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에게 드리는
#06 여섯 번째 화요일 이야기 
(2020. 08. 25)
🍊
집주인에게서 온 전화
_이호성 편집자


어느 여름, 이사를 들어오고 나가는 시기가 맞지 않아 석 달 정도 머물 곳이 필요했다. 이삿짐을 보관해 두고 레지던스에 장기 투숙을 할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습하고 더운 날씨에 행여나 세간이 상할까 싶어 아예 다 풀어 놓고 살 수 있는 집을 알아보았다. 

마침 일산에 이십 평짜리 아파트가 단기 월세로 나와 있었다. 보증금 오백에 월세 오십. 보관 이사에 장기 투숙하는 비용보다 훨씬 저렴했다. 내가 집을 본 조건은 하나였다. 화장실과 싱크대만 수리가 되어 있으면 됐고,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집은 딱 그랬다. 도배지는 부풀어 오르고, 문짝도 아귀가 잘 맞지 않고, 장판은 여기저기 찍힌 데가 있었으나 화장실과 싱크대만큼은 깔끔했다. 일산에서도 다소 외곽이고 전철역도 멀었지만 석 달이라는 시간은 그 모든 단점을 감내하게 했다. 나는 입주하면서 보증금에 석 달치 월세까지 한꺼번에 보냈다.

계약 날 부동산에서 본 집주인은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중년 어른으로, 무던하거나 낙천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참 어린 내게 예의를 지키며 대해 주었다.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이삿날에 세탁기 설치를 하는데 밸브가 맞지 않아 그녀에게 연락할 일이 있었다. 그녀의 문자 메시지는 매번 이호성 님.”으로 정중하게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곧장 해결해 주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껄끄러울 수 있는 내용도 앞뒤에 인사말이나 고마움, 격려, 사과 같은 표현을 붙여 포장해 주었다

석 달을 보내고 퇴거하는 날 집주인은 지체 없이 보증금을 돌려주었다. 그렇게 그녀와 나의 계약은 매듭지어진 듯했다.  

한데 몇 주 뒤 그녀에게서 통화하고 싶다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 보증금 돌려받은 지 꽤 지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연락이었다. 전화를 걸자 그녀는 싱크대 상판에 손톱만한 녹 자국이 있다고 했다. 자기가 어떻게든 지워 보려고 했는데 사라지질 않는다고. 내가 나간 뒤 그녀가 입주하는 터였다. 그냥 있는 채로 지낼까 싶었지만 영 눈에 거슬린단다. 문제는 상판이 일부분만 수리하기가 어려워, 통째로 교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나는 그런 얼룩이 언제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말한 부분에 놓아둔 집기들을 살펴보니 스테인리스 통 하나가 바닥에 녹이 슬어 있었다. 딱 손톱만큼. 내 잘못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사과하고, 내 책임을 다하겠다고 했다. 다만 그녀도 나도 싱크대 상판 교체비가 얼마나 나올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지레 겁을 먹은 나는 경계하는 마음이 생겼다. 갑자기 큰돈을 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쩌나. 그녀는 일단 견적을 받아 보고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이 문제점만 공유한 통화를 끊으니 온갖 생각이 들었다

"
수리비가 얼마나 나올까.
부분 수리를 하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얼마까지 부담하는 게 적당한 걸까.

집주인하고 나눠 내는 게 맞는가 싶기도 하고, 보증금 받은지도 한참 되었는데 그냥 무시할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각자 얼마를 부담해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것도 불편했고, 모른척하는 건 도리가 아닌 듯했다. 입씨름하고 얼굴 붉히느니 그냥 얼마가 됐든 돈을 내고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겐 액수보다 체면이 더 중요했다. 

마침 새집 인테리어가 흡족하게 되어 그 업체에 견적을 내어 보았다. 사장님도 부분 수리는 어렵고 통으로 교체해야 한다며, 오십만 원을 이야기했다. 월세와 맞먹는 가격이었다. 집주인에게 전하니 그녀 또한 이곳저곳 알아본 결과 오십만 원가량으로 말하더라고 했다.

나는 내가 보내주겠다고 했다. 즉시 오던 그녀의 답장이 잠시 멈추었다. 얼마 후 그녀는 고맙다고 답장을 보냈다. 자신도 조금이나마 집을 손볼 요량인데 그때 혹시 수리비가 줄어드는 부분이 있으면 돌려주겠다고도 했다. 나 역시 고맙다고 답했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그녀와 이제 더는 연락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초겨울이 된 무렵, 그녀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이호성 님, 추운데 잘 지내시죠?”로 시작하는 문자 메시지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그녀가 아일랜드 식탁을 만들었는데, 그때 기사님이 서비스로 싱크대 상판 연마를 해 주어 녹 자국이 사라졌단다. 그래서 내가 보내 준 수리비를 돌려주겠다고 했다. 얼마 후 그녀 이름으로 오십만 원이 입금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늘 친절하게 말씀해 주시고, 잊지 않고 연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짤막한 시간이지만 좋은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건강하세요.” 돌려받은 건데도 공돈이 생긴 기분이었다. 

그녀는 이런 답장을 보냈다. “젊은 세대인 이호성 님 부부, 앞으로의 인생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사세요. 응원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덕담까지 주고받고 계약 관계를 비로소 매듭지었다. 

지금도 그녀의 번호는 ‘집주인’이라는 이름으로 연락처에 저장되어 있다. 볼 때마다 가장 어려운 관계에서 가장 불편할 수 있는 문제를 원만하게 풀었던 기억이 떠올라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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