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 호
(통권 74호) 2023. 3. 19
🤟 열린 세미나 🤟



사변적 실재론 입문

Speculative Realism: An Introduction


『사변적 실제론 입문』은 현대 철학의 사변적 전회를 선도한 최초의 사변적 실재론자 4인의 철학적 사조들을 통해 사변적 실재론의 핵심 논쟁과 전개 상황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 책의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신유물론과 함께 오늘날 철학의 새로운 흐름으로 주목받고 있는 사변적 실재론에 관해 알아보고, 그것이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어떤 시사점을 갖고 있는지, 다른 사유 방식들과의 차이나 공통점 들은 무엇인지 등을 토론하고자 합니다.
열린 세미나는 관심 있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토론회입니다.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 일정: 3월 23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 장소: 카카오톡 <열린 세미나> 오픈채팅방

  • 참고자료
<도서출판 갈무리> 책 소개 페이지

👇  지난 세미나 갈무리  👇 

 

한국 대학원의 민낯

3월 9일 (목) 저녁 7시 30분

 


  소주제
  1. "대학원의 본질적 기능"은 무엇인가?
  2. 대학원과 지식의 위계
  3. 대학원 생활의 현실 혹은 노동으로서의 학업
  4. 대안은 무엇인가?
1. "대학원의 본질적 기능"은 무엇인가?

ㅈ) 주제를 제안할 때는 <한국에서 박사 하기>를 한 번 읽어보고 토론에 임하려 했는데 이런저런 일에 치이다 보니 결국 못 읽었습니다. 
인터뷰 기사 중에 “대학원의 본질적 기능은 연구자 양성에 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한겨레] “우리는 낡은 은마아파트에 사는 꼴”…한국 대학원의 민낯

이 진단은 연구자 양성이 누구에게 왜 필요한가라는 더 본질적인 질문을 남겨 놓는 진단으로 읽힙니다.


ㅂ) 저도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대학원의 본질적 기능을 생각하다 보니, '대학원'이라는 곳이 언제 처음 생겼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는데요. 위키백과의 정보입니다.

[위키백과] 대학원

대한민국의 대학원은 1946년에 시행된 신학제에서 의과대학을 제외한 일반 대학에 1년 이상의 대학원 과정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였으며, 1949년 12월 「교육법」에 의해 처음 실시되었다.

'연구자'와 '전문가'의 차이가 무엇일지도 궁금해집니다. 위 위키 정보에는 대학원의 목적이 "전문가 양성"이라고도 나옵니다.

 

ㅈ) 오늘날 석사, 박사 과정에 진학하는 사람 중에 "연구자"를 지향하거나 실제로 "연구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점점 소수가 되고 있다는 현실까지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전문가와 연구자가 상당 부분 겹치지만 전문가 중에서도 더 이상 연구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연구자 중에는 전문가를 지향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므로 일정한 교집합을 갖는 두 집단을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ㅂ) 인터뷰 기사도 그렇고요, 대학원 관련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지도교수'와 대학원생 간의 문제가 많이 이야기되는 것 같은데요, '지도교수'도 일단은 '연구자'로 볼 수 있겠지요? 혹은 연구자와 전문가의 관계처럼 교수와 연구자도 일정한 교집합을 갖는 두 집단으로 볼 수 있을까요?


ㄹ) 본질적 기능이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기능이 본질적 기능이라 할 수 있는지. 그에 앞서 대학원이라는 실체에 대한 물음도 필요해 보입니다~^^


ㅈ) 여기서도 "대한민국의 대학원"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알튀세르 식으로 보면 대학원도 대학처럼 "국가기구"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적" 국가가구인가는 지금의 신자유주의화를 고려해서 답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ㄹ) 음 '국가의 기구', 좋은 지적이십니다.


ㅂ) 연구자 중에는 전문가를 지향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단 대학원 안에서 연구자는 전문가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수료 이후에는 또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만, 대학원에서의 경험이 이후로도 크게 영향을 끼칠 것 같고요.)


ㅈ) 오늘날 대학원은 자본의 혁신과정에서 새롭게 요구되는 노동력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데, 그 기업적 요구를 총자본으로서의 국가가 주도적으로 충족시켜 나가는 기관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봅니다.

대학원이 대학원생에게 "전문가"가 될 것을 요구한다고는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오늘날 분과학문 간의 "통섭"과 같은 횡단화 경향도 있어서 탈전문화 요구도 동시에 제기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ㅂ) 대학원이 기업적 요구를 (국가가) 충족시켜 나가는 기관이라면, 청년들이 대학원 진학을 취업을 위한 스펙쌓기의 하나로 이용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 취업에 도움이 되냐 아니냐는 별도로 따져볼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ㅈ) 교수(가르치기)와 연구(알기)는 서로 다른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구된 것이 교수되겠지만 그것이 한 인격 속에서 결합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구하지 않고도 가르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데 그러한 가르침의 질은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질 것이 명백하므로 교수에게 연구논문 제출을 강제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로 보입니다.

연구와 교수의 분리경향(교사는 연구와 분리되는 것이 일정하게는 정당화되어 있습니다)을 강제적으로 한 인격 속에서 통일시키려는 장치랄까요?

대학원을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 보는 시각이 거시적 정의라면 미시적으로 한 개인에게 대학원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이 별도로 필요할 것입니다.

그 개인이 자본주의적으로 규정된 개인으로서 자본 과정에서 가변자본으로 기능하는 개인이라면 대학원은 자신의 노동력 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한 기관일 것입니다. "스펙쌓기"라는 말은 그것을 지칭하는 말로 읽힙니다. 그러니까 대학원은 단순히 취업을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더 높은 소득, 더 많은 권력을 제공하는 일자리에 취업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ㅂ)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나마도 무용해진 것 같기는 합니다. 취업의 문은 더 좁아지고, 학위를 가진 사람은 점점 더 많아지고….


ㅈ) 대학원생들이 제기하는 불만의 대부분은 오늘날의 대학원이 개인의 이러한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으로 보입니다.

 

ㅂ) 대학원의 본질적 기능이 무엇이냐와 별개로 현재 어떻게 기능하고 있느냐를 생각해 보면, 학업을 마치고도 취업하지 못하는 청년들의 불안과 불만은 흡수해서 그것(불안,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아주는 완충지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ㅈ) 이런 의미에서는 일종의 가상공간이네요.


ㄱ) [경향신문] 대학원은 왜 덜 매력적인 선택지가 됐을까

<한국에서 박사하기> 책에 참여한 이들은 자신을 어떻게 부를까. ‘다단계 학회 사업’이나 ‘부실 학술 활동’ 같은 한국 학술장의 문제를 지적해온 전준하는 ‘철창 속 일차원적 연구자’로 칭한 적이 있다고 했다. 여러 연구 프로젝트의 연구 보조원, 전일제 조교, 번역, 자료 코딩, 학회 간사, 과제 채점 등에 기대 생활비와 학비를 마련한 유현미는 “학계를 굴리는 온갖 미세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스스로의 현실을 ‘알바천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말한다.


ㅈ) 다단계 학회사업이라는 표현이 재미있네요. 대학원 자체가 하나의 다단계기업체라고 할 수 있지도 않을까요? 새로이 충원되는 동력에 사업이 의존하고 있는...


ㅅ) 프로젝트 사업이나 용역 사업을 대학원 그룹이 받아 수행하는 경우들도 많고, 해당된 인건비를 통해 유지하는 경우도 많아서 연구기업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ㅈ) 연구"대행"기업이 어떨까요? 요즘 지자체, 정당 등은 정책을 정책연구기업들에 외주로 주더군요. 이런 식으로 다양한 권력기구와 산업기구가 필요한 연구작업을 대학원에 외주화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ㅂ) 대학원 내의 지식의 위계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2. 대학원과 지식의 위계

A, B, C … 서울대에서는 알파벳이 모자랄 만큼 교수 성폭력 사건이 빈번히 고발되고 있다. 학내에서도 교수 성폭력을 규탄하고 이를 해결해달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ㅈ) 대학원생은 대학생보다 높은 서열에 놓이지만 서열과 위계화는 그 위로도 계속됩니다.

대학까지는 성적이 지식의 위계를 결정하는데 대학원 이후에도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요?

다른 한편 교수와 학생의 지적 위계는 부동의 것으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랑시에르의 문제의식)


ㅅ) 대학원도 특수대학원 등 종류가 다양하고, 직업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아서 꼭 성적으로 대학원을 결정하는 것 같진 않습니다.


ㄱ) 몇 년 전부터 여러 가지 교수 갑질들이 폭로되었는데 실질적인 변화가 별로 없었던 것일까요?


ㅅ) 대학 학부에서 교수와 학생의 관계와 대학원에서 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미세하게 다른 것 같습니다. 전자의 경우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교수의 위치가 강조되면 아직 대학원에서는 도제식 관계가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건 대학원의 운영과정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연구하고자 하는 분야를 교수의 분야대로 맞춰야 하거나, 교수의 컨펌이 필요한 경우들이 있어서.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ㅈ) 교수가 대학원생을 노예처럼 부린다거나 교수가 여학생을 성폭행한다거나 하는 것("갑질")은 교수와 대학원생의 이 제도화된 지적위계를 사회적 위계로 확대시킨 것의 결과가 아닐까요?


ㄱ) <한국에서 박사하기> 저자들에 따르면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대하는 교수들의 태도가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한겨레] “우리는 낡은 은마아파트에 사는 꼴”…한국 대학원의 민낯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대하는 교수님들의 태도가 많이 다르다. (교수님들은) 학부생들을 더 두려워한다. 학부생들은 학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길이 열려 있기도 하고, 문제가 있으면 집단행동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대학원을 바꿔보자는 목소리 자체가 거의 없었던 데는 이런 점도 영향을 끼쳤다.


ㅂ) 대학생-교수의 관계도 대학원생-교수의 관계만큼이나 위계적일 것 같은데요, 그러고 보니, 요즘 학부생들을 대면하는 교수는 대부분 시간강사가 많은 것 같던데 그런 이유도 있을까요?

대학의 졸업은 비교적 쉬운 반면 (일정정도의 학점만 취득하면 되지요?), 대학원의 졸업(? 수료, 학위 취득)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료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의 전권을 가진 지도교수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ㅅ) 학내 총학생회나 대자보 문화 등이 지금도 존재하고, 수적으로도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습니다. (수는 학부생수와 대학원생수 입니다)


ㄱ) 시간강사들의 열악한 처우도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 판결을 둘러싸고 논란이 크다고 들었습니다.

[매일노동뉴스] “강의시간만 소정근로 해당” 시간강사 주휴수당 깎은 서울고법


ㅂ) 왜 대학생에 비해 대학원생은 ‘집단행동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지 않는가가 궁금했습니다. 수적 차이는 분명 영향이 있겠네요.


ㅈ) 권력기관의 상층부로 올라가면 개개 권력자가 일종의 국가기관 혹은 헌법기관(의 자격을 부여받고 그것)으로 행세합니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국회의원 개인, 법관 개인은 헌법기관으로서의 독자성을 부여받지요. 검사도 준헌법기관처럼 행세합니다. 교수는 헌법기관은 아니고 국가나 자본에 고용된 피고용자이지만 상대적으로 큰 독자성과 권력을 부여받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독자적 권력이 "자신을 지도교수로 선택한" 대학원생들을 자신의 도제로 만들 수 있는 위계적 힘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ㄱ) 대학원생 노조 홈피입니다.

대학원생노조


ㅈ) 대학생은 교수를 선택하지 않지만 대학원생은 교수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3. 대학원 생활의 현실 혹은 노동으로서의 학업

ㅂ) 다단계 연구 대행 기업이라는 표현도 나왔었는데요, 또 어떤 현실 들에 주목해 볼 수 있을까요?


ㅅ) 요즘에는 전업학생, 풀타임 학생과 직장인 학생으로 분류하여 부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전업/풀타임 대학원생들은 주로 조교 역할을 수행하며 학비를 커버하는데 이들을 노동자가 아니라 근로 장학생으로 분류되더라고요. 전업, 풀타임 학생은 직장을 다니지 않고 공부하는 학생을 가리킵니다.


ㅈ) 의무교육인 초중등교육, 준의무교육(무상교육)인 고등학교와는 달리 대학과 대학원은 선택교육입니다. 등록금을 내고 교육을 받는 만큼 이 경우에는 원리적으로 보면 학생집단이 교수를 고용하여 교수로 하여금 학생 자신이 지적으로 계발될 수 있도록 지적 노동을 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와는 다른 측면으로 국가가 기업을 위해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교수와 학생을 고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지적 노동을 시키는 것이라면 학생들에게는 교수에게와 마찬가지로 임금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ㅅ) 학업과 공부는 다른 개념일까요? 공부를 노동으로 생각한다면 아는 것을 즐거움과 기쁨들이 소거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ㅂ)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대학원생의 월급'이라는 것은 '조교 노동'(?)에 해당하는 것인가요?

 

ㅈ) 대학원생에게 노동의 양상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1)조교 2)프로젝트 3)연구원과 같은 뚜렷이 노동으로 볼 수 있는 피고용 노동 외에(아니 아래에) 학업처럼 노동으로 보이지 않는 활동이 노동의 성격을 갖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재생산노동으로서.

학업은 자본의 관점에서 본 공부이고 공부는 삶의 관점에서 본 학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ㅅ) 네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ㄱ) [경향신문] 대학원생 연구원도 ‘노동자’로 첫 인정

대학원생 학생연구원도 ‘노동권을 보호받아야 할 노동자’라는 노동위원회의 첫 판정이 나왔다. 대학원생 조교가 아닌 연구원의 노동자성과 노동권이 노동위원회에서 인정된 것은 처음이다. 대학원생은 연구 참여나 조교 등으로 사실상 노동자처럼 일하면서도 ‘학생’이라는 이유로 노동권을 보호받지 못했다. 이번 판정이 노동법 사각지대에 놓인 대학원생의 노동권 보장에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ㅈ) 이 경우는 뚜렷하게 노동인 경우조차 노동권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인정받는 것이고, 대학원생의 학업연구활동 자체는 논외로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대학 이상의 학업이 노동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즉 의무교육과 준의무교육은 무상화의 방식으로 일정한 수준에서 국가적 수준의 재생산노동으로 인정)은 그것이 더 나은 일자리를 위한 선택이라는 요소를 갖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강제한 것이 아니라 선택한 것이니 노동일 수 없다는 주장이 관철되고 있다고 할까요? 그런데 선택한다고 해도 거기에 불가피성이 작동하면 강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동자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고용할 고용주를 선택적으로 찾아나서는데, 그렇게 자기선택을 한 경우에도 뒤따르는 것은 강제노동입니다. 대학원생 되기를 강제하는 불가피성은 대학원생 되지 않은 존재에게 강제되는 삶의 고통들(차별대우, 저임금, 장시간 노동 등)일 것입니다.


ㅅ) 노동으로서의 학업으로 대학원 공부를 생각한다면, 앞서 이야기 나누었던 취업을 하기 위한 자격과정처럼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대학원에서 알게 된 정보, 공부 등을 국가와 기업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ㅈ) 전업적 예술가가 제도로서의 예술과정에서 익힌 기술과 기량을 다중을 위해 사용할 가능성을 나는 "스파이 예술가" "예술적 스파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ㅅ) 막상 대학원에 투자하게 되는 비용과 시간, 여러 가지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다른 가능성을 찾는 것이 순탄하게 느껴지기만 하는 것 같진 않습니다. 만약 대학원에서 쌓인 정보와 내용들을 다른 방식으로 활용할 가능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대학원 과정의 변화가 시급해 보입니다.

3. 대안은 무엇인가?

ㅈ) 맑스 시대에 생존(살아남기 위해)이 주로 생물학적 생존을 의미했다면 우리 시대에 생존은 사회적 생존(사람답게 살아남기 위해)을 의미하고 사람답게 살아남기 위해 강제되는 것이 대학원생 되기라면 대학원생 되기는 광의의 노동자 되기의 일환이며 대학원생의 생활은 좀 복잡하게 구성된 노동현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안은 무엇인가? …어려운 문제로 느껴집니다. 대학원생이 찾는 대안과 대학원생이 아닌 사람이 찾는 대안은 다를 것 같습니다. 만약 대학원의 본질이 앎의 기관이라면, 대학원이라는 형식, 제도가 꼭 필요할까요?

 

ㅅ) 대학원생에게 대학원 과정이 필요한 노동 현실이기도 하지만, 배움의 의미도 곳곳에 존재할 것 같습니다. 학업의 과정이 갖는 다양한 면이 있어, 대학원생 개인에게는 어떠한 줄다리기를 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 같습니다.

 

ㅂ) 대학원생이 대학원에서의 연구 노동을 다중을 위해 사용할 가능성으로 만드는 데에도 첫 번째 걸림돌은… 역시 '지도교수'가 아닐까 싶은데요. 대학원생과 지도교수의 관계는 도제관계와 비슷하다고 하니 자본가-노동자의 적대관계와는 다른 어떤 지점들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ㅅ) 공부하는 과정에서 체계나 같이 공부하는 그룹 등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체계가 꼭 제도여야 하는가와, 지금과 같은 형태가 유지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입니다. 한편으로는 체계를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제도라는 형식일 것 같기도 합니다.

 

ㅈㄱ) 어떤 체계화를 통한 공인할 수 있는 연구 결과들이 필요한 사회인 것 같습니다.

 

ㅈ) 오늘날 대학원은 대학원시설, 지도교수, 학우(인맥), 커리큘럼, 프로젝트, 장학금을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중의 상당 부분은 국가와 기업의 지원금에 의해 유지됩니다.

대학원이 국가기관인 한에서 그것은 자본의 축적에 도움이 되는 학업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의 대학원에 삶에 도움이 되는 요소들이 없지 않은 데 그것은 대학원 자체의 기능이라기보다 대학원을 구성하는 요소들(교수, 학생 등)의 투쟁의 효과일 것으로 판단됩니다. 물론 자본의 운동 그 자체도 늘 삶에 도움이 되는 요소들(사용가치)과 불가분하게 얽혀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ㅈㄱ) 네, 중구난방 아무거나 믿을 수 있을 만한 연구 결과가 어떤 가치를 획득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기존의 국가적이거나 또는 사회적 교육에 따라 살아온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ㅈ) 시간이 없어 구체적으로 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지만, 어떻게 앎/연구/전문성이 삶의 시간으로 귀결되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대학원이라는 제도 과정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커리큘럼은 연구가 밟아야 할 공정을 담고 있는데, 그것이 자본을 위한 것으로 짜이지 않고 삶을 위한 것으로 짜여지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고 대학원시설들이 다중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개방되고 다중이 강의나 연구과정, 장학 제도에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도 모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ㅈㄱ) 네 삶의 시간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광범위한 토대들을 갖출 수 있을지, 그만한 노력들이 나타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ㅂ) 열린 대학원의 모습,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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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 (토) 오후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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