ㅈ) 주제를 제안할 때는 <한국에서 박사 하기>를 한 번 읽어보고 토론에 임하려 했는데 이런저런 일에 치이다 보니 결국 못 읽었습니다. 인터뷰 기사 중에 “대학원의 본질적 기능은 연구자 양성에 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한겨레] “우리는 낡은 은마아파트에 사는 꼴”…한국 대학원의 민낯↗
이 진단은 연구자 양성이 누구에게 왜 필요한가라는 더 본질적인 질문을 남겨 놓는 진단으로 읽힙니다.
ㅂ) 저도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대학원의 본질적 기능을 생각하다 보니, '대학원'이라는 곳이 언제 처음 생겼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는데요. 위키백과의 정보입니다.
[위키백과] 대학원↗
대한민국의 대학원은 1946년에 시행된 신학제에서 의과대학을 제외한 일반 대학에 1년 이상의 대학원 과정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였으며, 1949년 12월 「교육법」에 의해 처음 실시되었다.
'연구자'와 '전문가'의 차이가 무엇일지도 궁금해집니다. 위 위키 정보에는 대학원의 목적이 "전문가 양성"이라고도 나옵니다.
ㅈ) 오늘날 석사, 박사 과정에 진학하는 사람 중에 "연구자"를 지향하거나 실제로 "연구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점점 소수가 되고 있다는 현실까지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전문가와 연구자가 상당 부분 겹치지만 전문가 중에서도 더 이상 연구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연구자 중에는 전문가를 지향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므로 일정한 교집합을 갖는 두 집단을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ㅂ) 인터뷰 기사도 그렇고요, 대학원 관련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지도교수'와 대학원생 간의 문제가 많이 이야기되는 것 같은데요, '지도교수'도 일단은 '연구자'로 볼 수 있겠지요? 혹은 연구자와 전문가의 관계처럼 교수와 연구자도 일정한 교집합을 갖는 두 집단으로 볼 수 있을까요?
ㄹ) 본질적 기능이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기능이 본질적 기능이라 할 수 있는지. 그에 앞서 대학원이라는 실체에 대한 물음도 필요해 보입니다~^^
ㅈ) 여기서도 "대한민국의 대학원"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알튀세르 식으로 보면 대학원도 대학처럼 "국가기구"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적" 국가가구인가는 지금의 신자유주의화를 고려해서 답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ㄹ) 음 '국가의 기구', 좋은 지적이십니다.
ㅂ) 연구자 중에는 전문가를 지향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단 대학원 안에서 연구자는 전문가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수료 이후에는 또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만, 대학원에서의 경험이 이후로도 크게 영향을 끼칠 것 같고요.)
ㅈ) 오늘날 대학원은 자본의 혁신과정에서 새롭게 요구되는 노동력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데, 그 기업적 요구를 총자본으로서의 국가가 주도적으로 충족시켜 나가는 기관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봅니다.
대학원이 대학원생에게 "전문가"가 될 것을 요구한다고는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오늘날 분과학문 간의 "통섭"과 같은 횡단화 경향도 있어서 탈전문화 요구도 동시에 제기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ㅂ) 대학원이 기업적 요구를 (국가가) 충족시켜 나가는 기관이라면, 청년들이 대학원 진학을 취업을 위한 스펙쌓기의 하나로 이용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 취업에 도움이 되냐 아니냐는 별도로 따져볼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ㅈ) 교수(가르치기)와 연구(알기)는 서로 다른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구된 것이 교수되겠지만 그것이 한 인격 속에서 결합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구하지 않고도 가르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데 그러한 가르침의 질은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질 것이 명백하므로 교수에게 연구논문 제출을 강제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로 보입니다.
연구와 교수의 분리경향(교사는 연구와 분리되는 것이 일정하게는 정당화되어 있습니다)을 강제적으로 한 인격 속에서 통일시키려는 장치랄까요?
대학원을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 보는 시각이 거시적 정의라면 미시적으로 한 개인에게 대학원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이 별도로 필요할 것입니다.
그 개인이 자본주의적으로 규정된 개인으로서 자본 과정에서 가변자본으로 기능하는 개인이라면 대학원은 자신의 노동력 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한 기관일 것입니다. "스펙쌓기"라는 말은 그것을 지칭하는 말로 읽힙니다. 그러니까 대학원은 단순히 취업을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더 높은 소득, 더 많은 권력을 제공하는 일자리에 취업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ㅂ)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나마도 무용해진 것 같기는 합니다. 취업의 문은 더 좁아지고, 학위를 가진 사람은 점점 더 많아지고….
ㅈ) 대학원생들이 제기하는 불만의 대부분은 오늘날의 대학원이 개인의 이러한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으로 보입니다.
ㅂ) 대학원의 본질적 기능이 무엇이냐와 별개로 현재 어떻게 기능하고 있느냐를 생각해 보면, 학업을 마치고도 취업하지 못하는 청년들의 불안과 불만은 흡수해서 그것(불안,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아주는 완충지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ㅈ) 이런 의미에서는 일종의 가상공간이네요.
ㄱ) [경향신문] 대학원은 왜 덜 매력적인 선택지가 됐을까↗
<한국에서 박사하기> 책에 참여한 이들은 자신을 어떻게 부를까. ‘다단계 학회 사업’이나 ‘부실 학술 활동’ 같은 한국 학술장의 문제를 지적해온 전준하는 ‘철창 속 일차원적 연구자’로 칭한 적이 있다고 했다. 여러 연구 프로젝트의 연구 보조원, 전일제 조교, 번역, 자료 코딩, 학회 간사, 과제 채점 등에 기대 생활비와 학비를 마련한 유현미는 “학계를 굴리는 온갖 미세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스스로의 현실을 ‘알바천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말한다.
ㅈ) 다단계 학회사업이라는 표현이 재미있네요. 대학원 자체가 하나의 다단계기업체라고 할 수 있지도 않을까요? 새로이 충원되는 동력에 사업이 의존하고 있는...
ㅅ) 프로젝트 사업이나 용역 사업을 대학원 그룹이 받아 수행하는 경우들도 많고, 해당된 인건비를 통해 유지하는 경우도 많아서 연구기업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ㅈ) 연구"대행"기업이 어떨까요? 요즘 지자체, 정당 등은 정책을 정책연구기업들에 외주로 주더군요. 이런 식으로 다양한 권력기구와 산업기구가 필요한 연구작업을 대학원에 외주화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ㅂ) 대학원 내의 지식의 위계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