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신림동 외할머니댁을 가는 날이면 엄마가 자주 하는 말이 있었다.


"무엇이든 유심히 봐둬야 해. 길 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아무생각 없이 걷지 말란 말이야. 내가 탄 버스가 몇번 버스인지 경로가 어떻게 되는지 봐둬야 나중에 커서도 혼자 다닐 수 있는거지"


당시 나는 늘 머릿속에 무엇을 그릴지 궁리하느라 겉으로 보기에는 멍해보이는 경우가 많았고 실제로 그림 외에는 아예 신경을 차단해서 가족들과 걷다가 혼자 외딴길로 빠지기 일수였다. 어릴적의 나는 부모가 부여하려는 장녀의 책임이나 역할에 관심이 없었다. 엄마가 보기에는 충분히 똘똘하지 못한 장녀였을 것이다. 


엄마의 관찰 교육은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유난히 예민하고 감이 빠른 사람이었던 엄마와 함께 걸을 때는 뜬금없이 지나간 사람의 평가를 듣기도 했는데, 같이 보고 있지 않아서 호응하지 못하면 잔소리를 듣기 일수였다. 


”멍때리면서 걷지 좀 마.“


그렇게 20년이 흐르니 장면과 상황, 특정한 부분을 기억하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사람이니 시간이 지나면 오래 담아두지는 못하지만 그날 오전에 유심히 본 어떤 사람의 옷차림은 잠들기전까지 잊지 않았다. 주특기가 된 이 습관은 빛을 발하던 때가 있다. 


20대 초반에 친구와 유럽여행을 갔던 스페인에서였다. 세비야에 묵으면서 저녁에 게스트하우스와 연계된 플라멩고 공연을 보러 갔었다. 어둠이 앉은 세비야 구시가지를 생각없이 공연장까지 가이드만 따라갔다가 난감한 일이 생겼다. 공연이 끝나고 가이드를 찾으니 사라지고 없던 것 이다. 알아서 숙소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곤란했다. 첫 여행이라 친구와 나 모두 유심칩도 따로 없었고 오직 와이파이가 잡힐 때만 휴대폰을 썼기에 지도앱을 보아도 제대로 방향을 잘 잡지 못해 밤에 아무것도 모르는 외국의 길거리에서 어찌해야하는지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이드를 따라오며 유심이 봐둔 골목 이미지를 복기하며 더듬더듬 제법 숙소 가까이까지 돌아 온 기억이 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지형지물이나 사람을 유심히 봐야한다. 그냥 보는 것과 내가 본 형태를 다시 만들어내기 위해 유심히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더 잔상이 오래 남는다. 이 훈련은 따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할 수 있다. 내가 그림을 그린다고 가정하고 눈앞에 보이는 것을 찬찬히 보면 되는 것이다. 형태를 따라가며 보면 더 정확하게 볼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다. 이 행위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거나 시간을 죽여야할 일이 있을 때 유용하다. 카페에 있다면 내가 앉은 위치의 테이블, 의자 맞은편에 사람들이 앉은 형태, 입은 옷 색감 브랜드나 모양들을 아주 천천히 눈으로 그리듯 보고 있으면 시간이 금방 간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다. 제일 좋은 점은 길거리에서 수상한 사람을 더 잘 알아볼 수 있고 기억해내서 피할 수 도 있다는 점이다.  


사실 엄마가 강조한 부분은 이 부분이었다. 


길거리에서 수상한 사람을 피하기 위해 사람이나 상황을 유심히 보고 관찰 할 것.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행동이 좀 달라보이면 나는 냅다 그 사람의 신발을 유심히 보고 기억한다. 생각보다 길거리에서 한번 마주친 사람을 두번 이상 마주칠 확률이 꽤 높기 때문에 이 기억의 도움을 받아 위험할 수 있던 상황을 여러번 피하기도 했다. (서울 시내 길거리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꽤 많다...)


여담) 이 습관이 고등학생때 제대로 잡혀있었다면 암기 하나는 걱정을 안했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이 기술은 그림 그릴 때만 쓰기로!