무역기술장벽협정을 재검토하는데요. 직전 검토기간(2019-2021년)에 대한 보고서에는 팬데믹로부터 얻은 교훈, 기후변화, 환경, 사이버안전 등 전 지구적 과제에 대한 내용이 담겨, 향후로도 논의가 이어질 전망입니다.

2편에서는 지속가능한 개발에 표준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UN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와 연계해 살펴보겠습니다. 기대해주세요!

세 줄 요약

#1 산업과 사회 각 분야의 기준이 되는 “표준”은

국제무역의 공용어이자 국가 산업경쟁력의 발판이다.

#2 선진국에 비해 국가표준체계가 미흡한 개도국은

무역 경쟁에서 출발선부터 뒤처진 셈이므로

경제성장을 위해 표준 원조가 꼭 필요하다.

#3 산업의 초고속 발전과 글로벌 위기를

동시에 겪고 있는 21세기에 국가 간 표준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지만,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협력의 필요성도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