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 저의 올해 최고의 영화는 <리코리쉬 피자>입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 영화 중 베스트라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왜냐면 그의 영화 중 가장 사적 욕심을 채운 영화라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가장 사적이고 가장 제멋대로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로 채운 영화를 저는 좋아합니다. 작년 개봉했던 영화 중 웨스 앤더슨 감독의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고도 이와 비슷한 감상을 느꼈었는데요. <프렌치 디스패치> 얘기가 나온 김에 제 사적인 얘기를 하나 얹고 싶네요. 저는 이번 주에 영화글 한 편을 마감하느라 바쁜 한 주를 보냈습니다. <프렌치 디스패치>에 관한 글을 썼는데요, 영화 잡지 ‘무비고어’ 3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조만간 제작될 예정이라고 하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급마무리)

[NO. 004]
사적 욕구를 채우는 영화
2022년 3월 26일

사적인 영화를 좋아한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이건 좀 공적인 사람들과 영화 얘기할 때 최고로 대립각이 세워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감독의 사적 욕구'를 채우는 영화를 싫어하는 분들이 꽤 많더라구요. 감독이 영화로 사적 욕구를 채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봅니다. 일종의 질투라고도 볼 수 있을까요..? 아무튼 전 <리코리쉬 피자>에 나오는 1973년 캘리포니아와 당시 유행한 음악들, 밴드 하임과 히피 정신 그 어느 것 하나 저의 관심 분야도 아니고 저와 공통점도(약간의 히피 maybe) 없지만, 계속해서 얻고자 하는 것을 향해 무한히 도전하는 주인공들을 보는 것이 저는 좋았습니다. 조금 풀어 말했지만 결국 이 영화의 주인공도 사적 욕구를 끝없이 채우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결국엔 다 자기 좋은 거 하면서 사는 거잖아요. 응원해줘도 모자라다고 생각하는데.. 질투의 감정이 생기는 것도 한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내 상황이 여유롭지 못하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상황만 탓하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실은 저도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 다른 사람 부러워하면서 보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좋은 영화 한 편 보고, 잠깐 동안은 나도 영화의 주인공처럼 살아야겠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요. 이번에 되고 싶은 주인공을 만난 영화는 <킹 리차드>입니다.


<킹 리차드>는 영화 제목처럼 리차드가 주인공인 영화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일반인이었던 리차드가 킹이 되는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킹이 된 방식이 독특합니다. 다름 아닌 자신의 딸 둘을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로 키워낸 것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요. 저는 잘 몰랐지만 역사상 최고의 여자 테니스 선수로 인정받는 세레나 윌리엄스(1981년생)와 비너스 윌리엄스(1980년생) 자매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아직 말씀드리지 않은 또 하나의 핵심 정보가 있는데, 이 영화는 블랙 무비입니다. 리차드는 가족 영화의 대가, 윌 스미스가 연기를 맡았는데요. 리차드가 애초에 ‘딸을 위대한 테니스 선수로 만들겠다’는 어마어마하고 황당한 계획을 세운 이유 자체가, 평범한 계획으로는 게토에서 시시각각 삶의 위협을 받으며 사는 흑인의 삶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리차드 가족이 살고 있던 LA 컴튼이라는 지역은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마약이 활발하게 거래되던 지역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총을 맞거나, 범죄자가 되거나, 약쟁이가 되거나’ 라는, 힙합 가사에 많이 쓰이는 표현이 실제로 펼쳐지는 곳입니다. 영화에도 그것이 일부 묘사되기도 하는데요. 그런 게토를 벗어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리차드의 모습은, 그 자체로 흑인의 삶이 얼마나 평등하지 못했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이 영화의 재미 포인트는 리차드의 그 집요한 ‘이렇게까지’를 구경하는 것입니다. 영화에는 리차드의 좌우명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You fail to plan, you plan to fail.” 계획 짜는 것에 실패한다면, 이는 곧 실패를 계획하는 것이다. 직역해서 조금 어색한데 어쨌든 그만큼 계획의 중요성을 뜻하는 표현인데요. 리차드의 그 철두철미한 계획과 실행력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리차드는 실제로 아이가 태어나기 2년 전부터 78페이지짜리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어릴 때 방학 계획표 짜는 것마저 부모님께 외주 맡겼던 저로선.. 앞서 말했듯이 참 ‘되고 싶은’ 주인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리차드가 문제적 인물인 것 또한 사실입니다. 마냥 ‘킹’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불편한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왜냐면 딸의 입장에서, 자신은 그저 아빠의 게토 탈출 계획을 위해 사용된 것뿐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들이 정말 실력이 좋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해피엔딩이 된 것이지, 만약 결과가 좋지 못했다면 아빠의 좋은 의도는 인정받지 못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영화에 나오는 딸들의 모습에선 그런 장면이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딸들을 비롯한 모든 가족은 아빠의 계획이 마치 자신의 계획인 것처럼 함께 움직입니다. 영화에 나오진 않았지만 아마 아빠와 엄마의 계획에 대한 충분한 설득과 대화의 과정이 없지는 않았을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물론 실제 당사자들 또한 이에 대해 큰 불만을 표현한 적은 없는 것처럼 보이고, 비너스&셀레나 윌리엄스 자매들은 실제 이 영화의 제작 과정에 적극 참여했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논쟁적인 것은 영화의 제목입니다. 위대한 테니스 선수를 두고, 선수 본인보다 선수를 키워낸 아빠의 손을 더 높이 들어주고 있는 제목이니까요. 선수 본인의 노력과 아빠의 노력 중 어떤 것이 더 큰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감독 레이날도 마르쿠스 그린은 아빠의 공이 더 크다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 자체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앞서 말한 감독의 사적 욕구가 강하게 드러나는 것 같달까요. 감독은 여기서 리차드의 집요함을 더 드러내고 싶었던 것뿐이니까요. 그럼으로써 블랙무비로서의 정체성이 한층 더 살아났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리차드가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저는 실은 사적 욕구를 충실히 채운 레이날도 마르쿠스 그린이 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실은 더 되고 싶은 건 셀레나 윌리엄스였습니다. 테니스 선수.. 너무 멋있어 보이더라구요. 영화보고 실제 선수 영상을 유튜브에서 얼마나 찾아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영화에 나온 가장 멋있었던 대사 하나를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이 대사는 셀레나 윌리엄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실제 셀레나 윌리엄스가 인터뷰에서 한 말로, 유튜브에서 영상을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테니스 코치가 이제 막 훈련을 시작한 11살 셀레나에게 ‘프로가 된다면 누구처럼 플레이하고 싶은지’ 묻습니다. 셀레나가 대답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처럼 플레이하면 좋을 것 같아요.(Well, I like other people play like me.)” (다음 화에 계속..)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드리는 말씀
1. 이번주부턴 '스티비'라는 메일링 서비스를 사이트를 활용해 메일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혹시 메일 형태가 조금 다르다는 게 느껴지셨는지요?) 그리고 '크리에이터 트랙'이란 것에 선정되어서 소정의 혜택 + 조금 더 제 메일링 서비스를 많은 사람들한테 알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그냥 자랑삼아 적어 보았습니다.

2. 이번주 개봉작 중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벨파스트> 강력 추천합니다. <리코리쉬 피자>가 최고라고 적었는데, <벨파스트>가 그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습니다.

3. 지난주에 말씀드린 영화 모임은 세부 사항이 거의 다 결정된 상태입니다. 조만간 원데이원무비가 발송되는 토요일이 아닌 다른 날에 공지를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으니, 긴장 늦추지(?) 않으시길,,

sti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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